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를 타는 당신에게 - 마음을 다잡는 특별한 이야기들
서주희 지음 / 샘터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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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는 이들을 열렬히 응원한다 [첫차를 타는 당신에게]

 

'만일 죽음을 면하게 되면 그 후의 시간은 얼마나 무한하게 느껴질 것인가, 그렇게만 된다면 1분의 1초를 정확히 계산해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겠다'

[백치] 속 주인공이 한 말이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기로 확정된 사상범들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처럼 꾸민 다음  자비로운 황제로 행세하기 위해 마지막 5분을 남겨두고 죄수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시나리오를 짰다고 한다. 죄수 중의 한 명이었던 백치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죽기 직전의 순간에 얻은 깨달음을 시베리아 유형 중에 완성한 작품 [백치] 속에다 위와 같이 녹여냈다.

 

절체절명의 순간 쨍, 하고 머리와 가슴을 꿰뚫는 명확한 하나의 명제.

매 순간순간이 소중하다는 것.

그것을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느끼게 된다면 현재의 삶이 그리 고달프다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의 순간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맞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리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민족 최대의 명절 설을 맞이했다.

명절 동안은 가족을 만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고 가족애를 돈독하게 하는 시기이다.

맛난 음식을 먹으며 웃음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모임자리를 기대하며 하나 둘 고향에 모여들지만 이번 명절 이후에 날아드는 소식은 죄다 어두운 것들 뿐이다.

한 건물의 위아래에 살고 있어도 자식은 부모의 고독사를 알아채지 못하고

일가족은 빚에 시달리다 가장의 손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가족간의 불화를 가족 내에서 풀지 못하고 이웃에게 화풀이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간만에 만난 친척들은 서로를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마음 속으로 상처를 입거나 입히기도 한다. 내 일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잔소리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명절이라는 화합의 장이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부간의 갈등은 불거져 나오고 어서 기나긴 명절이 끝났으면 하고 끙끙 앓는다.

 

명절을 쇤 지 얼마 되지 않아 명절 이야기로 잠깐 샜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좋은 것보다 싫고 나쁜 것이 더 많다.

희망을 잡고 싶어하며 발버둥치지만 희망은 쉬이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

누군가 나를 치유해주고 다독여주기만을 바라기보다는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첫차를 타는 당신에게]는 나의 문제를 알아챈 이들이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이 거친 물살을 헤쳐나오고 싶을 때 유용한, 마음을 다잡는 특별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50가지 이야기들은 하나씩 천천히 읽으면 더욱 좋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다고 세상을 다 보지는 못한다. 그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뿐이다'-132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지 않고 칼로 끊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영토는 넓혔지만 끝내 세계 제국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매듭을 제대로 풀어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엉킨 매듭을 푸느라 힘겹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포기하지 말라. 분명 매듭은 조금씩 느슨해질테니까. -엉킨 매듭을 푸는 법 중에서.

 

첫차를 타는 마음으로 오늘을 다시 살고자 노력하는 많은 이들에게 열렬한 응원을 더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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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화 속의 사랑과 성 인간사랑 중국사 4
왕이쟈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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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한 중국의 성담론, 현대문명으로 해석하다 [중국 문화 속의 사랑과 성]

 

과거 중국인들의 성에 대한 의식은 생각보다 담대했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명청 시대 선인들의 필기소설 속 이야기들은 현재의 시각으로 보아도 남녀 공히 화들짝 놀랄 만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문명사회에서 인간은 성을 감추려고 하지만 얼핏 가리워진 커튼 사이로 내비치는 성의 속사정은 충격 그 자체이다.

 

[데카메론]을 본 적이 있는가?

페스트를 피해 모인 열 명의 남녀가 열흘 동안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의 이야기에 특히 성적 에피소드들이 많이 등장한다.

간통, 스와핑 등의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고 신부와 수녀 등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할 인물들의 타락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데카메론은 피렌체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책이었다.

 

이 책 [중국 문화 속의 사랑과 성]에서 소개하고 있는 짤막한 필기소설 156편은 데카메론보다 수위가 한층 위이고 다루고 있는 상황 또한 다채롭기 그지없다.

저자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끌고 와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말 그대로 성에 대한 담론들을 진솔하게 나누려고 하는 것 같다.

가리고 뒤로 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내보이면서 12개의 주제로 이야기들을 구분하고 "이야기 뒤의 이야기"를 침착하게 펼쳐나간다.

음담패설 류의 책인가? 하며 잠시 즐길 요량이라면 이 책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다.

