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짓하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
김재희 지음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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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그리고 짓 [섬, 짓하다]

 

섬,짓하다라고 쓰여 있지만 섬찟하다로 읽게 된다.

다시 한 번 쉼표를 따라 쉬어 읽어도 섬찟하다로 발음된다.

 

제목 그대로 내용은 섬찟하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고 그것이 지켜지는 사회가 안전한 사회이고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고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저 오늘 알람에 맞춰 제대로 일어나 새로이 시작하는 하루가 주어지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천하태평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그야말로 행운이 아니었나, 생각할 정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 상에서는 일베같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옆집에서는 조용히 사람이 죽어나가며 과거의 상처를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으니 이 세상은 그렇게 안전한 곳만은 아닌가 보았다.

세상 모르고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 곁을 지키던 아기 엄마가 맑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라고 가습기를 틀어주었는데, 아기는 가습기 살균제로 나날이 폐가 망가져 가고 있었다...(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스터리보다 더 머리털이 곤두서는 사건이다!)

이런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사회이고 보니, 소설 속 어떤 일도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라며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다.

 

김재희 작가는 주로 역사 미스터리를 써오다가 이번에 현대적인 분위기로 색다른 시도를 했다고 한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경성 탐정 이상]이 낯이 익는다.

[섬, 짓하다]는 프로파일러라는 이색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며 이 책은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

 

경찰이 되고 싶어 경찰이 된 것은 아니지만 김성호는 심리학 석사 학위를 따고 경장으로 특채되어 프로파일러로 활동하게 되었다. 경찰청에서는 한국형 범죄분석시스템의 토대를 만들자는 취지로 프로파일러들을 특채했지만 절반 이상은 경찰직을 포기했다. 매일 잔혹한 살인사건의 자료와 사진을 접하는 일은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미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CSI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체 검시하는 것을 보고, 그게 정상이려니 시청자들은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장면을 보는 이들은 웬만큼 단련되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보고 있기 힘들 것이다. 나도 한 때는 멋있는 직업이라며 경찰인 남편에게 과학수사대에 자원하는 건 어때?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 미쳤니?" 와 비슷한 수준의 질타 뿐이었다.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긴, 그렇겠지...

보는 사람이 멋있다며 하트 뿅뿅 하고 보는 것일 뿐,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아서 하는 것이겠냐고...

 

프로파일러 김성호는 하나리라는 여인의 살해 용의자로 한 고등학생 면담을 의뢰받았다. 학생은 주간파 사이트에 글을 올렸을 뿐, 그녀를 죽인 건 아니라고 말했다. 김성호는 그를 용의자에서 배제하고 사이트의 다른 이용자를 용의자로 올리자고 제안한다. 사건에 깊이 개입한 것도 아닌데 인터넷에서 자신의 신상이 털리고 담당형사로부터 곤혹을 치르게 되자 잠시 이 사건에서 물러나 진도 삼보섬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대한 프로파일을 맡아 출장을 가게 되는 김성호.

하나리 사건에서 갑자기 진도 사건으로 흐름이 바뀌자 '이게 뭔일?' 했지만, 이 설정은 다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니 걱정할 것 없다.

 

어쨌든, 제목에서 뭔가 으스스한 것을 암시한 바, "섬"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삼보섬에 도착하자마자 국립민속박물관 소속 여도윤이란 사람과 동행하게 되는데 그는 실종사건에 도움을 줄 필적감정서를 의뢰받은 교수의 대타였다. 사건의 프로파일을 하는 것과 별개로 여도윤은 이상하게 성호의 과거를 건드리는 질문을 자주 한다. 성호의 약점이 바로 과거의 어느 시점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다만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고양이의 죽음, 잔인한 홍태기, 불쌍한 한남기 그리고 안타까움이란 단어 정도이다.

무당의 굿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응어리를 끄집어내는 일종의 주술적인 퍼포먼스이다 보니, 실종자의 혼을 달래기 위한 씻김굿 현장에서 김성호는 자신을 향해 일갈을 날리는 무당의 기세에 뭔가 움찔하고 만다. 아니, 아연실색했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연출하지 않고서야 애써 가둬온 기억이 날뛸 리가 없는데.

