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북유럽 패턴 일러스트 - 재미있게 따라 그리는
박영미 지음 / 미디어샘 / 201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기자기한 재미[친절한 북유럽 패턴 일러스트]

 

 

 

여러 가지 컬러링 북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알록달록 예쁜 색감을 자랑하는 싸인펜, 색연필, 마카 등으로 색칠을 하며 잃어버린 동심을 찾는다.

하나하나 빈 곳을 메꾸어 가며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힐링이 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엔?
허전한 상태였던 컬러링 북이 나만의 색깔로 물든 다음엔 온전히 내가 만든 한 권의 책으로 남는다.

아~ 하지만 뭔가가 아쉽다.

이 예쁜 그림들을 다른 어떤 곳에 활용할 수 없을까?

바로 그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흔한 컬러링 북과는 조금 카테고리를 달리 한다.

직접 패턴 일러스트를 그리고 색칠하는 것까진 비슷하지만

그 다음, 이것들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어 생활에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내가 그린 일러스트로 능동적으로 뭔가를 만들고 꾸밀 수 있다.

현재 팬시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문구 제품 디자인과 일러스트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박영미는 블로그 "일루미의 해피드로잉"을 운영하며 이웃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나누고 있다고 한다.

동화풍의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들이 이제는 더이상 "남의 떡"이 아닌, 내 것이 될 수 있다.

 

 

 

짜잔~

직접 꾸민 북유럽 패턴 일러스트로 이렇게나 많은 것들을 꾸밀 수 있다.

북유럽은 대부분 삼림과 호수로 이루어져 있다. 겨울이 길고 추워서 실내에 오래 머무르기 때문에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해 왔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감성의 북유럽 디자인을 창조해 보자.

패턴은 다양한 재료들로 그릴 수 있다.

연필, 색연필, 사인펜, 유성펜, 젤잉크펜, 직물펜 등의 재료가 가진 특징을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가렌더, 선물상자, 화장지 상자, 유리병 태그, 컵 받침, 먼슬리 플래너, 벽 달력, 초대장, 에코백 등...

내 손으로 이것들을 다 만들 수 있다니...그저 황홀할 따름이다.

 

 

 

 

 

먼저 따라하기 쉬운 그림부터 연습한다.

단순하고 강결한 그림인데 연달아 이어붙이기 만으로도 패턴이 되고 눈에 띄게 세련된 문양이 나타나니 참으로 신기하다.

 

 

 

요것은 엄마보다 나은 그림 실력을 선보이는 초등 3학년 우리 딸래미가 그린 카드다.

혼자 쓱쓱 만들더니 책상에 얼른 갖다 붙여 놓는다.

 

간단하게 그릴 수 있는 작은 나뭇잎도 어떤 색을 쓰고 어떻게 나열하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느낌의 멋진 패턴으로 탄생하는 것을 경험해 보자.

내 손으로 기적을 만들 수 있다!!

내 손으로 그린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북유럽 패턴!

작은 소품들을 만들며 심심하고 무료한 일상에 작은 포인트 하나를 더해 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10년의 기록 [디 마이너스]

 

손아람. 블랙과 화이트의 깔끔하고 스타일리쉬한 차림으로 무심하게 서 있는 그는 무척 어려보인다.

그런데 1980년생이란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손아람 장편소설 [디 마이너스]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한 남자, 박태의의 눈에 비친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154편의 이야기들은 작은 제목들을 하나씩 달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을 그냥 맨정신에 깔기는 어려우니 담배 하나 빼물고 시작하렵니다, 하고 미리 경고해두려는 듯, 담배 1로 시작한다.

후우 뿜어대는 담배연기 사이로 어떤 단체들의 계보가 이어지는데 거기서 낯익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이름을 발견했다.

한총련.

 

내가 대학교라는 곳에 입학했을 때에도 한총련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라 아무것도 모를 시절.

서울대는 아니지만 지방 국립대 인문학과의 비인기학과에, 점수맞춰 들어간 이 새내기를 그래도 후배라고 챙겨주려는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남녀가 어색하게 모인 자리는 처음이었는데, 선배는 말문을 트는 말로 "담배 좀 피워도 되지?" 하고 물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외모의 선배였다. 왕방울만한 큰 눈에 그윽한 목소리.

