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너의 목소리가 들려>

 

봄인데, 바람이 많이 분다.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 벚꽃이 빨리 피고, 벌써 다 져버렸다. 더이상 흩날리는 벚꽃의 장관을 못 보겠지, 했는데, 이번 바람에 꽃잎을 틔웠던 꽃줄기가 맥없이 스러진다.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뱅글뱅글 춤을 추며 떨어지는 꽃줄기들의 향연.

바람이 우수수.

하는 통에

내 마음도 우수수다.

거기에 더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제이도 우수수...

 

원나라 말기의 항저우에서 있었던 놀라운 마술. 이븐 바투타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읽고 있다.

 

마술사는 사라진 어린 조수를 찾아 밧줄을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잠시 후, 마술사 역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득한 하늘이 문득 무겁게 느껴진다. 허공을 우러르는 사람들의 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저 높은 곳에서 어린 조수의 팔, 다리, 머리, 몸통이 차례로 떨어져내린다. 둔탁한 소리가 나고 신선한 피가 튄다...잠시 후, 양손에 선혈이 낭자한 마술사가 밧줄을 타고 다시 내려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조수의 몸뚱이들을 화가 덜 풀린 얼굴로 양동이에 주워담는다 ...뭘 더 바라는 거요? 그런데 그때 마술사의 뒤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다. 양동이를 덮은 거적을 들추고 아이가, 마치 긴 낮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눈을 비비며 걸어나오는 것이다. -8

 

섬뜩하면서도 놀라운 마술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끝날 때까지 이 마술의 여운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 소년이 제이였을까...

읽기 전에 문득 궁금해졌고, 읽는 동안 내내 궁금하고, 다 읽고 나서도 끝내 궁금함은 풀리지 않았다.

목소리만을 남겨두고 홀연히 ‘승천’해 버린 제이.

 

수천 대의 버스가 엇갈리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어린 엄마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제이는 돼지엄마의 보호 아래 유년기를 보냈으나, 곧 버림받고 만다. 시설의 보호마저도 박차고 나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거리 생활을 시작하는 제이는 특이함, 그 자체다.

어린 시절 선택적 함구증으로 말을 못했던 동규와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밖을 헤매던 목란이 제이를 그나마 가까이 겪어보았던 사람이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집과 가족이 있어도 제발로 걸어나온 동규와 목란.

그리고 처음부터 길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제이.

그들의 삶은 너무 아리다.

이야기로 풀어놓을라 치면, 책 수십권은 될 거다...하는 나의 삶도 그들의 삶 앞에선 그냥 쭈그러져 있어야 하는 조그만 보따리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 내가 그렇게도 읽고 싶어하던 명랑소설 대신에, 아빠는 줄기차게 소년소녀 가장들의 생활수기 모음집을 그렇게 사다 나르셨다.

재미도 없고, 눈물만 나는 그런 책들을 왜 사다 나르시냐고...

어린 나이에 그런 책들을 읽는다는 건....정말 교육적이지 않다고, 소리쳐 말하고 싶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만약, 만약에 아빠가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다 해도, 살아야 할 이유는 있다.’ 정도를 알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겠지.

부모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니, 문득 내 부모님이 생각나고, 내 아이들이 생각난다.

광복절 폭주를 뛰는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아...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제, 너희들의 정신적인 지주, 제이는 없다.

 

“제이가 바로 저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

“요즘 들어 자꾸 제이 목소리가 들려요.”

“뭐라고 하는데?”

“새로운 말은 없어요. 예전에 걔가 했던 말이 마치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다시 들려요.”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뭐니?”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예요.”

“제이가 했던 말이지?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야?”

“뜻은 모르겠어요. 그치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제이가 저를 용서한다는 느낌이 들어요.”-246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길거리로 나와서 오토바이 폭주를 뛰는 아이들이나, 버젓한 의사니 교수니 하는 직업이 있어도 마음이 뿌듯이 채워지지 않아서 할리 데이빗슨과 가죽 점퍼로 차려입고 질서정연한 바이크를 하는 어른들이나....