과거 기억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여도윤은 더이상 여도윤이 아닌, 김성호가 잘 알던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이니 만큼 [섬, 짓하다]는 사건의 흐름과 함께 주인공 김성호를 다루는 데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한다.

보통의 미스터리에서는 종종 탐정이나 주인공의 약점이나 과거나 캐릭터의 여린 부분으로 작용하며 조금씩 내비치기는 하는데, 김성호는 그 수준을 훨씬 넘어 '이 양반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수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기억 상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비밀을 감추고 있었는지가 드러나면서 삼보섬에서의 실종사건의 실마리도 서서히 잡혀간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쉽게 동화되지 못할 듯 싶은 존재들도 종이 한 장 차이로 우리와 다르다 낙인찍힌 것일 뿐.

그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가 섬찟하다.

 죄의식 없이 인터넷상에서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실제상황에선 이마에 아이디를 적어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구별해낼 길이 없다는 것도 섬찟하다.

죄값을 치러낸 인간은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겠지만 차마 죄를 발설하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두어야만 하는 사람의 수렁에 빠진 인생 또한 섬찟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섬찟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

섬을 배경으로 뭔가가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섬, 그리고 짓"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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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16: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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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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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랑! 어행봉위!  [속 항설백물어]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굼실굼실, 어둠이 움직였다.

드륵, 하고 문이 열렸다. 그 순간...

후욱, 사방등에 불이 들어왔다. 희미하게 행자두건이 떠오른다. 마타이치다.

(,,,)

마타이치는 그렇게 말한 후 짤랑, 하고 요령을 울렸다.

<노뎃포 중, 39>

 

항설백물어에서 잊을 만 하면 나오는 후렴구 같은 문구가 바로 마타이치가 요령을 울린다는 표현이다.

이 문구가 나오면 기묘한 이야기 속에 푹 젖어 있다가 흠칫, 몸을 떨며 내 몸이 현실에 속해 있음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는 모두 2권으로 된 시리즈물이다.

(교고쿠 나츠히코가 [항설백물어]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후 항설백물어]로 제 130회 나오키상을 받았다, 고 작가소개란에 쓰여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두 권이 전부다.)

귀신이야기를 물어물어 얻어들으러 다니는 모모스케가 괴담을 찾아 돌아다니며 얽히게 되는 사건들을 단편 형식으로 싣고 있지만 연결해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된다.

전작인 항설백물어를 읽을 때만 해도 그저 단편집이겠거니, 했고, 궁금한 인물이 있어도(산묘회의 오긴, 요령을 울리고 여운을 남기며 사라지는 마타이치 등) 캐릭터가 그러려니 하면서 과거를 캐낼 일이 이어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후항설백물어]에서는 산묘회의 오긴과 마타이치의 과거가 밝혀지고 꽤나 질긴 인연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여러 지방의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하는 것을 더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모모스케는 언젠가 백 가지 괴담을 모아 책으로 엮어낼 생각으로 일본 각지를 여행하고 있다.

여행길에서 일명 잔머리 모사꾼으로 불리는 마타이치, 산묘회의 인형사 오긴,신탁자 지헤이를 만나 독특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사건에 휩쓸리게 되는데, 그 초반의 이야기가 [항설백물어]에 그리고 [속 항설백물어]에서는 방랑무사 우콘, 고에몬 등의 인물이 더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등장인물들의 관계도가 그려진다.

뭔가 특이한 이력을 지닌 듯한 신비한 여인 오긴의 과거가 밝혀지면서 이들이 맞물리는 사건들이 자꾸만 연결되는 것이 앞의 [항설백물어]와는 또다른 재미를 선사한다고 하겠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이상하여 무언가 맺힌 것이 있으면 그것이 풀릴 때까지 번뇌와 괴로움에 시달린다.

악행을 저지른 이도,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도, 어떤 일을 계기로 하여 그 응어리를 풀어야만 편안한 마음에 이를 수 있다.

현대에는 정신과적 치료를 통하여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점집을 찾거나 무당을 찾아가 푸닥거리를 하고 굿을 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마음의 짐을 날려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딱딱한 의학적 치료료는 해결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쉽사리 풀리지 않는 그 무언가를 누군가는 종교를 통해, 누군가는 무속 신앙을 통해 풀려고 하는데, [항설백물어] 속 일본의 시대 배경에서는 "어행봉위" 를 행하는 이의 한 판 잘 짜여진 무대를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 소개된다.