눈치도 없고 분위기 파악에 재주도 없는 나는 "안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참, 신기한 놈 다 보겠네, 하는 듯 피식 웃던 선배는 거절의 뜻을 밝힌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 안돼?"

그 뒤에 무슨 문답이 이어졌는지, 어떤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이어졌는지는 이미 기억 속에 매장되어 다시 캐낼 수가 없지만 이상하게 무언가를 주입시키려는 듯한 선배의 말투가 거슬렸던 것만은 분명히 남아 있다. 역시 외모로 남자를 판단하면 안되는구나,,,하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었지.

선배들은 갓 입학한 새내기들의 깡다구를 시험하려는 듯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들만의 "체"를 발동시켜 자신들의 그룹에 합류시킬지 말지를 가늠해보려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어수룩하고 눈치 없는 나는 그들의 선동에 이끌려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

그 자리를 주도했던 선배들은 인문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이었고 신입생들을 인문대 광장 바닥에 쭉 앉혀놓고 "바위처럼","처음처럼" "그날이 오면" 같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바탕 땀방울을 흘려댄 후 그 선배들에게 김밥과 물을 바리바리 싸다 날랐던 여자 선배도 있었다지, 아마. 공인된 캠퍼스 커플이기도 했다고.

애지중지 길러진 귀한 딸도 아니고 금지옥엽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동아리"에 가입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아버지 때문에 "동아리" 가입 조차 원천봉쇄된 상태로 1학년을 학교, 집만 오가야 했던 신세여서 내겐 선배들의 활동에 관심을가질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그 덕에 학생운동, 한총련의 노른자위에 앉은 이들과는 벽 아닌 벽을 쌓은 채 대학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한순간 스쳐가는 영화같은 한 장면.

학교 도서관에서 전공책도 아닌, 김용의 <영웅문>을 빌려 옆구리에 끼고서 집에 가는 길, 교문 앞에선 학생들과 전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차례 최루탄, 화염병이 오갔는지 연기가 자욱했고 코가 간지러워져왔다. 학생들의 무리 가운데 과 선배가 있었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주먹쥔 오른손을 연신 불끈 불끈 쥐며 올렸다 내렸다 했다. '아~ 눈이 마주치면 날 부르는 건 아닐까?' 고개를 푹 숙이며 발걸음을 재게 하고서 얼른 그 자리를 지나가려 했다. 방패를 움켜쥐고 점점 학생들을 향해 다가가는 전경들의 얼굴이 가까이에 보였다. 그들은 아직 파릇파릇했다. 내 또래였다.

 

누군가는 지고지순의 가치를 지닌 이상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대고, 잘못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 따위와는 상관 없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을 따름인데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지라 그저 무심히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때 김용의 <영웅문>을 끼고 집으로 향하던 여학생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이슈에는 무관심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수백 번은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과 맞서 땀방울을 흘리고 최루탄의 연기를 마셨을 수많은 전경 중의 한 명은 나중에 경찰이 되었고 평범한  여학생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는 가끔 저녁에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그 때의 기억을, 쓰라린 무용담을 안주 삼아 질겅거린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최루탄을 던졌으며, 전경들은 도대체 왜 무슨 죄로 그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을까?"

무심한 여학생은 그저 맥주를 마시며 "캬!~" 할 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시대의 아픔을 제대로 느끼고 맞서 싸울 용기가 있었던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가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거니와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그들의 시간을 조명한 이 책에 그 비밀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154편의 이야기들은 사랑과 우정, 폭력과 항거, 고문과 좌절, 배반과 용서 , 거기에 길고양이, 개, 미친 남자를 넘나든다.

1990년대, 대학생으로서 누구보다도 깨어 있어야 했으며 활발하게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해야 했지만 난는 마냥 흐리멍텅하게 흘려보냈던 그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1997년 IMF가 터지고 국가 경제가 말씀이 아니게 되었다.

2000년 대우자동차가  부도를 맞자 2001년 전학협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자택을 검거했지만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촛불 시위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2003년 연대회의, 한총련, 전학협은 미국 대사관으로 합동 진격했다.

