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사서 두보 학교는 즐거워 6
양연주 지음, 김미현 그림 / 키다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꼬마 사서 두보>

 

어렸을 때는 서점 주인이 꿈이었다. 용돈을 조금씩 모아서 서점 들러 책 사는 게 취미였는데, 네모 반듯한 종이에 책을 곱게 싸서 건네 주는 주인 아주머니가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종이 위에 책을 올려 놓고 반으로 접은 다음 위, 아래에 칼집을 쓱쓱 넣고 착착, 따악딱 리듬에 맞춰서 순서대로 귀퉁이를 접어넣는 모습은 신기에 가까웠다. 나도 저렇게 책을 쌀 수 있을까?

신학기가 되어 교과서를 받아 오면 예쁜 종이를 사와서 서점 아주머니를 흉내내어 책을 싸보곤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네모 반듯하게 깔끔한 새 종이로 싸여진 교과서를 보면서 왠지 모를 뿌듯함이 가슴 속에 가득했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책을 싸던 종이마저도 책 속으로 나를 이끌어준 고마운 글동무였다.

 

사서 보는 책도 한계가 있었던지라 도서관 출입을 하게 되면서는 도서관에 앉아 책을 대출하고 반납해주는 사서 선생님을 보고 서점 주인이 아닌 사서를 꿈꾸었더랬다.

하루 종일 편하게 앉아서 책 뒷장에 꽂힌 카드에 써온 날짜와 이름을 확인하고 책을 빌려주거나 아니면 돌아온 책을 제자리에 꽂아 놓기만 하는 거. (너무 좋겠다.)

어쨌든 책 냄새 맡으면서 책 실컷 읽을 수 있는 직업이잖아. (그것도 공짜로.)

그렇지만 도서관을 둘러 보면서 서가에 적힌 분류표 100이니 800이니 하는 것들을 보고서는 ‘에? 이런 것도 다 해야 하는 거야? 이 많은 책들을? 분류는 다 어떻게 하지?' 책 다 읽어보고 분류까지 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어린 나이에 재미있게도 신기하게도 보이고 두렵게도 보이는 사서라는 직업은 좀 자라 다른 꿈이 자리잡기 전까지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서가 될까?

내가 보았던 사서의 롤모델은 대개 시립도서관의 사서들 뿐이었다.

다른 도서관은 없었으니까.

그들은 대체로 단정하고 조용했으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다가가기 힘든 어,른, 이었다.

그 때는 다양한 도서관을 찾기가 힘들 때여서 어린이 도서관도 없었고, 학교 도서관은 들어서기조차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시체보관소처럼 책을 보관하기만 하는 곳이어서 다양한 사서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요즘은 어떤가...

학교마다 도서관과 사서가 다 있고 시립도서관에도 어린이도서관의 자리가 있으며 어린이 전문 도서관도 꽤 많이 들어서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두보도 학교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과 인연을 맺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청 부끄럼쟁이라 말만 누가 말만 걸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 두보. 그래서 두보는 말을 잘 안한다.

꼭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마음 속으로 두보에게 응원을 보낸다. ‘힘내렴, 두보야. 점점 나아질 거야.’

어느 날 두보는 길에서 신기초등학교의 위치를 물어보는 뚱뚱한 아줌마를 만나게 된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뭐야? 아줌마는 김숙히야....희망의 ‘희’말고 ‘히히히’ 할 때 ‘히’.자야 이름에 ‘히’가 있어서 잘 웃는가 봐. 히히히.”-9

처음 알게 된 인연으로 마음대로 대출증을 만들게 되었고 자주 도서관에 들른 두보는 조금씩 사서 선생님이 골라주는 재미있는 책에 빠져들었다. 스스로 공부도 못하고 인기도 없다고 생각하던 두보는 책 속에서 얻은 지식으로 점점 똑똑해졌고 인기가 많아졌다. 책에 대한 호기심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이다. 꼬마 사서로 변신한 두보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친구들의 도서관 사용을 돕는다. 전학을 간 두보는 어느 날 사서 선생님에게 선물을 받게 되는데.....

 

한 권 한 권 책으로 지혜와 용기를 쌓아 가는 두보의 이야기.