그야말로 마술처럼, 멋들어지게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데 이용되는 것이 바로, 그 시대에 통용되었던 민간전승 이야기였다.

 

노뎃포-북녘의 심산에 있는 짐승으로 사람을 보면 박쥐처럼 무언가를 뿜어내 눈과 입을 막고 숨을 멎게 하여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고와이-고와이는 아만과 아집의 다른 이름으로 세간에서 말하는 무분별자다. 살아서는 법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으며 죽어서는 망념 집착의 마음을 끊지 못하고 무량의 형상으로 나타나 불법세법을 방해한다.

 

이런 식으로 민간전승이 소개되면 이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사건을 한 판 멋들어지게 짜서 그야말로 그 사건이 진짜인지, 귀신의 짓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정도로 사람들을 눈속임한다.

교고쿠 나츠히코 식의 "별스러운 연극"은 실로 내 마음에 쏙 든다.

모모스케 조차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연극에 끌려들어갔지만 나쁜 역할을 맡는 것은 언제나 악한 사람들 뿐. 죄를 지어 벌을 받아 마땅한 이들에게 벌을 내리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그 가책을 덜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법의 그물망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까지 말끔하게 해결하는, 이 기가 막힌 "연극"을 읽으며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로는 기가 막힌 연출에 찬탄을 금치 못하겠고 때로는 악한들의 최후에 고소해하며, 때로는 느닷없는 안타까운 결말에 눈물도 흘린다.

전작 [항설백물어]보다 더 강력해진 기묘한 미스터리를 선보이는 [속 항설백물어]

기다리고 기다리다 때를 놓쳐 너무 늦게서야 만나게 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짤랑! 어행봉위!

이젠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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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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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허무는 향기의 힘 [향기]

 

“향기” 하면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르누이가 만들어낸 향수를 맡은 발디니.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올랐다. 나폴리의 어느 정원, 저녁노을 속을 거니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보인다. 검은 곱슬머리 여인의 품에 안겨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인다. 창문 위로 장미덩굴이 뻗어 있고 그 위로 밤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오고, 멀리 어느 항구의 선술집에서는 음악이 흘러 나온다. 속삭이는 소리와 사랑의 고백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고 황홀한 전율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생생하다. -132

 

후각은 이토록 사람의 기억을 자극한다. 향기만으로도 하나의 완전한 세상, 풍요로운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은 [향수]이외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 필립 클로델의 산문집 [향기]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아니 [향수]와는 또다른 매력의 세계로 안내한다.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향기와 관련된 기억이란 기껏해야 음식 몇 가지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정도이리라.

장터 한가운데 좌판을 벌인 먹자골목에 보리밥집이 있었다.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올라오는데 뚜껑을 열면 아예 한동안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김 뒤로 사라진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밥 한 술 휙 떠서 그릇에 척 하고 담아 주시면 고슬고슬하면서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 반, 보리밥 반의 밥에 얼굴을 척 묻는다. 흐뭇한 미소는 뭘, 맛을 알까 싶은 9살 꼬마의 얼굴에도 떠오른다. 구수하면서도 꼬릿한 강된장에 떠 있는 하얀 두부와 연초록의 호박을 먼저 떠서 밥그릇에 얹어 놓는다. 침이 절로 흘러나오게 알맞게 익은 열무김치는 맵겠다 싶을 만큼 빨갛지도 않고 반쪽 갈라진 열무의 속처럼 하얗지도 않게 적당히 붉어서 식욕을 더욱 돋운다. 붉은 빛깔 양념 사이로 새파랗게 보이는 열무김치와 무생채 등 나물 몇 가지를 넣고 찰진 고추장을 푹 떠 넣어 슥슥 비비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한 끼를 맛볼 수 있었다. 보리밥집은 뭐니뭐니 해도 숭늉 냄새가 압권이었다. 하얀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검은 솥뚜껑과 단내 베어 있는 구수한 숭늉의 냄새는 내 기억 속에서는 뗄 수 없는 단짝이다.

 

냄새와 결합된 기억은 뇌 속에 저장된 그 어떤 자질구레한 이미지들보다 더 찰떡같이 들어붙어서 오래오래 재생된다.

