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의 은밀한 업무일지]
낮에는 콜센터 직원으로, 밤에는 만화가로 살아가는 이중생활 소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너의 매혹적인 등골 라인이 나를 미치게 한다고’ 같은 고민을 특대 사이즈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미소년을 그리며 웃음을 실실 흘리는 아야카. 본인이 그린 만화의 세계에 푹 빠진 모습이 가관이다.
잉크로 더러워진 추리닝을 입고, 책상에 붙어 앉아 망상에 취해 사는 그녀는, 흔히들 말하는 ‘건어물녀’
축에 들까.
이런 그녀의 일상에 로맨틱한 일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만화 잡지에 벌써 열세번째 작품을 투고하지만 여전히 B급에 머물고 있는 아야카. 앞날이 창창한
만화가라고 할 수도 없이 어느덧 나이는 25살이나 먹어버렸다.
그런 그녀, 만화가를 꿈꾸는 소녀 같은 주인공의 일상이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낮동안 일하는 콜센터의 센터장이 아픈 동안 대행할 사람이 나타났는데, 여자들 뿐인 이 센터에 낯선
남자의 등장이라니, 이건 순정만화의 세계에서 꽃미남이 나타난 것 같은 효과와 거의 맞먹는다.
센터장의 등장은 센터내 여직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아야카에게 있어서는 시한폭탄의 등장이기도
했다.
연애가 주제인 순정만화를 그리는 작가로서의 자긍심이 좀 약한 편인 아야카는 자신의 이런저런 연애에 대한
이상을 생생하게 반영한 원고가 타인의 눈에 띄는 것을 극히 꺼렸다. 말하자면 남자가 성인비디오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라며...
바로 그런 소극적인 아야카가 소중한 원고를 안고 가다가 아침 출근길에 편의점 길모퉁이에서 센터장 대행과
부딪친 순간, 펄럭펄럭 원고가 날아다니는 모습이 순정만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던 것이다.
평소 그녀의 마음가짐이라면...
소녀의 마음이랄까. ‘<별책 소녀스피어>편집부 <월간 만화스쿨> 귀하’라고 적힌
봉투를 회사 사람들이 본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아니, 죽을 수밖에. -30
큭큭. 죽고 싶단 생각을 할 정도로 질색을 했던 바로 그 일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아야카의 속이 오죽
까맣게 탔을까.
하지만 바로 이런 순간이 독자들이 기다리는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이 아닐까.
부끄러운 마음에 열기가 뻗쳐 얼굴이 홍당무가 된 아야카와, 만사 태평 ,아무 것도 모르는 듯 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느긋한 직장 상사 사이에 살랑살랑 이는 이 가벼운 바람은 남은 책의 페이지를 핑크빛으로 온통 물들여 버린다.
콜센터 내에서 은근 무시무시한 세력을 가진 다치바나 여사가 센터장 대행에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내기
위해 아야카와 단짝인 히로미(갸루상 같은 화장을 즐긴다고 한다.)에게 특명을 내린다. 기무라 센터장을 미행하라!
두근두근, 스파이의 밀명을 띄고 기무라를 관찰하던 아야카는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기무라의 BMW를 함께
타고 가게 된다. 어색한 공기를 누그러뜨리려 대화를 한다는 것이, 그만 그녀의 요즘 속내를 토로해내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털어놓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아야카, 센터장의 과거 경력을 질문했는데 뜻밖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스파이.”였다.
“...저기, 안 믿겨?”
“당연하죠.”
말을 꺼내지 않고 사람의 몸에 밴 습성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다양한 정보를 알아내는 기무라 센터장.
“팬티 입을 때 오른발부터 넣지?”라는 말로 자신이 스파이임을 확신하게 만들려는 그가 왠지 귀여운 개구쟁이 같다.
기무라 센터장에게 끌리는 마음과는 별도로 스파이라는 직업에 반짝 필을 받은 아야카는 순정만화의 스토리를
떠올린다. 빨리 책상에 앉고 싶다. 이 손에 종이를! 연필을!
이야기가 손 안에 있는 동안에 완성해가는 모습이 진지한 만화가답다.
둘 사이의 연애가 제대로 꽃피우기도 전에 기무라가 진짜 스파이처럼 산뜻하게,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 못내
아쉽지만 아야카는 만화가에 대한 꿈으로 고민하던 일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 같다.
보너스로 이어지는 순정만화의 시나리오도 귀여운 그림체의 만화가 떠오를 만큼 재미있다.
“스파이를 사랑하는 이야기...”
스물 다섯과 마흔 여섯의 연애 이야기라면 약간 억지스러울까? 내 이야기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열린
마음으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둘의 러브라인이 살짝 도화선에 불만 붙었다가 츳츠츠...하고 불이 사그라들어 버려 좀 아쉽긴 하다.
아마도 색다른 캐릭터에 중점을 두느라 약해진 건가 보다.
이중생활 소녀와 생활밀착형 스파이. 어쨌든 나이에 맞추다 보면 둘은 연애 관계 보다는 직장 상사와 직원
정도의 관계가 더 어울린다.
이십대의 중반. 앞으로 이어나갈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이 울렁거릴 즈음, 뭔지 모를
미스터리한 매력을 지닌 남자 상사에게 들킨 자신의 부끄러운 꿈을 들켜버렸지만 결국은 그에 대해 응원을 받게 되어버렸다.
“.........사람의 인생이란, 하룻밤만 공연되는 쇼 같은 거라고
생각해.”
“내 철학에 따르면 말이야, 인생은 즐겁거나 즐겁지 않거나가 아니야. 즐거워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지. 딱
한 번 뿐이니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아깝잖아?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진검승부를 내야 하는 거지. 게다가 전력을
다하는 데 있어서는 본인이 즐거워야 하고, 그게 제일 중요해.”-101
이것만으로도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 작가 도쿠나가 케이. 그녀도 아마 기무라 센터장의 조언에서처럼
즐거워하며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 같다.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아야카의 모습에서는 살짝 진지해지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유머 첩보 로맨스에 걸맞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걸 보니, 다음 작품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