아이들에 대한 무한 애정을 가지고 관찰하면서 이 책 저 책 추천해주는 김숙히 사서 선생님은 분명 멋진 선생님이다.

두보같은 부끄럼쟁이 아이도 자신감 있는 아이로 바꾸는 비밀의 열쇠를 꼭 잡고 있었던 선생님이었으니 말이다.

 

책 속에 밥이 있다.

읽는 자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좋은 책, 알맞은 책을 고르는 지혜도 필요한 세상이다.

정보의 양은 넘쳐나고 정보의 바다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지혜를 가진 등대와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해졌다. 무엇을? 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해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 도서관의 꽃. 사서.

전국의 도서관에 김숙히 선생님 같은 사서가 가득하여 모든 아이들이 두보처럼 삶의 길을 똑바로 찾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먼저, 학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도서관으로 옮겨야 하겠지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장에 가면 만날 수 있어요 가로세로그림책 4
니키 매클루어 글.그림, 강수돌 옮김 / 초록개구리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시장에 가면 만날 수 있어요>

 

재래시장의 매력을 만나볼 수 있는 책.

 

부모님께서 나 어린 시절에 시장통에서 중국집을 하셨기 때문에 재래시장은 내게 무척 친숙하다. 아니, 삶의 터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학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새벽 희미한 빛을 깨고 가게 문을 열거나 자리를 펼 준비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이 나를 맞이한다.

물건을 박스째 들고 나르거나 줄맞춰서 진열하는 주인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얼굴에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래도 손님맞을 준비를 하는 그네들의 몸짓에는 희망이 묻어있다.

“학교 가냐?” 나는 부끄러워서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걸음을 재촉한다.

시장통 상인들의 목소리는 걸걸하고 귀따갑고 화통하다.

손님들과 가격 흥정을 하고 가끔가다 드잡이도 하는 모습을 보아온 나는 그들의 상냥함이 도리어 어색하다.

아침에 나에게 건네는 상냥한 인사도 툭하면 손님에게 시비 거는 그들의 한낮 풍경과 겹쳐서 고개를 외로 꼬고 외면하게 만드는 거침이 있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속마음은 한없이 따스하다는 것을.

한창 일하느라 바쁜 엄마 대신 조개며 야채 따위의 장을 보러 심부름 가는 것은 하루 일과 중 하나였고, 중간중간 식혜며 얼음 동동 띄운 콩국은 심부름의 짜증을 잊게 해주는 재밋거리였다.

아~ 또 생각난다.

종종 들르는 시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보리밥집은 나의 마음의 고향이다.

구수한 보리밥 냄새와 잘 익은 열무김치의 냄새. 밥 냄새 만큼이나 한없이 푸근했던 주인 아주머니의 미소와 느릿한 사투리.

다 먹고 나면 아주머니가 내주는 숭늉을 마시면서 나는 행복에 겨워했다.

‘보리밥 아줌마가 내 엄마였으며...’ 하는 생각도 가끔 했다. 우리 엄마 밥도 맛있었지만, 그래도 가마솥에서 보리밥을 한 주걱 퍼담아 주는 아주머니의 정에는 특벽함이 있었다. 지금은 그 보리밥 집 있으려나? 그 땐 내가 어려서 아주머니에 대한 고마움을 미처 표현 못하고 이사 왔는데...

 

나는 재래시장하면 옛날의 추억과 보리밥이 떠오르는데, 이 작가는 재래시장의 수많은 먹을 거리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시장에 나오게 되는지 그 과정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 때 쓰는 도구, 작업 방식들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분들의 지식, 기술, 끈기 같은 것들도 곁들인다. 농장에서 갓따온 마이클 아저씨의 사과, 콜린 아저씨와 제닌 아줌마의 달고 향긋한 케일, 싱싱한 여어랑 돌소금, 오리나무 연기로 만든 스티브 아저씨의 훈제 연어.

 

이 책은 그림책에서 보기 드문 기법인 ‘페이퍼 컷 아트’로 만든 책이다. 처음엔 선이 굵은 테두리로 그림들이 이루어져 있어서 ‘판화인가?’ 했는데, 선들의 이어짐이 부드럽고 뭔가 판화와는 다른 느낌이 들어서 앞을 뒤적여봤더니, 종이 오리기 기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빛깔이 아주 맑고 예쁜 벤자민 아저씨네 단풍꿀, 블루베리를 듬뿍 넣어 촉촉하고 맛있는 블루베리 파이, 천연염색 기법으로 쪽물을 들인 유키 누나네 냅킨, 염소 젖으로 만든 치즈.