마음 기대고 쉴 곳이 없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을 읽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가정의 중요성.

만들기도 어렵고, 꾸려가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다.

제이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뒤따라가서 동참하고 싶어지는 나약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린 시절 제이의 가냘픈 등 뒤에 솟아난 날개가 날 자리같았던 뼈.

너는 천사였니, 악마였니?

부디...나에게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 가슴 아픈 소설의 뒷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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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교과서 - 여자는 전혀 모르고 남자는 차마 말 못하는 것들
명로진 지음 / 퍼플카우콘텐츠그룹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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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남자의 교과서>

여자는 전혀 모르고 남자는 차마 말 못하는 것들

 

왜 여자가 전혀 모른다고 생각할까?

^^

여자도 남자에 대해 알 건 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지만, 서로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같이 울고, 웃고,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아마, 이 책의 집필의도에는 요즘 같은 과도기의 세상, 즉 남성 중심에서 양성 평등으로 넘어가는 이 세상에 예전같이 남자의 힘을 과시하지 못하고 풀죽어 사는 남성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의미가 짙게 깔려 있지 않나 싶다.

그건, 여자인 나도 동감한다.

일하느라, 돈버느라, 가족을 등한시하다가 차츰 가족들에게서 소외되어 가는 쓸쓸한 남자들이 많다는 거. 그들은 위로받아야 마땅하다는 거.

남자들이여! 과거의 영광과 위용을 되새기고 곱씹으며, “아~옛날이여! 다시 한 번!”을 외치고 싶을 때가 불쑥불쑥 찾아들 때 이 책을 꺼내 읽으며 위로를 받으라.

 

요즘 한창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드라마 <직장의 신>을 보면 마초 군단과 초식남 군단이 나온다.

씁쓸한 양분법이긴 하지만, 정말 드라마를 보면서도 “요즘 진짜 저래?”를 연발하긴 하지만, 실제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드라마이다 보니, 없는 얘기 지어낸 것 같진 않다.

그래서, <직장의 신>을 보면서도 배꼽잡고 웃긴 하지만, 남자들의 사는 법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하다고 나름, 인정하는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작가가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이 바로, 마초 남들의 시절이 아닌가?

진정한 갑이 되는 법!

첫 번째 이야기부터 뭔가, 남자들의 힘을 불끈 자극하면서 여자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제목.

 

<남자의 교과서>는 일, 가족, 섹스, 취향, 꿈에 대한 남자의 단어들을 뽑아 재기발랄하게 엮어간다.

46가지의 본심이라고나 할까...

 

Work-가오가 뭐길래 배고픔도 잊을 수 있나, 참을 수 없는 ‘욱’의 가벼움, 그 누구에게도 당신의 생각을 말하지 말 것.

등의 챕터에선 참, 남자로 살기도 힘들구나...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동정을 금치 못했다.

 

Family-엄마를 넘어서야 진짜 남자가 된다, 맞는 말씀. 식구들 때문에 피곤한 남자들, 여자도 그렇거든. 생리 중인 여자는 무조건 옳다. 절대 찬성. 진짜 맞는 말이다. 이 좋은 책을 왜 여자들은 보지 말라고 한 거지? 여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남자 앞에 들이대면서 시위라도 할까봐? 여자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구요...

 

Sex-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세상에 없다. 그럼요. 없고 말고요. 여자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도 세상에 없지요. 예쁜 여자 좋아하는 게 뭐가 어때서. 맞아요. 예쁜 남자 좋아하는 거랑 똑같지요. 이해합니다. 암요~금요일 밤의 하이라이트, <뮤직뱅크>를 같이 보면서도 동상이몽이라는 거, 알지요. 남편은 걸그룹의 치마 길이를 보고, 저는 남자 아이돌들의 싱싱한 젊음과 귀여운 얼굴들을 사랑한다는 거.

