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그리고 짓 [섬, 짓하다]
섬,짓하다라고 쓰여 있지만 섬찟하다로 읽게 된다.
다시 한 번 쉼표를 따라 쉬어 읽어도 섬찟하다로 발음된다.
제목 그대로 내용은 섬찟하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의 경계가 명확히 정해지고 그것이 지켜지는 사회가 안전한 사회이고 사람들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다.
평범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가 고맙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그저 오늘 알람에 맞춰 제대로 일어나 새로이 시작하는
하루가 주어지는 것이 그렇게 고맙고 소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회에서 천하태평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이 그야말로 행운이 아니었나, 생각할 정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인터넷 상에서는 일베같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옆집에서는 조용히 사람이 죽어나가며
과거의 상처를 지금까지 간직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벼리는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으니 이 세상은 그렇게 안전한 곳만은 아닌가 보았다.
세상 모르고 새근새근 잠자는 아기 곁을 지키던 아기 엄마가 맑고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라고 가습기를 틀어주었는데, 아기는 가습기 살균제로
나날이 폐가 망가져 가고 있었다...(가금 생각해보면 진짜 미스터리보다 더 머리털이 곤두서는 사건이다!)
이런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사회이고 보니, 소설 속 어떤 일도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라며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어버렸다.
김재희 작가는 주로 역사 미스터리를 써오다가 이번에 현대적인 분위기로 색다른 시도를 했다고 한다.
읽어보진 못했지만 [경성 탐정 이상]이 낯이 익는다.
[섬, 짓하다]는 프로파일러라는 이색적인 인물이 주인공이며 이 책은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라고 한다.
경찰이 되고 싶어 경찰이 된 것은 아니지만 김성호는 심리학 석사 학위를 따고 경장으로 특채되어 프로파일러로 활동하게 되었다. 경찰청에서는
한국형 범죄분석시스템의 토대를 만들자는 취지로 프로파일러들을 특채했지만 절반 이상은 경찰직을 포기했다. 매일 잔혹한 살인사건의 자료와 사진을
접하는 일은 견디기 어려웠으리라. 미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CSI 등에서 일하는 이들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시체 검시하는 것을 보고, 그게
정상이려니 시청자들은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장면을 보는 이들은 웬만큼 단련되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보고 있기 힘들 것이다. 나도 한 때는 멋있는
직업이라며 경찰인 남편에게 과학수사대에 자원하는 건 어때? 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너 미쳤니?" 와 비슷한 수준의 질타 뿐이었다.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긴, 그렇겠지...
보는 사람이 멋있다며 하트 뿅뿅 하고 보는 것일 뿐, 실제 일하는 사람들은 그게 좋아서 하는 것이겠냐고...
프로파일러 김성호는 하나리라는 여인의 살해 용의자로 한 고등학생 면담을 의뢰받았다. 학생은 주간파 사이트에 글을 올렸을 뿐, 그녀를 죽인
건 아니라고 말했다. 김성호는 그를 용의자에서 배제하고 사이트의 다른 이용자를 용의자로 올리자고 제안한다. 사건에 깊이 개입한 것도 아닌데
인터넷에서 자신의 신상이 털리고 담당형사로부터 곤혹을 치르게 되자 잠시 이 사건에서 물러나 진도 삼보섬 여성 연쇄실종사건에 대한 프로파일을 맡아
출장을 가게 되는 김성호.
하나리 사건에서 갑자기 진도 사건으로 흐름이 바뀌자 '이게 뭔일?' 했지만, 이 설정은 다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니 걱정할 것 없다.
어쨌든, 제목에서 뭔가 으스스한 것을 암시한 바, "섬"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삼보섬에 도착하자마자 국립민속박물관 소속 여도윤이란 사람과 동행하게 되는데 그는 실종사건에 도움을 줄 필적감정서를 의뢰받은 교수의
대타였다. 사건의 프로파일을 하는 것과 별개로 여도윤은 이상하게 성호의 과거를 건드리는 질문을 자주 한다. 성호의 약점이 바로 과거의 어느
시점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다만 그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고양이의 죽음, 잔인한 홍태기, 불쌍한 한남기 그리고 안타까움이란 단어 정도이다.
무당의 굿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는 응어리를 끄집어내는 일종의 주술적인 퍼포먼스이다 보니, 실종자의 혼을 달래기 위한
씻김굿 현장에서 김성호는 자신을 향해 일갈을 날리는 무당의 기세에 뭔가 움찔하고 만다. 아니, 아연실색했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연출하지 않고서야 애써 가둬온 기억이 날뛸 리가 없는데.
과거 기억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여도윤은 더이상 여도윤이 아닌, 김성호가 잘 알던 사람으로 탈바꿈한다.
프로파일러 김성호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이니 만큼 [섬, 짓하다]는 사건의 흐름과 함께 주인공 김성호를 다루는 데 대부분의 내용을
할애한다.
보통의 미스터리에서는 종종 탐정이나 주인공의 약점이나 과거나 캐릭터의 여린 부분으로 작용하며 조금씩 내비치기는 하는데, 김성호는 그 수준을
훨씬 넘어 '이 양반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수위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의 기억 상실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비밀을 감추고 있었는지가 드러나면서 삼보섬에서의 실종사건의 실마리도 서서히 잡혀간다.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쉽게 동화되지 못할 듯 싶은 존재들도 종이 한 장 차이로 우리와 다르다 낙인찍힌 것일 뿐.
그 사실을 깨우쳐주는 이야기가 섬찟하다.
죄의식 없이 인터넷상에서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도 실제상황에선 이마에 아이디를 적어붙이고 다니는 것이 아닌 이상, 구별해낼
길이 없다는 것도 섬찟하다.
죄값을 치러낸 인간은 그나마 양심의 가책을 덜겠지만 차마 죄를 발설하지 못하고 가슴에 쌓아두어야만 하는 사람의 수렁에 빠진 인생 또한
섬찟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섬찟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이 책.
섬을 배경으로 뭔가가 일어난다는 의미에서 "섬, 그리고 짓"으로 읽어도 무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