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작지만 커다란 존재감을 선사하는 책이다.
손 안에 꼭 들어오는 작고 가벼운 책인데 단편 두 개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처음 만나는 낯선 작가인데 선뜻 외계인을 불러 낸다.
외계인과의 조우는 이제 좀 식상하지 않나? 나의 빈약한 상상력으로 인해 외계인이라는 낯선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어왔지만 이제 더
이상 독특한 외계인의 묘사는 불가능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외계인"의 이미지는 자주 출현하지 않았나.
낯설지 않은 설렘을 안고 책을 펼쳤다.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일상의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때.
나란 존재의 평범함이 못내 지겨울 때.
현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버거울 때.
지누션의 노래 A-Yo 리듬과 가락에 맞춰 딱딱 불러제낄 수 있는 저런 지리멸렬한 어구들이 정말 어처구니 없이 자연스럽게 쏟아질 만큼 나는
평범하고 예측가능한 사람이다.
톡톡 튀거나 발랄하거나 참을 수 없는 상큼함 같은 것은 가지지 못한.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이 아득히 사라지고 펑, 또는 촤악.
어딘가의 갈라진 틈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으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것(이든 사람이든)으로 변신하여 다시 시작하는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런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하여 책을 읽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또한 평범한 남자다. 회사 일 때문에 지방 출장을 끝내고 올라가는 길이긴 하지만 바로 회사에 가서 야근해야 할지도 ,
혹은 밤을 꼬박 새야 할지도 모르는 남자.
예리한 3중 면도날로 속시원하게 까끌까끌한 턱밑을 면도하고 싶지만 긴장했을 때 만진 턱은 여전히 까끌까끌한 채인 한 남자.
승용차로 서울을 향해 가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남자는 낯선 길 위에서 코발트색 형광 불빛을 만난다.
그것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람의 형상을 갖춰나갔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끌려 그를 따라가게 된 남자는 유에프오, 그리고 파란
비닐인형 외계인들과 조우한다.
외계인을 만난 후 다시 자신이 속한 세계로 돌아온 한 남자는 점점 모든 것으로부터 손을 떼기 시작한다.
먼저 회사일을 놓고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놓았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서는 "감정"이 빠져나간다. 괴롭거나 안타깝거나 슬프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곁에서 떨어져 나가고 혼자가 되었을 때도 우울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공원에 줄넘기를 하러 나간 남자 곁에는 구구구 하고
몰려다니며 먹이를 쪼는 비둘기같은 인간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남자는 줄넘기와 휘파람 속에다 그만 자신을 놓아버린다.
감정을 잃고 기계적인 움직임 속에 매몰된 그는 흐물흐물한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이 되어 버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뻥" 같은 환상인지 애매하게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가 사실은 지구가 아니라 휘파람별이면 어떡하지?
힘든 현실을 벗어나고자, 지리멸렬한 일상을 탈출하고자 무언가를 찾는데 그만 덜컥, 지금보다 더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어떡하지?
란, 밑도 끝도 없는 두려움이 덮쳐왔다.
아.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소박한(?) 바람은 잠시 접어두어야겠구나.
퍼뜩, 이야기 속 주인공이 까끌까끌한 턱밑을 쓰다듬으며 감각을 느끼던 때처럼 건조한 내 얼굴을 쓸어내리며 현실의 느낌을 되살려본다.
여기가 휘파람별이 아니길...
거실에 놓인 난 화분들, 게으른 주부의 일상을 증명하듯 설거짓거리가 쌓여있는 씽크대, 누군가 휙 벗어던진 양말 한 짝 등.
생활의 흔적이 허연 머리비듬처럼 우수수 떨어져 있는 내 집 안, 나만의 공간을 휘적휘적 눈으로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어도 지금 상태에서는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을 만날 일은 없겠지...
누군가 나를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 앞으로 이끌어 줄 일도 없겠지.
혹시 길에서 누군가 길을 알려 달라며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걸면, 일단 경계하시길.
두 번째 이야기인 <마녀의 피>는 <파란 비닐 인형 외계인>보다 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기 힘들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한 부부가 있다. 그렇게 느끼는 까닭은 그들의 행동 안에 우리 본성인 듯 싶은 사디즘,
마조히즘적 경향이 다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숨겨져 있던,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은밀한 욕구가 어두운 밤이 아닌, 대낮에 그것도 평범한 아파트 안에서 펼쳐진다. 특이한 것은
이들의 앞에 검은색 안경을 쓴 맹인 소녀가 나타났다는 것.
소녀와 부부는 휙휙 장면 전환이 이루어지는 영화의 컷들 속에서 각각 번갈아 가며 주인공의 역할을 해낸다.
노란색 원피스 가운 차림의 아내와 조간신문을 읽으며 일상의 일로 대화를 나누는 남편은 누가 봐도 평범한데, 이야기가 진척될수록 묘한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세일러복과 루즈삭스, 머리 양쪽에 툭 튀어나온 나사를 수시로 조여대는 프랑켄슈타인, 육중한 철문과 채찍 등을 배경으로 하고 막대사탕을 물고
서성거리는 바비, 호수공원에 나타난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쌍두마차.
어느 누가 봐도 비일상적인 정경이지만 흘깃거리면서도 어느새 눈이 그들을 따라다니고 그들의 행위에 신경쓰게 된다.
내게 마녀의 피라도 흐르는 걸까?싶게.
가벼운 기분으로 가볍게 책을 들어 읽었지만 책을 다 읽고 눈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책 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자 가슴이 더
두근거렸다.
저 책 속의 세계와 확연히 다른 질서정연한 세계에 다시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커야 정상일 텐데.
뭔가 나를 당기는 음습한 세계의 매력에 다시 끌려들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 영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다시 탁탁,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차려보라고.
책 속 이야기는 끝이 났다고. 내 속의 내게 말을 건다.
오우. 깜짝 놀랐다.
저런 세계를 갈망하는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동요되지 말자.
어쨌든 사람을 뒤흔드는 이야기를 직조할 줄 아는 새로운, 낯선 작가.
서준환을 기억해두어야겠다.
앞으로 다시 찾게 될 날이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