그뿐인가. 불러내고 싶지 않은 때라도 냄새가 먼저 기억을 깨우는 희한한 구조로 얽혀 있다.

 

나는, 너무나 촌스럽고도 뻔하게 시골 장터의 무쇠솥뚜껑과 숭늉 냄새, 그리고 보리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필립 클로델은 냄새와 추억에 대한 기억을 화려하게 전개시킨다.

 

몇 페이지 읽고서 밑줄, 또 몇 페이지 못 지나 밑줄...

숫제 책에 밑줄 그어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향기]책이 연필의 검은 색 흑연으로 뒤덮일 판이다.

 

나는 1915년에 마지막으로 썼던 침실들에 올라간다. 장롱을 열고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중산모자와 온통 하얀 옷, 가는 대나무 막대, 말린 꽃다발, 컬러 사진들을 꺼낸다. 고인들의 이 생활박물관은 마치 글자 없는 책 같아 보인다. -50,<지하실>

 

트루아비에르주 길을 산책하다 보면, 노트라담드피티에 소성당에 도착해 밤나무 그늘과 샘의 꾸르륵 소리를 느끼기 직전에 빵 굽는 냄새, 그 뜨끈한 빵 냄새가 나는, 짚 그루터기가 남은 밭을 따라가게 된다.

(...)

행복해진 나는 우리 집을 향해, 카페오레와 버터와 딸기잼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내 웃옷 아래 태양의 조각이 미끄러져 들어온 것만 같은 달콤한 열기를 느끼면서.-67,<짚>

 

가만히 눈을 감고 냄새에 집중한다.

내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 있는 냄새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며칠 동안 이 놀이만 하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불러올 수 있는 것이 음식에 국한되어 있지만 좀 더 캐내 보면 내가 입던 옷, 혹은 살던 집, 키우던 고양이와 개 등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로 되살려내진 못하더라도 내 삶을 채우고 있었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되살리는 작업은 흥미로울 것 같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허무는 냄새, 향기의 힘.

지금 이 순간, 세세하게 묘사해낼 글재주가 모자라다는 것이...너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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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8
도쿠나가 케이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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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

 

 

낮에는 콜센터 직원으로, 밤에는 만화가로 살아가는 이중생활 소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너의 매혹적인 등골 라인이 나를 미치게 한다고’ 같은 고민을 특대 사이즈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미소년을 그리며 웃음을 실실 흘리는 아야카. 본인이 그린 만화의 세계에 푹 빠진 모습이 가관이다.

잉크로 더러워진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붙어 앉아 망상에 취해 사는 그녀는, 흔히들 말하는 ‘건어물녀’ 축에 들까.

이런 그녀의 일상에 로맨틱한 일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만화 잡지에 벌써 열세번째 작품을 투고하지만 여전히 B급에 머물고 있는 아야카. 앞날이 창창한 만화가라고 할 수도 없이 어느덧 나이는 25살이나 먹어버렸다.

 

그런 그녀, 만화가를 꿈꾸는 소녀 같은 주인공의 일상이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낮동안 일하는 콜센터의 센터장이 아픈 동안 대행할 사람이 나타났는데, 여자들 뿐인 이 센터에 낯선 남자의 등장이라니, 이건 순정만화의 세계에서 꽃미남이 나타난 것 같은 효과와 거의 맞먹는다.

센터장의 등장은 센터내 여직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아야카에게 있어서는 시한폭탄의 등장이기도 했다.

 

연애가 주제인 순정만화를 그리는 작가로서의 자긍심이 좀 약한 편인 아야카는 자신의 이런저런 연애에 대한 이상을 생생하게 반영한 원고가 타인의 눈에 띄는 것을 극히 꺼렸다. 말하자면 남자가 성인비디오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라며...

바로 그런 소극적인 아야카가 소중한 원고를 안고 가다가 아침 출근길에 편의점 길모퉁이에서 센터장 대행과 부딪친 순간, 펄럭펄럭 원고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던 것이다.

평소 그녀의 마음가짐이라면...

 

소녀의 마음이랄까. ‘<별책 소녀스피어>편집부 <월간 만화스쿨> 귀하’라고 적힌 봉투를 회사 사람들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니, 죽을 수밖에. -30

 

큭큭. 죽고 싶단 생각을 할 정도로 질색을 했던 바로 그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아야카의 속이 오죽 까맣게 탔을까.