저자는 분명 성에 관한 이야기들 중에서 눈을 반짝 빛내며 주의를 집중할 만큼 색정적인 이야기들을 선별하고 있지만 그것이 결국은 중국인이 '성'이라는 길 위에서 어떤 삶을 겪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모든 인류의 성 발전사는 본능과 문명 사이에서 접전을 벌인 갈등과 충돌, 타협의 역사라고 저자는 말한다.

 

인류 전체에 대하여 말하면, 그들의 성본능, 더 나아가 열한 가지(남성, 여성, 생식, 쾌락, 경쟁, 이익, 건강, 도덕,법률, 권력, 예술) 성의 원색은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화 과정 중 시대와 민족이 달라지면서 오히려 서로 다른 성의식과 성 문명, 성 문화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성에 대한 인류의 이미지는 시대와 민족, 의식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서 인간의 성행위를 구성하는 열한 가지 원색을 안 다음에 엿볼 것은 중국인의 성에 대한 독특한 의식과 성 문화에 따라 만들어지는 에로 이미지의 모습이다. -77

 

방종과 억압, 성별과 권력, 정력제와 방중술, 여성에 대한 육체적, 정신적 착취, 모순과 충돌 속에 이루어지는 타협, 동성애, 변태성욕 등의 이야기에서는 중국인의 사랑과 성을 다루고 있지만 저자는 때로 중국인과 서양인의 사랑과 성을 비교하고 대비시킨다.

인류의 성은 끝없이 해방될 수도  자유로워질 수도 없다는 것을 역사는 말한다.

문화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떠돌아다닐 뿐이다. -485

인류의 성이 어떻게 변화 발전하든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본능과 문명 사이의 시소 게임이다. -492

 

한바탕 화끈하게 중국의 성담론을 펼쳐보인 다음에는 현대문명, 현대인의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역사를 돌아보며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성의 방법'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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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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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에 압도당하다 [달의 뒷면]

 

온다 리쿠의 작품은 오랜만이다. [몽위], [메갈로마니아] 등 최근 작품을 읽었는데도 그 설렘은 항상 처음과 같다.

 

처음의 설렘이란 것은, 온다 리쿠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말한다.

맨 처음 접한 그녀의 작품은 [밤의 피크닉]이었다.

청소년 소설 같은 제목이라서 여러 번 제목만 훑고 그냥 지나갔는데 자꾸 지나다 보니 이미 읽어버린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서 한 번 쓱 뺐다가 끝까지 읽어버린 것이다.

이런 작가는 처음이야, 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유지니아]를 연달아 읽었는데 그건, 표지부터 확 다른 것이, 온다 리쿠라는 작가를 하나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겠구나,란 계시 같은 것을 받았달까.

쿵쿵...거리는 심장은 그 이후 온다 리쿠의 책들을 어서 내놓으라고 다그쳤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 시리즈를 읽어갈 무렵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온다 리쿠의 팬 대열에 저절로 끼어들어 있게 되었다.

뭐랄까, 그녀의 책을 읽을 때는 어렸을 적 만화방에서 소파에 파묻혀 순정만화를 읽던 그 때의 분위기가 새삼 돋아난다고 할까.

특히 온다 리쿠의 분위기는 김영숙의 [갈채]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작품마다 추구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만 왠지 현실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고 강력하게 부정하고 싶어지는 기이한 상황을 언제나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장편 속의 단편이 다른 단편과 이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인물이 다른 책 속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책을 이어 읽기에는 약간의 조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 수고가 전혀 수고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대체로 그녀의 책을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달의 뒷면]

제목부터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이 장편은 물의 도시 "야나쿠라"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은 온 나라가 바다로 둘러 싸여 있지만 이 책에서는  바다가 아닌 수로가 뻗어 있는 도시가 나온다.

전직 교수 교이치로의 부름을 받고 물의 도시 야나쿠라에 도착한 다몬은 역 앞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과 맞닥뜨린다.

 

'그것'을 본 인상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깊고, 짙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걸쭉한 녹색. 지상에 드러나 있는 무기질적이고 지나온 세월이 짧은 콘크리트며 아스팔트에 비해 '그것'은 너무나도 복잡한 유기물 집합체 같았다. -9

 

교이치로는 다몬에게 해괴한 실종 사건을 의뢰한다. 심심하던 차에 수수께끼나 풀까 하는 기분으로 사건에 흥미를 보인 다몬.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세 여자가 실종되었다. 사라졌던 세 사람은 사라졌을 때하고 마찬가지로 어느 날 아침 훌쩍 집으로 돌아온다. 실종된 동안의 기억을 잃은 채로.