 

Favorites-끊지 말고 참으세요. 금연하기 힘든 거 잘 압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아내들의 잔소리보다 아이들의 잔소리를 더 못견뎌 하실 겁니다. 영리한 요즘 아이들, 아빠 담배 냄새 진짜 싫어하거든요.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사치-시계, 가방, 옷. 순서대로 탐닉해가는 우리 남편. 참아줘야죠. 여자들도 나름의 포기할 수 없는 사치가 있다는 걸 이해해주기만 한다면야.

 도대체 남자들은 왜 야동을 볼까. 같이 본다면 나도 넘어가 줄 용의가 있다. 여자를 제끼고, 아내들의 경쟁상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너그러운 여자들은 얼마든지 허용해줄 수 있다. 쯧, 벌벌 떨기는...

 

Dream-마흔, 아직은 흔들려도 괜찮아. 아내와 함께 갈 생각을 해야지...혼자 가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진짜 친구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남자의 친구 관념...사람마다 다른 것 아닐까...여자들도 진짜 의리파가 있는 반면, 이라이저처럼 과시용으로 매달고 다니는 친구들을 친구라고 하는 여자도 있다.

 

남자의 본심이 담겨있는 46개의 단어들-권력, 돈, 가오, 욱, 잔소리, 눈물, 섹스, 남성해방, 컬렉션, 야동, 만족, 꿈, 자유 등등-을 보니 왜 이 책의 제목이 <남자의 교과서>가 되었는지 알겠다. 그렇지만, 세상의 거의 반은 남자, 나머지 반은 여자라는 거. 답답한 심사를 풀 길 없는 남자들은 한 번씩 이 책을 보면서 위로받는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평생 여자를 외면한 채, 남자들 위주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한다면, 뭐랄까...너무 불쌍한 인생이 아닐까.

최선을 다하며 사는 김에 여성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남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여자들의 입장도 한번쯤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내 남자는 내가 간수해야지.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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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는 해적이 되고 싶어 - 제2회 말라가 어린이 문학상 수상작 스콜라 어린이문고 5
파블로 아란다 글, 에스더 고메스 마드리드 그림, 성초림 옮김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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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빨간 가방에 빨간 신발을 신고, 빨간 앵무새까지 어깨에 척 올린, 그야말로 깔맞춤을 한 우리의 페데. 사뭇 반항적인 눈동자에, 입까지 한쪽으로 모아 오므리고는 ‘훗’하고 코웃음을 날리는 듯한 표정. 얼마나 해적이 되고 싶었으면, 그림자가 해적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래, 페데야, 해적이 되고 싶었

어?우쭈쭈..”.하고 얼러주어야 할 것 같은 7살 꼬마 소년. 그러나, 해적이 되고 싶다는 결심은 부러 하는 우스개는 아닌 것 같다.

해적이 되기 위해 한쪽 다리를 톱으로 쓱싹쓱싹 갈며 실행에 옮기는 용감한 소년이니 말이다.

 

 

페데니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니 하는 라틴계 이름의 아동소설은 낯설지만, 계속 내용을 보니, 예전에 TV에서 방영했던 <천사들의 합창>이 생각난다.

어여쁜 히메나 선생님이 나왔던^^

귀엽고 순진한 천사들 속에도 엉뚱하고 귀여운 아이들이 많았었는데, 페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곱살 꼬마다.

 

이제 6살이지만, 내년에 7살이 되는 우리 아들. 요즘 폭풍처럼 몰아닥친 과도기에 들어섰는지, 좌충우돌 말썽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 아들은 어떤 기상천외한 말로 나를 뒤집어지게 할 지 모르겠지만, 해적이 되고 싶어하는 페데를 읽고 나면 유연하게 대처할 방법이 생각날 것 같아 무척 기대했던 책이다.

오늘은 6살 우리 아들이 유치원에 다녀 와서 그림을 그렸다.