2007년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고 그 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일상에 허덕이느라 기억 속에 매몰시켜 둔 10년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역사로 묻어두고 후세에 누군가가 올바른 평가를 내려주겠지, 하며 아주 먼 훗날 꺼내 들여다보려 했던 그 기억들을 손아람은 일찌감치 끄집어낸다.

그저 묻어두기엔 너무 아픈 우리의 자화상 아니냐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1-2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가 로맨스를 뺀 `미술학 개론` 같습니다. ^^

남희돌이 2015-01-26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보다 제 과거 회상이 더 길었던 것 같네요. 이상하게 이 책을 읽는 동안 소싯적(?)이 자꾸 생각나서 말이죠^^
 
스마일, 스미레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샘터사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대의 길을 가라 [스마일, 스미레!]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이 무엇이라 하든 내버려두어라. by 단테

 

사쿠라 스미레.

32세의 싱글녀.

그녀의 이름은 벚꽃과 제비꽃에서 따온 웃기는 이름이 아니라, 영어의 smile을 그대로 읽어서 스미레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녀는 잠들지 않는 대도시 도쿄의 레코드 회사 (주) 스마일뮤직 CEO 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지긴 했지만 직원도 0명이고 스스로 키워낸 뮤지션도 아직 없다. 하지만 애인인 료에게서 배운 로우킥과 멋진 스마일을 가진 여자다.

조만간 라이브 데뷔 무대를 치러낼 팀 DEEP SEA를 위해 종횡무진 뛰어다니느라 애인에게 좀비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전의 라이브 당일 DEEP SEA 멤버들은 지각을 했고 그 틈을 예전 올 업의 멤버였던 하루토의 무대가 메꿔준다.

 

뭐지, 이건...

나는 시각과 청각만 가진 존재가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신비로운 열을 느꼈다. 달콤한 듯 설레는 듯한 기분 좋은 열.

이윽고 그 열이 몸속 전체로 퍼져나갔고, 그와 함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DEEP SEA의 무대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감각과 똑같았다.

서포트 밴드의 연주도 인디치고는 퀄리티가 꽤 높았다. 그 연주에 하루토의 목소리와 독특한 색깔의 멜로디가 엉켜서 내 안의 심금과 부드럽게 공명했다. -78

 

지각한 DEEP SEA 멤버들은 스미레의 탄탄한 서포트에도 불구하고 엉망인 무대를 선보였고, 뒤이어 그들은 그녀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다른 소속사로 옮긴다는 것을 통고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애인 료와의 사이는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해지다가 결국 연락두절로 이어진다.

 

친구의 권유로 고향 시즈오카에 가서 재충전을 하기로 결정한 스미레. 고향에는 간장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종알종알 수다를 떠는 엄마와 말없이 낚시를 즐기는, 그리고 가끔 스미레에게 잠언을 곁들인 메시지를 보내는 아버지는 도시 생활로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는 스미레를 조용히 포용해준다. 지금껏 자기 이름 스미레에 담긴 의미가 살아 남기 위한 미소라 생각했던 그녀는 주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게끔 웃는 딸로 자라주길 바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향에서 쉬고 있는 스미레에게 하루토의 문자가 날아왔다. 데뷔 후 메이저까지 갔다가 실패하고 아내마저 떠나간 하루토와  지금껏 키워왔던 DEEP SEA를 올업 시절 상사에게 빼앗긴 그녀는 의기투합하여 다시 도전해보기로 한다.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남들이 무엇이라 하든 내버려두자. by 사쿠라 스미레다. -153

 

자신의 이름이 간직한 의미대로 누군가의 웃는 얼굴을 위해 스미레는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스마일, 스미레]는 1인 레코드 회사를 세우고 열심히 일하며 수면부족으로 길거리에 기절하듯 쓰러져 잠들고, 남자에게 로우킥을 날릭, 집에 일 때문에 다른 남자가 와 있다는 것을 깜빡한 채 애인을 집으로 보내기도 하는 등, 실수연발의 발랄한 캐릭터가 살아 있는 이야기다.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싱어송라이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코요테 어글리>풍의 씩씩함도 캐릭터와 잘 어우러진다.