하지만 바로 이런 순간이 독자들이 기다리는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이 아닐까.

부끄러운 마음에 열기가 뻗쳐 얼굴이 홍당무가 된 아야카와, 만사 태평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느긋한 직장 상사 사이에 살랑살랑 이는 이 가벼운 바람은 남은 책의 페이지를 핑크빛으로 온통 물들여 버린다.

 

콜센터 내에서 은근 무시무시한 세력을 가진 다치바나 여사가 센터장 대행에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 아야카와 단짝인 히로미(갸루상 같은 화장을 즐긴다고 한다.)에게 특명을 내린다. 기무라 센터장을 미행하라!

 

두근두근, 스파이의 밀명을 띄고 기무라를 관찰하던 아야카는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기무라의 BMW를 함께 타고 가게 된다.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뜨리려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만 그녀의 요즘 속내를 토로해내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아야카, 센터장의 과거 경력을 질문했는데 뜻밖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스파이.”였다.

“...저기, 안 믿겨?”

“당연하죠.”

 

말을 꺼내지 않고 사람의 몸에 밴 습성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정보를 알아내는 기무라 센터장. “팬티 입을 때 오른발부터 넣지?”라는 말로 자신이 스파이임을 확신하게 만들려는 그가 왠지 귀여운 개구쟁이 같다.

기무라 센터장에게 끌리는 마음과는 별도로 스파이라는 직업에 반짝 필을 받은 아야카는 순정만화의 스토리를 떠올린다. 빨리 책상에 앉고 싶다. 이 손에 종이를! 연필을!

이야기가 손 안에 있는 동안에 완성해가는 모습이 진지한 만화가답다.

 

둘 사이의 연애가 제대로 꽃피우기도 전에 기무라가 진짜 스파이처럼 산뜻하게,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 못내 아쉽지만 아야카는 만화가에 대한 꿈으로 고민하던 일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다.

보너스로 이어지는 순정만화의 시나리오도 귀여운 그림체의 만화가 떠오를 만큼 재미있다.

“스파이를 사랑하는 이야기...”

 

스물 다섯과 마흔 여섯의 연애 이야기라면 약간 억지스러울까? 내 이야기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둘의 러브라인이 살짝 도화선에 불만 붙었다가 츳츠츠...하고 불이 사그라들어 버려 좀 아쉽긴 하다.

아마도 색다른 캐릭터에 중점을 두느라 약해진 건가 보다.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 어쨌든 나이에 맞추다 보면 둘은 연애 관계 보다는 직장 상사와 직원 정도의 관계가 더 어울린다.

이십대의 중반. 앞으로 이어나갈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이 울렁거릴 즈음, 뭔지 모를 미스터리한 매력을 지닌 남자 상사에게 들킨 자신의 부끄러운 꿈을 들켜버렸지만 결국은 그에 대해 응원을 받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인생이란, 하룻밤만 공연되는 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내 철학에 따르면 말이야, 인생은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가 아니야. 즐거워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딱 한 번 뿐이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진검승부를 내야 하는 거지. 게다가 전력을 다하는 데 있어서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고, 그게 제일 중요해.”-101

 

이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가 도쿠나가 케이. 그녀도 아마 기무라 센터장의 조언에서처럼 즐거워하며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아야카의 모습에서는 살짝 진지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유머 첩보 로맨스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걸 보니,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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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 it Rock 1 - 남무성의 만화로 보는 록의 역사, 개정판 Paint it Rock 1
남무성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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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화로 보는 록의 역사 [PAINT IT ROCK]

 

 

 

저자 남무성은 2009년에 초판을 낸 지 5년만에 [Paint it rock]의 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의 각권 커버 주인공은 비틀즈, 데이빗 보위, 커트 코베인이다. 록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대중적인 인기 등을 고려해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

 

애비 로드를 걷고 있는 비틀즈.

애비 로드에 위치한 녹음실은 비틀즈가 1962년 데뷔곡 Love me do부터 대부분의 노래를 녹음했던 아지트였다. 녹음실 앞 횡단보도를 일렬로 건너는 장면을 촬영하는데 단지 덥다는 이유로 폴 매카트니는 샌들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건넜다고 한다. 그래서 팝 역사상 오랫동안 화제가 되었다고.