이 먹을거리들이 한 식탁에 차려지자 색깔들이 비로소 한자리에 모였다. 빨강, 초록, 주황, 파랑 등등.

 

우리에게 온갖 먹을거리를 준 시장 사람들과 농장 사람들, 땅과 나무, 꽃과 벌, 염소와 물고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모두모두 고마워요. 다음 장날에 또 만나요. 그때까지, 안녕!

 

마트에서 똑같은 모양의 비닐에 포장되어 나오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먹을거리들 때문이에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편식을 했나? 상인들의 활기참에서 오는 밝은 기운과 싱싱한 먹을거리들에 대한 호기심을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에 밥이 맛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야기와 정이 넘쳐나는는 재래시장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보고 나면 아이들도 뭔가 깨닫겠지?

편리함과 위생 만을 생각해서 재래시장에 자주 들르지 않았는데, 날 좋은 5월, 아이들과 손잡고 재래시장 나들이를 한 번 가야겠다.

코를 막고 “생선냄새 싫어”,“국밥 냄새 싫어” 하더라도 삶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부딪쳐야 느끼는 게 많을 터.

얘들아, 재래시장으로 나들이 한 번, 어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빤쓰 키다리 그림책 31
박종채 글.그림 / 키다리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빤쓰>

 

빤스와 난닝구~

어린 시절로 휘리릭 날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말이다.

일제 시대의 잔재가 남아있는 말이라 금기시하고 의식적으로 피하면서 점점 사라진 말이지만, 그래도 옛날의 향수가 묻어나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지금은 한 집에 아이 하나 있기도 힘든 시절이지만, 예전에는 셋은 기본이고 더 많이도 줄줄이 낳았었다.

요즘은 9남매, 11남매 등. 아이 많이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제 먹을 건 제가 타고 난다고 “무조건 많이 낳아라~”라는 말은 덕담이 아니라 누구 신세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 되어 버렸다.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니는 고물거리는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동참해야 하니, 그런 말 안하신다.

 

아이들 교육상 순화된 우리말을 쓰려고 노력하니, 빤쓰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우리 아이들은 “빤쓰가 뭐야?” 하고 물어본다. 정말 몰라서...

“으이구...그것도 몰라?” 하고 퉁박을 주고 싶었지만, 아주 세련된 세상이니 그 말을 모르고 9살, 6살 평생 그 말을 못 듣고 산 것은 지들 탓이 아니지 않은가...하여, 퉁박 주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빤쓰와 난닝구가 나온 김에 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본다.

그 시절엔 그냥 보통 둘 혹은 셋인 집이 기본이었고 어쩌다 외동인 친구들이 한 둘 섞여 있었다. 나는 외동인 그 친구를 부러워했고, 그 친구는 동생이 많은 나를 부러워했었다. 여하튼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속담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 만고불변의 진리다.

 

우리 집은 딸만 셋이었다. 딸만 셋인지라, 첫째인 나를 제외하고는 옷은 줄줄이 물려 입어야 했고, 둘째나 막내는 해마다 돌아오는 명절 아님 어린이날이 새 옷 사는 날인 줄 알고 있었다.

뭐 형편 넉넉지는 않았으니, 나도 계속 새 옷만 입을 수는 없었다. 왕래하는 친척집에서 언니들이 입던 코트나 겉옷 정도는 물려 입을 수 밖에.

그래도 나는 자주 새옷을 사니까 견딜만 했지만 둘째는 나와 한 살 터울이었기 때문에 새 옷 얻어입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거기다, 욕심이 욕심이 하늘을 찌르고 외모에 엄청 공을 들이는 새침한 아이였기 때문에 엄마에게 날마다 떼를 쓰곤 했단다. 나는 기억이 잘 안나지만...엄마 말로는 그렇다. 딸 셋이 놀때는 그렇게 사이좋고 재미있게 놀며서 옷 가지고 싸울 때는 또 엄청 싸웠다니...아들 키우는 엄마들이 힘들었다지만, 딸들의 눈치보기며 앙알거리는 싸움을 견디었던 엄마도 참...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옷 때문에 또는 물려 쓰는 물건 때문에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는 집이 우리 말고도 그 시절엔 흔했나 보다.