 

아마도 멋진 공연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해피엔딩이 될 것이라 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그 뻔한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을 최고의 장면이라 꼽을 수 있게 만드는 특별함.

그런 특별함이 모리사와 아키오의 작품에는 늘 존재한다.

화려한 조명이 있는 무대지만 따스함이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안다고나 할까.

마지막에 휘몰아치는 감동은, 만족할 만한 콘서트를 보고 무대의 여운에 푹 빠진 바로 그 순간을 연상시킨다.

 

진짜 네잎 클로버가 가져다 주는 행운이 아니면 어떠랴.

네 잎으로 갈라진 괭이밥이라도 그것을 보고 새로이 마음가짐을 굳건히 세우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네잎 클로버 이상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씩씩한 스미레를 저도 모르게 응원하느라 꼭 말아 쥔 손이 하얗게 변했다.

이제 힘을 빼고 스미레의 해피 엔딩을 축하해주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고단한 삶에 바치는 황주 한 잔[허삼관 매혈기]

 

 

아주 오래 전, [허삼관 매혈기]가 나왔을 때, 제목이 하도 궁금하여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그리고 "위화"라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 했다.

지금의 우리 세대로서도 가히 짐작할 수 없는 어렵고 고단한 세월을 건너온 아버지 세대를 핍진하게 그려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 담담함이라니...

그 때는 아직 나의 아버지도 그렇게 늙지 않았고 당당함이 남아 있어서 허삼관과 나의 아버지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지 못했다.

매혈이라는 독특한 행위에 정신이 팔려, 중국의 그 시절, 문화대혁명 전후의 시골 사람이 격동의 세월을 버티는 과정에만 신경 써서 읽은 탓이다.

이번에 하정우가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로 만든 것을 계기로 다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받는 위화의 책 [허삼관 매혈기]를 다시 읽으니 "아버지"의 모습이 다시금 커다랗게 다가온다.

 

시골 사람들은 반 년 동안 땅을 파도 피 한 번 판 정도의 돈벌이도 하지 못하는데, 배불리 물을 마시고 오줌을 참는 수고로움을 참고 혈두에게 작은 선물을 안겨 주면 마르지 않는 샘에서 물을 퍼내듯, 별 티도 나지 않는 피 한 번 뽑는 셈치고 꽤 수월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매혈"

허삼관은 방씨와 근룡이를 동지 삼아 처음으로 매혈을 하고 돈 삼십 오원을 두둑이 받아들자, 성안에서 예쁘기로 이름난 처녀  허옥란에게 청혼을 한다. 허옥란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하소용이라는 남자가 있었지만 특유의 친화력이랄지, 뻔뻔함으로 옥란의 아버지로부터 결혼약속을 받아내고 옥란과 가정을 꾸린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 그렇게 아들 삼형제를 낳고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을 하던 중,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허삼관의 집안에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일락이가 허삼관을 닮지 않고 하소용을 닮았다는 것.

남의 자식을 지금껏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했다는 사실보다, 남들로부터 자라 대가리라 불리는 것을 더 견딜 수 없어하는 허삼관. 일이 안되려고 그랬는지 바로 그 시점에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 아들의 머리를 깨놓는 사고를 치자 허삼관은 내 아들도 아닌데, 내가 왜 병원비를 내야 하냐며 큰소리를 친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온 동네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물어다 나르기에 바쁘다. 허삼관은 과연 일락이를 내칠 것인가.

온동네 사람 아주 들으라고 작정한 듯이 허삼관은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하고 허옥란은 하룻밤의 잘못인데 어쩌란 말이냐며 주고받는 꼴이 한편의 코미디가 따로 없다.

요즘 같으면 아이들의 정신적 피해를 염려하며 이런 일은 쉬쉬하기 마련일 텐데, 오히려 대놓고 소리치고 온동네의 관심의 대상이 되자 아이들, 특히 일락이는 허삼관이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에 망연자실 할 새도 없다. 그저 아이답게 허삼관이 가족 외식에 자기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것에 못내 서운해 할 뿐. 막장으로 치달을 것만 같은 이 한 편의 드라마는 가슴 찡하게 마무리된다.