며칠 전만해도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그림 그리라고 해서, “나는 미술을 몰라요. 그림 안 그릴래요.”라고 말했다며 눈물을 글썽이길래, 그림 그리는 게 스트레스였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다짜고짜 종이를 꺼내고, 색연필을 들더니, 쓰윽 쓱, 자신만만하게 선을 그려나간다. “그게 뭐니? 잘 그리네.?” 일단, 띄워줘 보았다. “응, 똥이야.”

허걱.

조그만 졸라맨에 맨 위에 서 있고, 그 밑으로 길다란 뱀 같은 길이 구불구불 그려져 있다. 그러고는 그 길 위에 동그라미, 동그라미, 똥,똥,똥...

유치원에서 응가를 했는데, 선생님이 “혼자 닦을 수 있겠어?”하고 물으셨단다. 당연히 혼자 못 닦는데, 아직, 선생님도 낯설고, 말할 용기도 부족했던지, 저도 모르게 “네.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한 다음 혼자 닦기에 도전했단다. “그런데, 손가락에 묻었어. 얼른 닦았지만.”

바지를 내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응가 자국이 묻어 있었다. 깨끗이 닦아내기에 실패한 듯. “아이고, 기특하네. 우리, 똥쟁이?” “똥쟁이라고 하지마.”

우흡흡. 웃음을 참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집에 오자마자 그림을 그린 배경이 이해가 되었다. 혼자 용감하게 뒤처리를 했고, 손에 묻었고, 창피하지만 용감한 일을 해낸 듯 하여,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구, 대견한 것.

어른이었다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기라도 했다면, 부끄러워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을, 6살짜리 우리 아들은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아이들은 참~ . 그들만의 세계에 산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페데는 어떠한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윗집 아저씨께 인사도 하지 않아서 머쓱해진 엄마로부터 “얘는 정말 구제불능이에요.”라는 말을 듣는다.

 내가 보기엔, 페데의 가족들도 페데 못지 않은 구제불능이지 싶다. 페데로부터 엉뚱한 질문 예를 들어 “배는 그렇게 무거운데 어떻게 물에 뜨느냐고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엄마를 찾는 아빠. 아빠는 ‘바다표범’, 동생 페데는 ‘올챙이’라고 부르며 ‘뉴턴아저씨는 왜 사과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주무셨답니까? 텔레비전이나 발명했으면 좋았잖아요?’하고 투덜대는 누나 이사벨, 가짜 이빨, 가짜 귀, 가짜 눈을 쓰는 할아버지를 인조인간이라 부르는 페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고.

 

 페데의 어록을 살펴 보자.

 

해적의 필수품 앵무새 대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로 손전등을 받은 페데“근데 손전등은 똥을 싸지 않아서 좋아.”

 

밴드가 붙여진 무릎을 보여주며, “넘어진 거야?”세르히오가 물었습니다. “아니, 다리를 자르려고 그랬어. 근데 엄마 아빠가 내버려 두질 않아서.”

 

코고는 소리는 어쩌면 식인종 물컵이 할아버지를 물지 못하게 하려고 할아버지가 겁을 주는 소리인지도 몰랐습니다.

 

이빨에는 칼슘이 좋습니다. 왜 할아버지는 틀니를 우유에 답가 놓지 않고 물에 담가 놓으시는 걸까요.

 

학교에서 그림 그리는 시간, 해적을 꿈꾸던 페데와 마르가 그리고 세르히오는 모두 배를 그렸다. “페데랑 마르가 그리고 저는 좋은 해적이에요.”세르히오가 선생님께 말했다. 모름지기 꿈을 가진 자, 그림으로 그릴지어다. 엉뚱하고 호기심 많은 페데와 친구들은 자신들의 꿈을 그림으로 실현시켜 보였다. 그 날 오후, 욕조 안, 머리에는 비누 거품을 잔뜩 묻히고, 두 손에는 물에 젖은 앵무새를 들고, 어른 해적 같은 표정을 지으며 아빠를 바라보던 페데는 “진짜 해적”이 되었다.