이 사건에는 교이치로의 딸 아이코, 지방 신문사 지부장이라는 다카하시가 함께 하게 된다.

교이치로가 해괴한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생 부부 또한 같은 패턴의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카하시로부터 전해 들은 다몬은 이번 일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다.

다카하시가 실종되었다 돌아온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듣던 중 다몬은 이상한 소리를 포착한다.

낮고 단속적인, 문자로 표현하자만 보오, 또는 오오, 하고 뭔가가 울리는 소리.

이 소리가 해괴한 연쇄 실종 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73

하늘로 치솟은 검은 불길 같은 사이프러스로 둘러싸인 집 주인은 인터뷰 내용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어느날 교이치로가 기르던 고양이 하쿠우가 가져온 회색 덩어리를 보고 일행은 경악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손, 귀 등의 섬뜩한 모형.

두 세 시간만 걸으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작은 도시 어딘가에 사람들을 끌고 가는 누군가가 있다.

 범인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그들 옆을 흐르는 수로에 얼굴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데스마스크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둥둥 소리 없이...

 

이런 기묘한 광경을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광경을 떠올려 볼라 치면, 지금은 한겨울의 습기 없는 건조한 날인데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열기와 습기가 가득찬 물의 도시 '야나쿠라'를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고요한 세계, 정지된 듯한 시간.

하루아침에 넷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도둑맞아 버린' 그 시간과 공간을 온다 리쿠는 능청스럽게 재현해 내고 있다.

그 능청스러움에 망연자실한 것도 잠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런 세계가 정말 있단 말인가?

일본인의 구전설화 속에 전해 내려오는 물의 요괴 '갓파'가 정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저런 고요한 세계에 나와 단 몇 명만 남아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도 했다가

마침내 '도둑'의 정체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을 미리 떠올려보기도 하는 등.

그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 다급하게 팔락팔락 몇 개의 필름이 넘겨졌다.

 

물가에 접한 집에서 일어났던 의문의 실종 사건은 기어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덩그러니 남은 네 명은 극한의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차츰 안정을 찾아갔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각자의 "달의 뒷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지구상에 사는 한은 절대 마주할 수 없는 달의 뒷면.

만약 이랬다면, 만약 저랬다면,,,같은 만약의 주문만으로는 절대 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맞닥뜨려 본 이들은 다시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과거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갓파라는 존재에게 쑤욱~ 끌어당겨져서 한바탕 달의 뒷면을 여행하고 온 이들이 보여주는 행적들은 기이하면서도 일상적이다.

크나큰 충격을 받았어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습성은 쉬 없어지지 않나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달의 뒷면을 보지 않은 채 제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인가.

 

온다 리쿠가 창조해내는 환상적인 세계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물의 도시 야나쿠라 이야기는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때론 뜬금없기도 하고 때론 짜릿하지만 환상적인 세계를 실컷 유람한 다음에는 현실의 고마움을 한층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그녀의 마력 속에 빠져들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다음엔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한 다몬의 이야기만을 모아 만든 [불연속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불면의 밤으로 나를 이끌어줄 [불연속 세계]여,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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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2 - 내일을 움직이는 톱니바퀴
다니 미즈에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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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도 고칠 수 있다 [추억의 시간을 수리합니다. 2]

 

낡은 서양식 건물에 자리한 시계 수리 가게. 아니, 시계방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려나.

주인인 슈지가 벽시계의 태엽을 감아주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추억의 시時  수리합니다'

한구석의 간판에 은색 문자로 새겨진 이 말이 긴장된 마음을 무장해제시킨다.

추억이라는 단어 때문일까.

시계방 주인이 태엽을 감으면 저절로 과거로 돌아가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과거의 어느 한 시점을 마주하게 될 것만 같다.

내가 잃어버린 과거의 한 점. 다시 되돌리고 싶어지는 그 시간. 추억을 바꾸어 놓을 만한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늘씬하게 쭉 뻗은 시계방 주인을 보자마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왔던 "바론 남작"이 떠올랐다.

<귀를 기울이면>과 <고양이의 보은>에 나왔던 그 고양이 남작 말이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슬픈 추억을 안고 있던 고양이 인형이 왜 반짝 떠올랐을까.

반듯한 이미지의 슈지가 한 손에 모자를 쥐고 지팡이를 든 채 깍듯한 예의를 차리며 훌륭한 인사를 선보였던 바론 남작과 닮아서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고양이의 슬픈 눈동자가 사람의 마음과 추억의 시간까지도 꿰뚫어보는 슈지와 닮아서인가.

