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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필립 클로델 지음, 심하은 옮김 / 샘터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허무는 향기의 힘 [향기]
“향기”
하면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르누이가
만들어낸 향수를 맡은 발디니.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들이 떠올랐다. 나폴리의 어느 정원, 저녁노을 속을 거니는 젊은 시절의 자신이 보인다. 검은 곱슬머리 여인의 품에
안겨 누워 있는 모습도 보인다. 창문 위로 장미덩굴이 뻗어 있고 그 위로 밤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오고,
멀리 어느 항구의 선술집에서는 음악이 흘러 나온다. 속삭이는 소리와 사랑의 고백이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듯하고 황홀한 전율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 생생하다. -132
후각은
이토록 사람의 기억을 자극한다. 향기만으로도 하나의 완전한 세상, 풍요로운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은
[향수]이외에는 없을 줄 알았는데, 필립 클로델의 산문집 [향기]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아니 [향수]와는 또다른 매력의 세계로 안내한다.
‘영혼이
향기로웠던 날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으로 안내하는 마법’ 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다.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향기와 관련된 기억이란 기껏해야 음식 몇 가지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정도이리라.
장터
한가운데 좌판을 벌인 먹자골목에 보리밥집이 있었다.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올라오는데 뚜껑을 열면 아예 한동안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이 김
뒤로 사라진다. 아주머니가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밥 한 술 휙 떠서 그릇에 척 하고 담아 주시면 고슬고슬하면서도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쌀밥 반,
보리밥 반의 밥에 얼굴을 척 묻는다. 흐뭇한 미소는 뭘, 맛을 알까 싶은 9살 꼬마의 얼굴에도 떠오른다. 구수하면서도 꼬릿한 강된장에 떠 있는
하얀 두부와 연초록의 호박을 먼저 떠서 밥그릇에 얹어 놓는다. 침이 절로 흘러나오게 알맞게 익은 열무김치는 맵겠다 싶을 만큼 빨갛지도 않고 반쪽
갈라진 열무의 속처럼 하얗지도 않게 적당히 붉어서 식욕을 더욱 돋운다. 붉은 빛깔 양념 사이로 새파랗게 보이는 열무김치와 무생채 등 나물 몇
가지를 넣고 찰진 고추장을 푹 떠 넣어 슥슥 비비면 세상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한 끼를 맛볼 수 있었다. 보리밥집은 뭐니뭐니 해도 숭늉 냄새가
압권이었다. 하얀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검은 솥뚜껑과 단내 베어 있는 구수한 숭늉의 냄새는 내 기억 속에서는 뗄 수 없는 단짝이다.
냄새와
결합된 기억은 뇌 속에 저장된 그 어떤 자질구레한 이미지들보다 더 찰떡같이 들어붙어서 오래오래 재생된다.
그뿐인가.
불러내고 싶지 않은 때라도 냄새가 먼저 기억을 깨우는 희한한 구조로 얽혀 있다.
나는,
너무나 촌스럽고도 뻔하게 시골 장터의 무쇠솥뚜껑과 숭늉 냄새, 그리고 보리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지만, 언어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필립
클로델은 냄새와 추억에 대한 기억을 화려하게 전개시킨다.
몇
페이지 읽고서 밑줄, 또 몇 페이지 못 지나 밑줄...
숫제
책에 밑줄 그어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향기]책이
연필의 검은 색 흑연으로 뒤덮일 판이다.
나는
1915년에 마지막으로 썼던 침실들에 올라간다. 장롱을 열고 나프탈렌 냄새가 나는 중산모자와 온통 하얀 옷, 가는 대나무 막대, 말린 꽃다발,
컬러 사진들을 꺼낸다. 고인들의 이 생활박물관은 마치 글자 없는 책 같아 보인다. -50,<지하실>
트루아비에르주
길을 산책하다 보면, 노트라담드피티에 소성당에 도착해 밤나무 그늘과 샘의 꾸르륵 소리를 느끼기 직전에 빵 굽는 냄새, 그 뜨끈한 빵 냄새가
나는, 짚 그루터기가 남은 밭을 따라가게 된다.
(...)
행복해진
나는 우리 집을 향해, 카페오레와 버터와 딸기잼을 향해 페달을 밟는다. 내 웃옷 아래 태양의 조각이 미끄러져 들어온 것만 같은 달콤한 열기를
느끼면서.-67,<짚>
가만히
눈을 감고 냄새에 집중한다.
내
기억 속에서 불러올 수 있는 냄새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
며칠
동안 이 놀이만 하고 있어도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불러올 수 있는 것이 음식에 국한되어 있지만 좀 더 캐내 보면 내가 입던 옷, 혹은 살던 집, 키우던 고양이와 개 등으로 확장시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로 되살려내진 못하더라도 내 삶을 채우고 있었던 아름다운 기억들을 되살리는 작업은 흥미로울 것 같다.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허무는 냄새, 향기의 힘.
지금
이 순간, 세세하게 묘사해낼 글재주가 모자라다는 것이...너무나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