 

30대 후반의 나는 이제 무슨 그림을 그려 볼까?

꿈이라는 게 있긴 있었던가...

한동안 흰 종이를 앞에 놓고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무슨 색연필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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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 설월화雪月花 살인 게임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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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그 첫 번째 이야기이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붉은 손가락>으로 먼저 접하게 되었다.

추리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붉은 손가락>을 읽는 내내, 가가 형사란 인물이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았었는데, 그 이유를 <졸업>을 읽고서 알았다.

가가 라는 인물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180의 키와 장대한 기골, 대학 검도부 전국대회 우승자.

이 설명만으로는 다가오는 임팩트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졸업반일 때의 가가로부터 시작하는 <졸업>에는 가가의 근간이 되는 가족 배경에서부터 친구관계, 사랑했던 연인, 다도 선생님으로 나오는 은사 등이 묘사되어 있다. 이런 중요한 부분을 빼먹고 사건 해결 경찰로서의 가가로만 보았으니, 가가가(^^) 제대로 그려질 리 없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흔들림 없는 냉철함, 인간에 대한 따스한 마음까지. 이 <졸업>이라는 청춘 미스터리물이 그의 매력이 발산되는 시초였던 것이었다.

뒤늦게 첫번째 시리즈를 읽었지만, 늦게 알아서 더욱 느낌이 새로운 것도 있고, 아~하! 하면서 터져나오는 감탄사의 연발도 꽤 읽는 재미가 있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대학 졸업반 시절, 아직 형사가 되기 전의 가가는 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찰이었으나,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생각한 가가는 ‘경찰이라는 직업은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교사와 경찰 중 진로를 고민하던 가가는 마사코라는 친구를 마음에 두고 결혼하고 싶다고 고백까지 하면서는 ‘가족의 구성원’이 될지도 모를 마사코를 위해서 경찰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교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이 <졸업>이라는 작품을 계기로 그가 경찰이 되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지만, 어쨌든, 경찰 아버지의 영향으로 알게 모르게 배어 있던 그의 습성이, 졸업을 앞둔 7친구 안에서 일어난 2건의 사건으로 발현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뭉쳐 다닌 7명의 대학 졸업반 친구들.

 

“너를 좋아한다. 결혼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졸업>의 첫 구절. 가가마사코에게 고백을 한다.

 

“이건 프로포즈가 아니야. 그냥 내 의사 표시야. 네가 누구를 좋아하건 누구와 결혼을 하건 그건 너의 자유지만 내 마음은 이렇다는 걸 알아줬으면 했어.”

 

캬~ 쿨하고도 깔끔담백하다. 실제 이런 고백을 받는다면 충격, 그리고 싸한 후폭풍이 몰려오겠지만, 뭐, 내가 받은 것도 아니니, 3자의 입장에서 보는 이 고백 장면은 달콤쌉싸름한 연애 드라마의 주요 장면에 다름 아니다.

7명의 친구들 중, 와코와 하나에는 연인 사이. 도도와 쇼코도 연인 사이. 나미카는 검도를 중시하는 집안의 딸로 자유분방한 성격.

 

어느 날, 도도의 연인 쇼코가 백로장, 자신의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손목이 그어진 채 피투성이로 발견된 쇼코.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 그 와중에 같은 숙소(백로장), 쇼코의 방 맞은편에 머물던 나미카는 범인을 찾아내겠다며 동분서주 한다. 7명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이던 미나미사와 선생님의 생일을 맞아 ‘설월화 게임’을 하러 모여든 그들에게 또다시 나미코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도 의식 도중 차를 마시던 나미코가 청산가리 중독으로 죽은 것. 단단한 우정으로 뭉쳐 있을 것 같던 친구들 사이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설월화 게임의 규칙상 가가의 연인인 마사코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기도 한다.