 

생물을 키우듯 매일 시계 태엽을 감아주거나 꼼꼼하게 오래된 기계식 시계들을 관리하는 슈지와 미용실에서 일하는 아카리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다정한 연인이다.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기 어색해하는 아카리를 따뜻하게 보살피고 한 발 앞서 배려해 주는 슈지의 러브라인이 2권에서 서서히 진행된다.

 

아카리의 여동생 카나가 쇠락해진 쓰쿠모 신사 거리를 찾아 온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언니 아카리를 찾아 길을 헤매다 카페에 들른 카나는 웬 기모노를 입은 여자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어지러운 가정사 때문에 가족간의 관계가 정상을 회복하지 못한 면이 카나와 통해서였던 것일까, 낯선 여인은 억지로 카나에게 사연 있어 보이는 시계 보관증을 맡기고 훌쩍 떠나 버린다.  

"받으러 올 거야. 시계는 주인을 선택하거든."

기모노 여인의 사정을 풀어나가는 동안 아카리는 자신 또한 가족 관계의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매의 정을 다시금 되살려내게 된다.

현재의 관계는 잊고 있었던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슈지는 깨닫게 해준다.

 

이어서 동네 과일가게 부부의 러브스토리가 얽힌 딸기맛 아이스크림의 약속, 돌이 되어버린 손목시계, 멈춰버린 괘종시계의 비밀 등. 소소한 인연으로 슈지나 아카리와 이어진 사람들이 토해내는 추억들이 아름다운 잔영을 남기며 슬쩍 슬쩍 떠오른다.

멈추거나 고장난 시계는 시계 주인들이 현재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거나 과거의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으로 비춰진다.

시계라는 물건은 시간을 꼬박꼬박 체크하고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계 주인이 시계와 함께 해온 모든 시간을 품고 있는 커다란 블랙홀이다.

시계의 주인이 블랙홀에 겁먹고 다가가기 두려워할 때 슈지는 그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가 추억의 덩어리들을 쑤욱 뽑아 내 온다.

슈지가 다시금 그 시절의 추억들을 뽑아 내 오면 사람들은 그것을 곰곰이 들여다보고 어긋난 발자국들을 다시 정리한다.

기계식 시계의 정교한 톱니바퀴가 정확한 시간을 알리기 위해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현재와 과거의 일들도 원인과 결과가 뚜렷한 것을...

컴컴한 블랙홀의 무리에서 슈지는 시계 주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찾아내서 보여준다.

마침내 가라앉아 있던 "진실"과 "진심"이 떠오르면 사람들의 마음은 망가지거나 멈춘 시계가 다시 재깍재깍 돌아가는 순간의 환희를 느끼며 비로소 과거와 화해한다.

 

세 번째 이야기까지는 용케 참아왔던 눈물이 마지막 이야기에서 터져 버렸다.

너무 늦어버린 건 아닌가, 내내 마음 졸였던 노부부의 이야기였는데

퉁명스런 남편은 다시 한 번 아내에게 용기내어 다가가 주었던 것이다.

 

"단추를 잘못 채운 시간을 이런 식으로 잊고 또 다시 고칠 수 있다니."-311

 

사무에를 입고 염색한 머리에 여러 개의 피어스, 온갖 잡동사니를 매단 은색 목걸이를 한 너덜너덜한 차림의 다이치 또한 톱니바퀴가 빚어내는 "기적"의 순간에 끼어들어 그 순간을 빛내주는 "조연"이다.

이 시리즈가 계속 이어진다면 다음 번엔 다이치의 이야기가 속시원히 공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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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2-23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처음에 책 제목이 `추억의 시간을 추리합니다`라고 봤어요. 어떤 책인지 알고 싶어서 찾아 봤는데 장르가 추리였군요. ㅎㅎㅎ 혹시 이 책 만화입니까?

남희돌이 2015-02-23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노벨 이라고 할까요. 만화는 아니지만 가벼운 추리~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을 보셨다면 이해가 빠를 텐데요^^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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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책방의 유익한 책수다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빨간책방을 꾸려가는 두 인물이 작성한 서로의 프로필을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우아한 말로 덮여 있지만 몸과 마음을 거침없이 스캔한 결과 나온 예리한 분석들임이 선뜻 드러난다.

오랫동안 쌓아온 우정이나 친분이 아니라면 서로의 방어벽을 이렇게 쉽게 뚫을 수는 없는 법이다.