 

표지에서부터 록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인 비틀즈로 강렬한 인상을 주더니, 이 책, 장난 아니게 진지하기도 하고 날카롭게 푹푹 찔러대는 풍자를 선보이기도 한다.

록의 역사에 문외한인지라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죽 훑어본다는 기분으로 보기 시작했다.

만화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록의 역사를 실은 책이라 당연히 어려운 용어가 난무하겠지, 모르는 뮤지션들이 대거 등장하겠지, 대충 마음의 준비는 하고 들어갔는데, 괜한 사전무장이었던 듯.

만화의 형식으로도 충분히 록의 역사는 설명되고 있고, 아티스트들의 개성은 더욱 확실히 살아난다.

특히나 실사 사진으로 접했더라면, 헉~ 하고 까무러칠 정도의 수위 높은 사진들이 몇 장 있지만(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나체사진-헉!)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만화의 형식에 묻혀 슬쩍 넘어가 진다.

특히나 뮤지션들의 감성에 빠지지 않는 마약이나 헤로인 같은 어두운 문제들도 적당한 선에서 허용할 수 있는 분위기로 흘려보낼 수 있다.

그러면서 절대 가볍지 않게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해가는 록의 역사에 대해 물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설명해나가는 책의 구성을 볼 때,

록의 역사와 만화라는 궁합은 썩 잘 어울린다.

 

 

 

 

2차 세계 대전 후부터 기술되는 록의 역사. 로큰롤의 용어 설명부터 짚고 넘어가 준다.

글로만 읽었다면 분명 머리아픈 이야기였을 터이지만 에피소드 형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지끈지끈 골머리를 싸맬 필요가 없다.

 

 

록의 역사는 척 베리를 필두로 로큰로의 스타들이 등장하며 밥 딜런과 포크로 이어지다가 혼돈과 저항의 60년대를 맞게 된다.  영국의 로큰롤은 비틀즈라는 거대한 대형스타를 배출하고 비틀즈는 활동기간 중 총 20장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이 가운데 16장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말 그대로 "빌보드 융단폭격"이다. 넘버원 싱글 히트곡도 20곡이나 기록하여 단일 팀 최고 기록으로 이 기록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 후로 히피 무브먼트와 사이키델릭 록이 등장했으며 지미 핸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롤링 스톤스같은 걸출한 스타들도 줄을 잇는다.

록의 역사에서 왜 우스스탁이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가, 궁금했는데, 이런 것은 과연 록의 역사 속에서 조명해야 할 문제인 것을 이제 알 것 같다.

3일 반나절 동안 펼쳐진 우드스탁은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오줌과 진흙탕, 마리화나, 오바이트, 프리섹스, 록 음악이 뒤범벅이 된 거대한 난장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3일간의 평화'라는 구호 아래 무정부 상태의 해방구에서도 얼마든지 평화로운 잔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한 것이라 의미를 부여한다. 월남전 파병으로 시작된 반전운동과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자연 회귀 운동이 결합된 히피 운동이었지만 결국은 우드스탁이 끝남과 동시에 세상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것이었을 뿐. 물론 록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끝없이 무언가를 향해 가는 화살표는 록의 역사가 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낄 때,

한 번쯤 과감하게 혹은 미친 듯이 굉음을 폭발시키는 록의 한가운데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록이란, 저 날카롭게 찔러대는 화살표의 끝처럼 사정없이 무언가를 들이받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심심하거나  축 처진 날,

이유없이 화가 나서 조금만 자극해도 광란에 휩싸여 날뛰고 싶은 날

바짝 날 세운 록의 끄트머리에서 내 자신을 한 번 놓아보고 싶어진다.

그런 날 

어떤 뮤지션을 고를까. 고민하고 있을 때 펼쳐 보면

길잡이 역할을 해 줄 것만 같은 고마운 책.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록 음악이란 단어가 나오면 이제는 낯선 외계어라 쭈뼛거리지 않고 조금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배철수가 그윽한 목소리로  "킹 크림슨의 <Epitaph> 들려드리겠습니다"라 소개하는 멘트를 들을 때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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