쇼코의 죽음에 의문을 품었던 나미코가 살해되자, 가가와 마사코는 힘을 모아 추리를 시작하는데, 중간 중간 긴장감이 느껴지는 둘 사이의 애정전선의 묘사도 자못 흥미롭다.

가가의 추리로 밝혀지는 친구들 사이에 얽힌 진실. 어느 누구의 단독 범행도 아니었으나, 쇼코와 나미코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되었던 친구들은 죄의식을 덜어버리지 못하고 한 명을 죽음을, 그리고 한 연인은 이별을 택하게 된다. 7명의 친구 중 3명은 사망, 2명은 연인 사이에서 이별을 선택. 그리고 남겨진 가가와 마사코.

대학 4학년의 그들은 이렇게 졸업을 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졸업이기도 하고, 우정에 대한 졸업이기도 하고, 청춘의 한 페이지에 대한 졸업이기도 하다.

그릇이 가득 차면 비우고 나서야 새 것을 채울 수 있다.

졸업.

남은 친구들의 가슴 속에 하나씩 어두운 기억이 들어차겠지만, 그것을 밑바탕으로 해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일구어 나가면 된다.

졸업과 새로운 시작은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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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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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2탄’

 

1탄에서 대학생 신분이었던 가가가 어떻게 교사를 포기하고 형사가 되는지, 그 이야기가 실려 있나 했더니만, <잠자는 숲>에서는 30대 신입형사로 등장해서 화려한 발레 무대를 배경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마흔여섯의 현역 최고령. 가장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 20대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CEO가 뽑은, 13시간 미국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히고 싶은 여성...독일 슈투트가르트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을 설명하는 짧고 굵은 문장이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냈다고 한다. 이건 어디서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20대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40대인 지금이 좋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정신력이라는 게 생겨서 그만큼 파워가 커지기 때문이란다. 예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경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얼마나 지독하게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어 왔기에 다시는 그 꽃같은 청춘을 누릴 수 있는 20대로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고민 없이 바로 내뱉을 수 있을까. 나무나도 유명한 그녀의 발 사진을 보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는 부분이다. 발레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 도대체 어떤 희생을 치러 지금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된 걸까.

밖에서 보는 발레의 세계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발레 학원에서 교습 받는 아이들조차 화려한 발레 튜튜의 색깔과 옷 모양에 반해서 시작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우아하게 뻗은 팔, 빙그르르 도는 아름다운 자태. 가볍고 높게 뛰어오르는 점프. 파트너의 팔에 의지해 사뿐 올라앉은 한 마리의 백조. 무대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의상을 입고 몰입을 해서 연기를 하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자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세계, 발레계는 아주 폐쇄된 곳이라고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오로지 연습하고, 공연하고, 자기를 갈고 닦는 곳이기에 몸 관리에서부터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고, 연습 외의 시간에는 제대로 만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정석으로 실력을 닦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빛나는 곳.

 

“드라마 같은 데서 프리마 자리를 노리고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촌스러운 스토리가 자주 나오죠? 근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댄서라는 건 춤에 대해서는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의 실력 차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법이에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이 춤을 춘다는 건 본능적으로 못해요. 그 역할을 갖고 싶을 때는 실력으로 겨룬다, 그것밖에 없지.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생존경쟁이 엄격한 세계라구요.”-201

 

그렇게 발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발레단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한 사나이가 밤에 발레단에 침입했다가 발레리나 하루코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물론, 하루코는 놀라서 화병을 내리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며, 화병으로 내리친 이후 자신도 기절해서 상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짜잔~ 이 사건에 우리의 가가 형사가 투입된 것이다. 윤곽이 짙은 얼굴에 역시 눈매가 날카롭고 강직한 듯한 인상의 가가 형사. 발레단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미오라는 발레리나를 인터뷰하던 가가는 옛날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역을 맡았던 무용수가 미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 흑조의 연기에 묘하게 빨려들어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미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발레, 재미있어요?”

“예, 재미있어요. ”라고 미오는 대답했다. “내 인생 전부예요.”