 

서로를 평가한 부분에서 나는 이 부분이 좋다.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지만 존댓말을 벽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다정한 사람. 여린 마음이 부서지지 않도록 다짐과 반성으로 갑옷을 만드는 사람. 그렇게 만든 갑옷의 성능을 믿지 않는 사람-김중혁이 본 이동진

 

가방성애자. 잘 있냐고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사람. 귀가 깊어 숲이 되어줄 것 같은 사람. '구들링'하며 공상을 즐기는 사람. 언어의 결과 질감에 누구보다 세심한 사람. -이동진이 본 김중혁

 

국무총리 인준을 놓고 여야가 피튀기는 세력 대결을 하고 있는 와중에, 한 인물을 두고 검증하는 방식이야 어떻든 결과가  이렇게 우아한 말들로 드러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위와 같은 프로필의 국무총리라면...국민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탈리아의 중등인지 고등 과정에서는 한 권의 책을 교과서로 삼아 일 년 동안 공부한다고 한다.

바로 단테의 장편서사시 [신곡]을 다루는 책인데, 그 책의 한 페이지 구성은 이렇다.  신곡의 시 구절이 몇 줄, 그 밑에는 각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각주에는 시 구절 자체에 대한 설명도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국민 문학으로 자리잡은 "신곡"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설한 사람들의 입장이 빼곡히 적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시험칠 때에는 우리나라처럼 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이 아니라 그 각주를 참고로 해서 각자의 이해 정도와 분석력을 평가할 수 있는 문제들을 출제하는 시험을 낸다고 한다.

일 년 동안 그렇게 [신곡] 을 이해하면 어떤 문학 작품을 대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 질문을 던지며 감상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작품문학 작품의 구조를 분석하고 가치를 평가하거나 작가의 창작 방법이나 창작 의도, 가치 관 등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분석하고 판단하는 작업 등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국어교육을 딱딱한 형식에 맞추어 받아온 세대들은 문학을 대할 때, 일단 작품의 형식, 작가의 이력 등을 훑어보고 대충 짐작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새로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내가 읽는 것이 맞는 건가, 작가의 의도가 이게 맞나...불안불안해 하기 일쑤다.

의미가 모호하거나 열린 결말의 문학을 대하는 경우, 누가 뭐라 하지도 않는데 괜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 할 때 머뭇거리게 되고 다수의 의견에 편승하려는 경향을 띠게 된다.

 

[파이 이야기]의 결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도 그러하다.

바다 한가운데 내던져진 약한 사람들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인육을 먹고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은 파이는 그 기억을 동물들의 이야기로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라는 결론에 대다수의 표가 몰린다.

어느 것이 더 마음에 드나요?라고 작가 얀 마텔이 질문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결론에 몰표를 던지는 사람들의 창의력 부재에 빨간책방의 두 파수꾼은 이렇게 경계한다.

 

"답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오히려 더 많은 답을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김중혁, 234

 

"나는 종이가 모자랄 걸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먼저 떨어진 것은 펜이었다. "

결국 [파이 이야기.는 종이와 펜 중에서 어느 것이 먼저 떨어질지조차 예측할 수 없는 인간들에 대한 소설이다. 그런데도 이 거대하고 신비한 이야기를 쉽게 한쪽 방향의 결론으로만 받아들이겠다고?-이동진, 235

 

우리 교육환경에서 문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즐길 것인가를 고민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청소년시절에 문학을 보는 시야를 틔워줄 적절한 안내를 맡아줄 "책" 또는 "인도자"가 없다는 것 또한 문제다.

대학입시에서 "논술"을 반영한다 하여 고전읽기나 논술작법 등의 열풍이 불어닥쳤었는데, 그것이 과연 올바른 읽기에 도움이 되는 것인가?

슬로우 리딩. 한 권을 읽더라도 천천히 읽고 다양한 주제로 읽으면 세상을 보는 눈도 함께 열릴 텐데.

빨간 책방의 두 파수꾼, 김중혁과 이동진은 다독가이면서도 깊이 있는 독서를 하는 훈련이 된 전문가인 듯 싶다.

한 권의 책을 두고 두 명의 입장에서도 이렇게 다양하고 색다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내니 말이다.

보통은 혼자 책을 읽고 나만의 생각을 글로 써보거나 기껏해야 다른 이들의 리뷰를 읽는 것만으로 끝이었는데, 좋은 작품을 읽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꽤 재미있겠다. 싶다.

소심한 나로서는 당장 마을 책읽기 모임에 나가기로 결정을 내리기에는 한참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지만 빨간 책방의 두 파수꾼의 꼼꼼한 책 읽기는 일단 움츠러든 이 고슴도치를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이마 언저리의 가시를 세우고 슉슉거리는 예민한 고슴도치가 책수다 떠는 아줌마가 되기까지...요원하기만 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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