이렇게 책으로 나온 걸 보면.

이 책의 주인공은 아홉 살 박철수. 엄마 아빠 포함 모두 아홉 식구란다. 철수네 집도

“헌 옷이 싫다”, “새 옷 사달라”..조르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 때마다 아빠가 회초리로 방바닥을 두드리며 “요녀석들 혼이 나야겠어.”하신다.

요즘 아이들은 어디 아빠가 무서운 사람인가? 같이 노는 친구지..

신체검사 하는 날. 엄마가 만들어 놓은 빤쓰를 입고 간 철수.

빨간 나비 리본이 달린 빤쓰에 모두의 놀림거리가 되고 만다.

얼마나 창피했을까..

다음 날 엄마는 철수에 새 빤쓰를 만들어준다.

이번엔 무슨 모양의 빤쓰일까?

 

자꾸 빤쓰, 빤쓰 하니까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신체검사한다고 다라이에 들어가 때를 벗기던 철수. 옷을 벗어야 하는 신체검사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철수. 집에서 드르륵 드르륵 하며 무엇이든 만들고 고쳐내던 엄마의 재봉틀. 교복 교모 가방 물려주기 등등. 나에게도 조금은 낯선 것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동심을 자극하는 책이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때면 필히, “엄마, 아빠 어렸을 때는 말이야”하는 어구가 들어갈 것만 같은 책.

나에게는 따뜻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책.

아이들에게는 “이게 뭐야? 하하하. 팬티만 입고 하늘을 날아가네. 그런데 빤쓰가 뭐야?” 하는 말이 툭 튀어나오게 하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개정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2권이 나온 지가 벌써 10년이 다되어 간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아직도 유효하며 잘 익은 막걸리마냥 마실수록 더욱 뒷 잔을 거푸 들게 하는 걸걸한 매력이 있다.

1권이 나왔을 때 친구들이 그 책 한 권에 의지해 남도의 땅끝 마을 답사를 대학 졸업여행으로 기획했을 만큼 그 책은 떠나고 싶은 욕망을 부채질하면서 좋은 길라잡이의 역할도 했었다. 1권의 여흥을 이어받아 지금은 7권까지 시리즈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나는 그 많은 답사 코스 중에서 2권을 골라 들었다.

2권의 답사 코스는 지리산 부근, 경주, 운문사 등 내가 사는 부산에서 가까운 곳도 있고 강원도 철원, 정선과 민통선 부근 철원 등 먼 곳도 있다. 그리고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아도 부산에서 접근하기 힘든 전라도 부안과 고부 등지도 2권 답사 코스에 실려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이 책은 책장을 넘겨보면 그 속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가 본 곳과 못 가본 곳이 적절히 섞여 있어서 때론 회상에 잠기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여행 앞머리에 슬쩍 띄운 농 하나.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모두 즐길 권리가 있는 탁족. 작자 미상의 <삼복탁족도>를 잘 설명한 유홍준의 글에는 잔잔한, 아니 포복절도할 해학이 녹아 있다.

여기서는 고고한 기품 대신 질펀한 물놀이의 흥겨움이 강조되어 있다. 세 쌍둥이 솥에 끓이고 있는 것은 분명 보신탕일 것이며, 탁족의 경지는 발을 닦는 것을 넘어서 ‘기역받침을 지읒받침으로 바꾸는 차원’으로 들어갔다. 이쯤 되면 탁족은 체모와 격식과 규범으로부터 홀연히 벗어나는 감성적 해방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16

 

시작부터 한바탕 껄껄 웃음을 선사하신다.