“부러운데요?”“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는 게. 그거만으로도 일종의 재산이겠지요?”-24

 

가가가 미오에게 마음을 준 그 순간부터 나는 미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제발, 그녀가 범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형사들은 직감과 눈썰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을 잘 판단한다. 그래서 ‘가가가 마음에 둔 그녀가 제발 범인이 아니어서, 가가의 마음이 상처 받을 일이 없기를’ 하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 빌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일어난 두 번째의 살인 사건은 발레단의 마스터이자 안무가, 연출가인 가지타의 돌연한 죽음. 무대 앞 좌석에 앉아 지켜보던 그가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미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의 마지막 총연습을 하던 중에 살해됐어요. 자세한 건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독살이야. 독극묵이 묻은 바늘에 찔렸어, 오로라 공주처럼.”-123

 

하루코를 연모하던 남자 발레리나 야기유가,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하루코의 무죄를 증명하겠다며 4년 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보려 하던 중, 가지타와 마찬가지로 니코틴이 든 음료를 마시려다 맛이 이상해서 뱉어내어 겨우 목숨을 구한 일도 연달아 일어난다. 두 살인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 가가가 추리를 하다 과거 뉴욕에 유학을 갔던 두 발레리나 아키코와 야스코의 존재를 알아내게 되는데, 가지타를 살해한 용의자를 야스코로 지목하고 찾아가 보니, 야스코는 이미 수면제 다량 복용으로 자살한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하루코가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한 사나이의 살인 사건.

 

“가가 씨, 혹시 <사랑의 시간>이라는 영화 아세요?”

“모릅니다.”

“어느 곳에 발레를 잘하는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그 소녀에게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하원의원에 출마하려는 신인 정치가인데, 소녀는 어떻게든 그가 선거에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호두까기 인형>총연습 때에 소녀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어서 엄청난 박수를 받아요. 내일이면 드디어 공연 무대에서 춤출 수 있다니 꿈만 같아-. 하지만, 돌아오는 지하철 안헤서 병이 났어요. 엄마 머리가 아파-. 그리고 소녀는 죽죠. 근데 남겨진 소녀의 일기장에는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젊은 정치가는 선거에 이기는 거예요.”“슬픈 이야기군요.”

“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소녀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었고, 자, 내일도, 하는 때에 죽었으니까요. 너무 어린 나이에 찾아온 죽음이 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댄서로는 최고의 죽음이 아닐까요?”-209

 

환절기에 빈혈이 잦다는 미오. 어느 비오는 날, 가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날을 암시하듯이.

세세한 스토리 묘사나 등장인물의 감정 등이 최대한 절제된 담담한 서술. 오로지 구성과 트릭, 가가의 이성적인 사고로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추리소설이 전개된다.

그리고, 기대하지 못했던 결말.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그는 플로리나 공주의 얼굴인 미오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댔다. 무언가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의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가가는 미오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343

 

묵묵히 사건의 진상을 찾아 추리를 하는 가가 이야기에서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이번 <잠자는 숲> 은 한결 어깨에 힘을 빼고 부드러운 표정을 한 가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라스트 신. “당신을 사랑하니까.”

꺄악~

 

무덤덤한 사나이의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여심을 뒤흔드는 것이 또 있을까.

가가처럼 직업이 경찰인 내 남자, 서도령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리지널 경상도 사나이. 직업 탓인지, 함께 산 세월이 10년이라 이제 열정이 사그라든 탓인지, 무슨 말을 하면, “그래서?”라고 말을 끊듯이, 혹은 피의자 신문하듯이 대꾸하는 탓에, 지금은 대화가 2분 이상을 넘기기 힘든 그런 부부 사이가 됐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고 자부하는 내 남자.

키도 180에 못 미치고, 카리스마도 가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결혼하자.”이 한마디만은 가가 못지않게 심플하고 대담하게 했던 남자.

10년 전의 프로포즈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잠깐 콩닥였다.

참, 주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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