허삼관은 아버지라는 이름, 그 하나만으로 매혈의 무게를 감당하며 매혈 후에 으레 형식처럼 치르곤 하는 주문을 외친다.

"여기 돼지간볶음 한 접시하고 황주 두냥. 황주는 따뜻하게 데워서 말이야."

 

생의 고갯길을 넘는 어느 한 순간도 순탄치 않은 허삼관네는 그러나 깨지고 나동그라지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더욱 단단해진 결속력을 보여준다.

남의 자식을 낳은 아내에 대한 정은 한 번 삐끗한 사건 이후로 더욱 끈끈해졌으며 남의 핏줄인 일락이에 대한 애정 또한 깊어져 간다.

조상에게 물려 받은 거라 몸뚱이는 팔아도 피는 절대로 팔아서는 안 된다는 관념이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시골 사람이기에 아내와 자식을 위해 피를 파는 허삼관의 행위는 더더욱 절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너무 자주 피를 팔아 쇼크가 오는 상황에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허삼관의 모습은 우리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처음 [허삼관 매혈기]를 읽었을 때는, 감히 이어붙일 생각도 못했던 내 아버지와의 공통점이 이제는 뚜렷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버지와 딸 사이는 어찌하여 이다지도 멀기만 한지.

내 자식을 낳아 키워 보면 부모의 수고로움을 알게 된다, 는 그 흔한 말 그대로 이제야 겨우 아버지의 그늘이 깊었음을 깨달았지만 "고생하셨어요." 그 한 마디 말이 건네지기는 왜 그리도 힘든지.
이제 늙어 더 이상 피를 팔 수 없음을 알고 슬퍼하는 허삼관의 마음을 위로해 줄 이는 허옥란 뿐이다.

자식들이 무슨 소용이냐며 독설을 퍼붓는 허옥란 만이 허삼관의 허허로운 마음을 보듬어 줄 수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만 늘어놓는 허옥란이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 양심은 개한테 갖다 줬냐? 아버지를 그렇게 말하다니. 너희 아버지는 피 팔아 번 돈을 전부 너희를 위해서 썼는데. 너희 삼형제는 아버지가 피를 팔아 키웠다 이 말이다. "-328 

 

인정사정 없이 퍼부어대는 허옥란의 험악한 말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내게로 쏟아지는 말인 듯 그저 묵묵히 받아 들이고 있을 뿐이지만 오히려 속이 시원해진다.

그래,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의 그 고단함을 다 이해하고 받아주느냐 말이다.

그저, 그 고단한 삶에 황주 두어 잔을 따라드릴 수 있을 뿐.

 

[한우리 북카페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된 서평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
서준환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작지만 커다란 존재감을 선사하는 책이다.

손 안에 꼭 들어오는 작고 가벼운 책인데 단편 두 개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인데 선뜻 외계인을 불러 낸다.

외계인과의 조우는 이제 좀 식상하지 않나?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인해 외계인이라는 낯선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어왔지만 이제 더 이상 독특한 외계인의 묘사는 불가능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외계인"의 이미지는 자주 출현하지 않았나.

낯설지 않은 설렘을 안고 책을 펼쳤다.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

나란 존재의 평범함이 못내 지겨울 때.

현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버거울 때.

 

지누션의 노래 A-Yo 리듬과 가락에 맞춰 딱딱 불러제낄 수 있는 저런 지리멸렬한 어구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이 자연스럽게 쏟아질 만큼 나는  평범하고 예측가능한 사람이다.

톡톡 튀거나 발랄하거나 참을 수 없는 상큼함 같은 것은 가지지 못한.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이 아득히 사라지고 펑, 또는 촤악.

어딘가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것(이든 사람이든)으로 변신하여 다시 시작하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런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하여 책을 읽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또한 평범한 남자다. 회사 일 때문에 지방 출장을 끝내고 올라가는 길이긴 하지만 바로 회사에 가서 야근해야 할지도 , 혹은 밤을 꼬박 새야 할지도 모르는 남자.

