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9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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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도시에 압도당하다 [달의 뒷면]

 

온다 리쿠의 작품은 오랜만이다. [몽위], [메갈로마니아] 등 최근 작품을 읽었는데도 그 설렘은 항상 처음과 같다.

 

처음의 설렘이란 것은, 온다 리쿠의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을 말한다.

맨 처음 접한 그녀의 작품은 [밤의 피크닉]이었다.

청소년 소설 같은 제목이라서 여러 번 제목만 훑고 그냥 지나갔는데 자꾸 지나다 보니 이미 읽어버린 것 같은 기시감이 들어서 한 번 쓱 뺐다가 끝까지 읽어버린 것이다.

이런 작가는 처음이야, 하면서 바로 옆에 있던 [유지니아]를 연달아 읽었는데 그건, 표지부터 확 다른 것이, 온다 리쿠라는 작가를 하나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겠구나,란 계시 같은 것을 받았달까.

쿵쿵...거리는 심장은 그 이후 온다 리쿠의 책들을 어서 내놓으라고 다그쳤고

[삼월은 붉은 구렁을] 시리즈를 읽어갈 무렵에는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온다 리쿠의 팬 대열에 저절로 끼어들어 있게 되었다.

뭐랄까, 그녀의 책을 읽을 때는 어렸을 적 만화방에서 소파에 파묻혀 순정만화를 읽던 그 때의 분위기가 새삼 돋아난다고 할까.

특히 온다 리쿠의 분위기는 김영숙의 [갈채]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작품마다 추구하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지만 왠지 현실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이건 현실이 아니야,'라고 강력하게 부정하고 싶어지는 기이한 상황을 언제나 창조해내기 때문이다.

장편 속의 단편이 다른 단편과 이어지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던 인물이 다른 책 속에서 짠, 하고 나타나기도 하는 등. 그녀의 책을 이어 읽기에는 약간의 조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 수고가 전혀 수고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대체로 그녀의 책을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읽지 않은 책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달의 뒷면]

제목부터 호기심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이 장편은 물의 도시 "야나쿠라"를 배경으로 한다.

일본은 온 나라가 바다로 둘러 싸여 있지만 이 책에서는  바다가 아닌 수로가 뻗어 있는 도시가 나온다.

전직 교수 교이치로의 부름을 받고 물의 도시 야나쿠라에 도착한 다몬은 역 앞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것'과 맞닥뜨린다.

 

'그것'을 본 인상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깊고, 짙고,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걸쭉한 녹색. 지상에 드러나 있는 무기질적이고 지나온 세월이 짧은 콘크리트며 아스팔트에 비해 '그것'은 너무나도 복잡한 유기물 집합체 같았다. -9

 

교이치로는 다몬에게 해괴한 실종 사건을 의뢰한다. 심심하던 차에 수수께끼나 풀까 하는 기분으로 사건에 흥미를 보인 다몬. 사건의 개요는 이랬다.

세 여자가 실종되었다. 사라졌던 세 사람은 사라졌을 때하고 마찬가지로 어느 날 아침 훌쩍 집으로 돌아온다. 실종된 동안의 기억을 잃은 채로.

이 사건에는 교이치로의 딸 아이코, 지방 신문사 지부장이라는 다카하시가 함께 하게 된다.

교이치로가 해괴한 사건에 관심을 보인 것은 동생 부부 또한 같은 패턴의 일을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카하시로부터 전해 들은 다몬은 이번 일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다.

다카하시가 실종되었다 돌아온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듣던 중 다몬은 이상한 소리를 포착한다.

낮고 단속적인, 문자로 표현하자만 보오, 또는 오오, 하고 뭔가가 울리는 소리.

이 소리가 해괴한 연쇄 실종 사건의 단서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 설명 안 해도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73

하늘로 치솟은 검은 불길 같은 사이프러스로 둘러싸인 집 주인은 인터뷰 내용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어느날 교이치로가 기르던 고양이 하쿠우가 가져온 회색 덩어리를 보고 일행은 경악한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 손, 귀 등의 섬뜩한 모형.

두 세 시간만 걸으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작은 도시 어딘가에 사람들을 끌고 가는 누군가가 있다.

 범인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그들 옆을 흐르는 수로에 얼굴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데스마스크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둥둥 소리 없이...

 

이런 기묘한 광경을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그 광경을 떠올려 볼라 치면, 지금은 한겨울의 습기 없는 건조한 날인데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열기와 습기가 가득찬 물의 도시 '야나쿠라'를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

고요한 세계, 정지된 듯한 시간.

하루아침에 넷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도둑맞아 버린' 그 시간과 공간을 온다 리쿠는 능청스럽게 재현해 내고 있다.

그 능청스러움에 망연자실한 것도 잠시,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런 세계가 정말 있단 말인가?

일본인의 구전설화 속에 전해 내려오는 물의 요괴 '갓파'가 정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저런 고요한 세계에 나와 단 몇 명만 남아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도 했다가

마침내 '도둑'의 정체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분을 미리 떠올려보기도 하는 등.

그 정지된 듯한 시간 속에서 다급하게 팔락팔락 몇 개의 필름이 넘겨졌다.

 

물가에 접한 집에서 일어났던 의문의 실종 사건은 기어코 도시 전체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덩그러니 남은 네 명은 극한의 공포를 느낌과 동시에 차츰 안정을 찾아갔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각자의 "달의 뒷면"이 그려지고 있었다.

지구상에 사는 한은 절대 마주할 수 없는 달의 뒷면.

만약 이랬다면, 만약 저랬다면,,,같은 만약의 주문만으로는 절대 가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맞닥뜨려 본 이들은 다시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과거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갓파라는 존재에게 쑤욱~ 끌어당겨져서 한바탕 달의 뒷면을 여행하고 온 이들이 보여주는 행적들은 기이하면서도 일상적이다.

크나큰 충격을 받았어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습성은 쉬 없어지지 않나보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달의 뒷면을 보지 않은 채 제대로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인가.

 

온다 리쿠가 창조해내는 환상적인 세계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물의 도시 야나쿠라 이야기는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때론 뜬금없기도 하고 때론 짜릿하지만 환상적인 세계를 실컷 유람한 다음에는 현실의 고마움을 한층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지속적으로 그녀의 마력 속에 빠져들게 하는 요인인지도 모른다.

다음엔 여러 이야기 속에 등장한 다몬의 이야기만을 모아 만든 [불연속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불면의 밤으로 나를 이끌어줄 [불연속 세계]여,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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