그림자 밟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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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고 돌아... [그림자밟기]

 

그림자는 혼자서 움직이지 못한다.

"몸"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따라다닐 뿐이다.

몸이 불분명한 제스처를 취하면 그대로 흐리멍덩한 모습을 재생산한다.

확고한 의지로 뿌리치거나 단호하게 떨쳐내버리는 행동을 한다면 그림자 또한 칼같이 그 대상을 뿌리치고야 말 텐데.

제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뱀의 형상을 한 그림처럼 서로의 끝을 잡고 뱅뱅 맴을 도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다.

 

'레드 다이어리'와 '블루 노트북' 의 비밀을 품은 채 남편 길에게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주인공 아이린의 삶의 궤적을 따라다니기가 힘겨웠다.

 

당신이 내 작업실로 내려와 오래된 서류 뒤에서 내 일기를 꺼내는 광경을 상상하면 참기 어려운 분노가 치민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반칙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이 일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본다. -70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설명을 보면서, 읽어내기가 쉽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더욱 쉬엄쉬엄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유사성과 대칭성을 사랑한 탓에 젊은 시절, 서로에게 속수무책 빠져들수 밖에 없었던 길과 아이린.

둘 다 홀어머니 손에 자랐고 둘 다 아버지를 알지 못했으며, 둘 다 혼혈 원주민이고 심지어 크리족과 치피와족의 피가 섞였다. 둘 다 논쟁을 좋아하고 독서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했고...

또 둘 다 친밀감을 금기시하고 살아왔지만 취하지 않은 채로 처음 섹스를 했을 때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이고 친밀해서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아, 어쩔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여!

뒤틀릴 대로 뒤틀린 것을 알게 되었지만 또다시 여행과 출산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잡고 살아가려고 한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벌써 셋이나 된다.

길은 화가로, 아내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며 "아메리카"연작 시리즈로 꽤나 잘 팔리는 작가의 대열에 끼게 되지만 주류로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아내의 나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그리지만 대중의 눈에 발가벗겨진 채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모델인 아내의 내면을 살피지 못한다.

 

난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길이 문손잡이를 잡고 대꾸했다. 서글프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였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아도 아주 특별하다고 생각해. 당신은 당신이 얼마나 많은 걸 가졌는지 모르고 있어. -129

 

급기야 남편은 아내의 모든 것을 구속하고 집착하면서 일기장을 훔쳐 보기 시작한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폭력을 쓰기도 한다. 이미 이 가정은 평범함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심하게 기울어져 있고 삐걱거리기 시작하며 누군가 조금만 풀썩이면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기도 하다.

아내는 어떻게든 남편과의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상담을 받아보기도 하지만 도무지 둘 사이엔 상담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 벽과 벽은 도무지 서로 맞선 채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둘 사이에 무슨 앞날이 남아 있을까.

  

남편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레드 다이어리'에 써내려간 조작된 그녀의 현실을 남편은 금방 간파해내고 둘은 언제 그렇게 대립했냐는 듯 폭소를 터뜨리고 사랑을 나눈다. 이혼 서류를 내미는 아내를 보고 남편은 울면서 그녀를 강간한다. 신고하라는 혈육의 조언에도 온 가족이 함께 불꽃놀이 구경을 간다.

알코올에 의존해야만 하는 아이린이 마리화나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아이들을 보며 이제는 이혼을 결심하겠지. 했는데...

이미 파국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와 있음에도 아이들을 위해서 남편 길을 냉정하게 뿌리치지 못한 아이린 때문에...소설은 예상치 못했던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오빠 플로리언보다, 남동생 스토니보다 내면이 단단했던 딸, 리엘은 인디언 조상들의 역사를 읽으며

깊이있고 강인하고 영민하고 참된 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리엘의 목적은 아빠의 힘을 빼앗는 것이었다. 리엘은 과연 그렇게 자란 것 같다.

이 소설은 엄마인 아이린이 남긴 레드 다이어리와 블루 노트북에 자신의 기억을 더하고 이모 루이즈의 증언을 덧붙여 리엘이 완성한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인지 절절하고 슬프지만 함부로 욕할 수 없는 고귀함을 품고 있다. 나의 부모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 하는 듯,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리엘의 어조는 담담하고 당당하기조차 하다.

 

깊은 어둠에 푹 잠긴 이야기라 며칠을 어두운 표정으로 있었다.

마침내 한 손 사이로 흘려보낼 재만 남긴 채 타오른 불꽃을 보며 희미하게 웃어본다.

이렇게 끝이 났구나!

 

부부 상담을 받으러 갔을 때 둘은 비무장지대를 들먹이며 비유를 통해 본질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저는 아이린과 제가 비무장지대의 양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갈라선 채 날카로운 철조망을 세우고 살벌하게 감시하면서 첩보전을 펼치고 있죠. 우리 사이에는 저와 제 아내의 그리움과 사랑의 띠가 있습니다. 때 묻지 않은 채로요. -193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가 품은 천혜의 아름다움 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속은 뻥뻥 터지는 지뢰밭임을 알고 있는지.

길과 아이린. 비무장지대를 걷지 말고 날아다니며 화해하고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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