 

위치 설정에서부터 다소 드라마틱한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영남의 정자들 중에서 ‘농월정’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 곳이다. 나도 다녀온 적이 있지만 잊어버리고 있었던 정자. 월연암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너럭바위 전체를 조망하기 위해 계곡 건너편 저쪽으로 바짝 밀어붙여 세워진 농월정은 유홍준의 호기로운 설명으로 내 기억에서 다시 끄집어내어졌다. 움푹한 바위 웅덩이에 안의마을 양조장에서 받아온 막걸리를 쏟아부어 진달래 꽃잎이나 솔잎을 계절따라 띄우고 한바가지씩 퍼마셨다던 영남대 한문학과 학생들의 “풍류”를 나도 언젠가 한 번 실행해 보아야 할 텐데...

 

아쉬움을 뒤로 접고 호사스런 글솜씨로 나를 이끄는 유홍준 교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닌다.

이번에 만난 곳은 영주의 부석사. 나는 부석사를 여러 번에 걸쳐 만났다. 호젓하게도 거닐어 봤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도 걸어봤고, 아이들과 떠들썩하게도 다녀봤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부석사는 새벽녘 호젓하게 걸었던 부석사이다. 새벽 이슬 내려앉은 어둑신한 사과밭길을 터덜터덜 걸으며 경건한 마음을 담고 올라선 경내에서 저절로 우러러 보여지던 무량수전. 그리고 살짝쿵 걸쳐진 안양루에서 내려다 본 장대한 산맥의 너른 품. 내 짧은 글솜씨로는 도저히 표현할 길 없었는데, 유홍준 교수도 그러했는지,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고 최순우 관장의 <무량수전>한 편으로 대변하고 있다.

사무치는 마음. 그도 느끼고 나도 느낀 바로 그 마음이다.

 

내가 분명히 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한 것들을 유홍준은 곳곳에서 잡아내고 있다.

운문사며 석굴암 등등.

가까운 곳이라 자주 찾았던 곳인데도 내가 본 것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일제 시대의 해체수리와 1963년의 보수공사로 원래의 아름다움을 잃게 하고 신라인의 과학에도 여러 발 못 미치는 행태를 거듭하고 있는 우리의 바보짓을 일깨우는 석굴암에 대한 이야기도 그러했다.

석굴암이 아니라, 수굴암, 암굴암, 전굴암이라...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체험하고 싶다면 일독을 강추한다.

그리고 미학자의 안목으로 수려한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나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석불사 석굴의 조각을 보면서 그가 토해낸 감탄을 보라!

그날 내게 다가오는 석불사 석굴의 조각은 맹목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아카데미즘이 아니었다.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엔 절대자의 기품이 강하였다. ...본존불의 고전주의적 기품이 중심을 이루면서 10대제자상의 강렬한 리얼리즘이 포진하고 있는가 하면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의 문수·보현, 제석천·범천이 얇은 돋을새김으로 환상적·이상주의적 자태를 보여주며, 11면 관음보살은 여지없는 ‘미스 통일신라’로 석면을 뛰쳐나올 듯한 자세로 다가온다.....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내가 “보지 않은 것은 보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아서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때의 경험이었다. -234

 

국토박물관에 지천으로 널린 볼거리, 느낄거리들을 맛깔나는 해설로 가득히 차려놓은 유홍준 교수의 책.

살아 있는 답사 안내서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아이들이 커서 터벅터벅 걸어... 멀고 긴 길을 걷게 되면 이 책 한 권을 (아니, 시리즈 모두를) 턱 하니 건네주고 잘 다녀오라고 말할 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곳에 가면 사랑하고 싶어져 - 시간산책 감성 팟캐스터가 발로 쓴 인도이야기
김지현 글.사진 / 서교출판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곳에 가면 사랑하고 싶어져>- 발로 쓴 인도 이야기

 

 

이 책은 예쁘다.

표지부터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고, 인도풍이라 할 만한 사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글을 쓴 저자도 예쁘고, 그녀의 나이조차 꽃답다.

20대 이런 저런 고민을 짊어진 사람들이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미래. 아직 오지 않은 그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마주대했을 때, 20대의 그녀는 인도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

인도는 석가의 고향으로 ‘성지’라는 인식이 강한 곳이며 인류 최초 문명의 시발점이라 ‘힐링’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다.

떠나고 싶다면 인도로...

살면서 내가 발딛고 있는 이 공간이 지겨워지고 진저리치게 싫어질 날이 왔을 때, 문득 어디로 떠날까를 고민한 적이 있는가? 떠나기로 결심하는 것이 힘들지, 어디로 떠날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을까.