예리한 3중 면도날로 속시원하게 까끌까끌한 턱밑을 면도하고 싶지만 긴장했을 때 만진 턱은 여전히 까끌까끌한 채인 한 남자.

승용차로 서울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남자는 낯선 길 위에서 코발트색 형광 불빛을 만난다.

그것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람의 형상을 갖춰나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그를 따라가게 된 남자는 유에프오, 그리고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들과 조우한다.

외계인을 만난 후 다시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온 한 남자는 점점 모든 것으로부터 손을 떼기 시작한다.

먼저 회사일을 놓고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놓았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서는 "감정"이 빠져나간다. 괴롭거나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고 혼자가 되었을 때도 우울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공원에 줄넘기를 하러 나간 남자 곁에는 구구구 하고 몰려다니며 먹이를 쪼는 비둘기같은 인간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남자는 줄넘기와 휘파람 속에다 그만 자신을 놓아버린다.

 

감정을 잃고 기계적인 움직임 속에 매몰된 그는 흐물흐물한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뻥" 같은 환상인지 애매하게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사실은 지구가 아니라 휘파람별이면 어떡하지?

힘든 현실을 벗어나고자,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고자 무언가를 찾는데 그만 덜컥, 지금보다 더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어떡하지? 란,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덮쳐왔다.

 

아.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소박한(?) 바람은 잠시 접어두어야겠구나.

퍼뜩, 이야기 속 주인공이 까끌까끌한 턱밑을 쓰다듬으며 감각을 느끼던 때처럼 건조한 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현실의 느낌을 되살려본다.

여기가 휘파람별이 아니길...

거실에 놓인 난 화분들, 게으른 주부의 일상을 증명하듯 설거짓거리가 쌓여있는 씽크대, 누군가 휙 벗어던진 양말 한 짝 등.

생활의 흔적이 허연 머리비듬처럼 우수수 떨어져 있는 내 집 안, 나만의 공간을 휘적휘적 눈으로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서는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을 만날 일은 없겠지...

누군가 나를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앞으로 이끌어 줄 일도 없겠지.

혹시 길에서 누군가 길을 알려 달라며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면, 일단 경계하시길.

 

두 번째 이야기인 <마녀의 피>는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보다 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기 힘들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한 부부가 있다.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그들의 행동 안에 우리 본성인 듯 싶은 사디즘, 마조히즘적 경향이 다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숨겨져 있던,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은밀한 욕구가 어두운 밤이 아닌, 대낮에 그것도 평범한 아파트 안에서 펼쳐진다. 특이한 것은 이들의 앞에 검은색 안경을 쓴 맹인 소녀가 나타났다는 것.

소녀와 부부는 휙휙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컷들 속에서 각각 번갈아 가며 주인공의 역할을  해낸다.

노란색 원피스 가운 차림의 아내와 조간신문을 읽으며 일상의 일로 대화를 나누는 남편은 누가 봐도 평범한데, 이야기가 진척될수록 묘한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세일러복과 루즈삭스, 머리 양쪽에 툭 튀어나온 나사를 수시로 조여대는 프랑켄슈타인, 육중한 철문과 채찍 등을 배경으로 하고 막대사탕을 물고 서성거리는 바비, 호수공원에 나타난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쌍두마차.

어느 누가 봐도 비일상적인 정경이지만 흘깃거리면서도 어느새 눈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그들의 행위에 신경쓰게 된다.

내게 마녀의 피라도 흐르는 걸까?싶게.

 

가벼운 기분으로 가볍게 책을 들어 읽었지만 책을 다 읽고 눈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책 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자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저 책 속의 세계와 확연히 다른 질서정연한 세계에 다시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커야 정상일 텐데.

뭔가 나를 당기는 음습한 세계의 매력에 다시 끌려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영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다시 탁탁,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려보라고.

책 속 이야기는 끝이 났다고. 내 속의 내게 말을 건다.

오우. 깜짝 놀랐다.

저런 세계를 갈망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동요되지 말자.

어쨌든 사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직조할 줄 아는 새로운, 낯선 작가.

서준환을 기억해두어야겠다.

앞으로 다시 찾게 될 날이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