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년의 기록 [디 마이너스]
손아람. 블랙과 화이트의 깔끔하고 스타일리쉬한 차림으로 무심하게 서 있는 그는 무척 어려보인다.
그런데 1980년생이란다.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했다.
손아람 장편소설 [디 마이너스]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한 남자, 박태의의 눈에 비친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154편의 이야기들은 작은 제목들을 하나씩 달고 있는데, 이 이야기들을 그냥 맨정신에 깔기는 어려우니 담배 하나 빼물고 시작하렵니다, 하고
미리 경고해두려는 듯, 담배 1로 시작한다.
후우 뿜어대는 담배연기 사이로 어떤 단체들의 계보가 이어지는데 거기서 낯익지만 결코 반갑지 않은 이름을 발견했다.
한총련.
내가 대학교라는 곳에 입학했을 때에도 한총련이 있었다.
파릇파릇한 새내기라 아무것도 모를 시절.
서울대는 아니지만 지방 국립대 인문학과의 비인기학과에, 점수맞춰 들어간 이 새내기를 그래도 후배라고 챙겨주려는 선배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남녀가 어색하게 모인 자리는 처음이었는데, 선배는 말문을 트는 말로 "담배 좀 피워도 되지?" 하고 물었다. 아, 내가 좋아하는 외모의
선배였다. 왕방울만한 큰 눈에 그윽한 목소리.
눈치도 없고 분위기 파악에 재주도 없는 나는 "안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참, 신기한 놈 다 보겠네, 하는 듯 피식 웃던 선배는 거절의 뜻을 밝힌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왜 안돼?"
그 뒤에 무슨 문답이 이어졌는지, 어떤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이어졌는지는 이미 기억 속에 매장되어 다시 캐낼 수가 없지만 이상하게 무언가를
주입시키려는 듯한 선배의 말투가 거슬렸던 것만은 분명히 남아 있다. 역시 외모로 남자를 판단하면 안되는구나,,,하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었지.
선배들은 갓 입학한 새내기들의 깡다구를 시험하려는 듯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들만의 "체"를 발동시켜 자신들의 그룹에 합류시킬지 말지를 가늠해보려 했던 것 같다.
다행히 어수룩하고 눈치 없는 나는 그들의 선동에 이끌려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
그 자리를 주도했던 선배들은 인문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선배들이었고 신입생들을 인문대 광장 바닥에 쭉 앉혀놓고 "바위처럼","처음처럼"
"그날이 오면" 같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바탕 땀방울을 흘려댄 후 그 선배들에게 김밥과 물을 바리바리 싸다 날랐던 여자 선배도 있었다지, 아마. 공인된 캠퍼스 커플이기도 했다고.
애지중지 길러진 귀한 딸도 아니고 금지옥엽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동아리"에 가입하면 패가망신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아버지 때문에 "동아리" 가입 조차 원천봉쇄된 상태로 1학년을 학교, 집만 오가야 했던 신세여서 내겐 선배들의 활동에 관심을가질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그 덕에 학생운동, 한총련의 노른자위에 앉은 이들과는 벽 아닌 벽을 쌓은 채 대학생활을 끝내게 되었다.
한순간 스쳐가는 영화같은 한 장면.
학교 도서관에서 전공책도 아닌, 김용의 <영웅문>을 빌려 옆구리에 끼고서 집에 가는 길, 교문 앞에선 학생들과 전경이 대치하고
있었다. 한차례 최루탄, 화염병이 오갔는지 연기가 자욱했고 코가 간지러워져왔다. 학생들의 무리 가운데 과 선배가 있었고 목청껏 구호를 외치며
주먹쥔 오른손을 연신 불끈 불끈 쥐며 올렸다 내렸다 했다. '아~ 눈이 마주치면 날 부르는 건 아닐까?' 고개를 푹 숙이며 발걸음을 재게 하고서
얼른 그 자리를 지나가려 했다. 방패를 움켜쥐고 점점 학생들을 향해 다가가는 전경들의 얼굴이 가까이에 보였다. 그들은 아직 파릇파릇했다. 내
또래였다.
누군가는 지고지순의 가치를 지닌 이상을 향해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대고, 잘못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의지 따위와는 상관 없이 나라의 부름을 받았을 따름인데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지라
그저 무심히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때 김용의 <영웅문>을 끼고 집으로 향하던 여학생은 지금도 여전히 사회의 이슈에는 무관심한 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수백 번은 학생운동을 하는 이들과 맞서 땀방울을 흘리고 최루탄의 연기를 마셨을 수많은 전경 중의 한 명은 나중에 경찰이 되었고
평범한 여학생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는 가끔 저녁에 맥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그 때의 기억을, 쓰라린 무용담을 안주 삼아
질겅거린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기를 쓰고 최루탄을 던졌으며, 전경들은 도대체 왜 무슨 죄로 그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을까?"
무심한 여학생은 그저 맥주를 마시며 "캬!~" 할 뿐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시대의 아픔을 제대로 느끼고 맞서 싸울 용기가 있었던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가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거니와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던 그들의 시간을 조명한 이 책에 그 비밀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154편의 이야기들은 사랑과 우정, 폭력과
항거, 고문과 좌절, 배반과 용서 , 거기에 길고양이, 개, 미친 남자를 넘나든다.
1990년대, 대학생으로서 누구보다도 깨어 있어야 했으며 활발하게 사회의 부조리를 인식해야 했지만 난는 마냥 흐리멍텅하게 흘려보냈던 그
시절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1997년 IMF가 터지고 국가 경제가 말씀이 아니게 되었다.
2000년 대우자동차가 부도를 맞자 2001년 전학협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자택을 검거했지만 대우자동차는 엄청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과 촛불 시위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2003년 연대회의, 한총련, 전학협은 미국 대사관으로 합동 진격했다.
2007년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었고 그 해 말,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일상에 허덕이느라 기억 속에 매몰시켜 둔 10년간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역사로 묻어두고 후세에 누군가가 올바른 평가를 내려주겠지, 하며 아주 먼 훗날 꺼내 들여다보려 했던 그 기억들을 손아람은
일찌감치 끄집어낸다.
그저 묻어두기엔 너무 아픈 우리의 자화상 아니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