역시 인도로...를 택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 짐작한다. 내 생각일 뿐인가...

나 역시 인도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으로 부푼 기대를 안고 이 책을 펼쳤다.

사전 준비 없이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인도로 떠났다는 그녀.

 

무작정 떠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뭔가를 얻어와서 이 책을 썼지만, 나는 이 책에서 얻은 것이 많지 않다.

미안한 말이지만...

인도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류시화의 산문 [하늘호수로 떠난 여행]의 여운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뇌리에서 빠져 나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가 너무 어리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으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무척 실망했다.

 

사소한 트집을 잡아볼까.

류시화의 글을 추천한 이는 고은(시인), 박완서(소설가), 곽재구(시인)다.

반면, 이 책을 추천한 이는 유종호(차앤유 피부클리닉 원장), 서준영(다음카페 「티베트 여행 동호회」 운영자), 명승권(의사, 팟캐스트 「나는 의사다-닥터명의 의학쇼」진행자), 허정훈(인디아레스토랑「달」지배인)이다.

.............................................. (할 말 없음)...................................................

‘감성 에세이이므로 류시화의 글과 비교를 불허한다.’

라고 대꾸하면, 굳이 류시화의 글을 끌어다 붙인 나는, 참 할 일 없는 트집쟁이에 불과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작가는 2011년부터 감성 팟캐스트 「김지현의 시간산책」을 진행하며 6만명 이상 청취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2012년 「월드미스유니버시티」대회에 참가해 차앤유 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녀는 현재 이화여대에서 관현악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뭔가 책의 날개를 펼친 순간부터 확 밀려 올라오는 이상한 짜증과 쉽게 동화되기 어려운 이 감정은 “많은 것”을 가진 그녀에 대한 질시인 걸까.

그렇지만 명문대라는 이화여대에서 국문학까지 전공한 그녀의 글은 중간 중간 앞 뒤 호응 맞지 않는 문장과 너무 뚝뚝 끊어지는 에피소드 그리고 덜 여문 감정의 억지스러운 연결들로 책을 읽어가는 내내 삐그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여기 이 대목에선 이런 교훈을, 이 에피소드에선 이런 감동을...

여행을 다녀와서 리포트를 써 내시오~하는 과제에 대한 답인 것처럼, 딱딱 짜여진 에피소드와 감동들이 불편했다.

인도에 가서 아직 벗어던질 게 많은 것인지, 인생의 쓴맛을 더 봐야 하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인 건지...그녀 말대로 대한민국식 교육제도에 맞춰 살아서 자기를 드러내는 데 부족한 면이 많은 것인지.

인도에 가서 사람들과 여러 달 동안 지내면서 기록한 글이건만, 그녀 내면에서 차오르는 성숙함을 보아달라고 쓴 글이건만, 나는 그녀의 글에 응원을 보내고 공감할 수가 없었다.

역시 10년간 10차례 이상 인도등지를 여행한 류시화의 내공에 많이 못미치는 탓인가.

처음부터 작가에 대한 글을 읽고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내가 이렇게 밖에 후기를 남기지 못해서 미안하다.

 

산 설고 물 설은 먼 이국 땅에서 장염을 이겨내가며 불가촉천민의 삶을 지켜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육첩방 슬리퍼에 얹혀 10시간도 넘게 인도땅을 건너다니느라,느끼한 인도 청년들의 눈길을 받아내느라 그녀는 얼마나 몸고 마음이 고되었을까.

 패스트푸드점의 치킨 한 조각 먹으려다가 눈 큰 인도아이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여리디 여린가.

성스러운 갠지스강이 있는 바라나시에서 소원을 비는 디아를 띄우며 그녀는 내가 모르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겠지.

 어쨌거나 그녀는 인도를 다녀왔고, 나는 아직 현실에 붙박인 몸이니까.

문명의 축복인 물티슈와 손전등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그녀는 얼마나 음...나머지 말을 못 잇겠다.

 

20대의 풋풋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도.

묵직하지 않은 가벼운 터치로 인도를 그린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책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쨌거나 인도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녀가 직접 발로 뛰며 겪은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제공하고 있긴 하니까 말이다.

발로 쓴 인도 이야기.

내게는 중의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말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