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잠자는 숲>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 2탄’

 

1탄에서 대학생 신분이었던 가가가 어떻게 교사를 포기하고 형사가 되는지, 그 이야기가 실려 있나 했더니만, <잠자는 숲>에서는 30대 신입형사로 등장해서 화려한 발레 무대를 배경으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마흔여섯의 현역 최고령. 가장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 20대 여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CEO가 뽑은, 13시간 미국행 비행기 옆자리에 앉히고 싶은 여성...독일 슈투트가르트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을 설명하는 짧고 굵은 문장이다.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냈다고 한다. 이건 어디서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20대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로 40대인 지금이 좋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정신력이라는 게 생겨서 그만큼 파워가 커지기 때문이란다. 예전보다 더 짧은 시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경험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얼마나 지독하게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뛰어 왔기에 다시는 그 꽃같은 청춘을 누릴 수 있는 20대로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고민 없이 바로 내뱉을 수 있을까. 나무나도 유명한 그녀의 발 사진을 보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도 되는 부분이다. 발레만을 위해 살아온 그녀. 도대체 어떤 희생을 치러 지금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된 걸까.

밖에서 보는 발레의 세계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발레 학원에서 교습 받는 아이들조차 화려한 발레 튜튜의 색깔과 옷 모양에 반해서 시작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우아하게 뻗은 팔, 빙그르르 도는 아름다운 자태. 가볍고 높게 뛰어오르는 점프. 파트너의 팔에 의지해 사뿐 올라앉은 한 마리의 백조. 무대 조명 아래에서 화려하고 나풀거리는 의상을 입고 몰입을 해서 연기를 하고 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우리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자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세계, 발레계는 아주 폐쇄된 곳이라고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처럼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오로지 연습하고, 공연하고, 자기를 갈고 닦는 곳이기에 몸 관리에서부터 무엇 하나 소홀히 할 수 없고, 연습 외의 시간에는 제대로 만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정석으로 실력을 닦아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지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빛나는 곳.

 

“드라마 같은 데서 프리마 자리를 노리고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촌스러운 스토리가 자주 나오죠? 근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댄서라는 건 춤에 대해서는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의 실력 차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법이에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이 춤을 춘다는 건 본능적으로 못해요. 그 역할을 갖고 싶을 때는 실력으로 겨룬다, 그것밖에 없지.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생존경쟁이 엄격한 세계라구요.”-201

 

그렇게 발레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발레단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는 한 사나이가 밤에 발레단에 침입했다가 발레리나 하루코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물론, 하루코는 놀라서 화병을 내리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하며, 화병으로 내리친 이후 자신도 기절해서 상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짜잔~ 이 사건에 우리의 가가 형사가 투입된 것이다. 윤곽이 짙은 얼굴에 역시 눈매가 날카롭고 강직한 듯한 인상의 가가 형사. 발레단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미오라는 발레리나를 인터뷰하던 가가는 옛날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역을 맡았던 무용수가 미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 흑조의 연기에 묘하게 빨려들어갔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미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발레, 재미있어요?”

“예, 재미있어요. ”라고 미오는 대답했다. “내 인생 전부예요.”

“부러운데요?”“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는 게. 그거만으로도 일종의 재산이겠지요?”-24

 

가가가 미오에게 마음을 준 그 순간부터 나는 미오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제발, 그녀가 범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형사들은 직감과 눈썰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인상만으로도 사람을 잘 판단한다. 그래서 ‘가가가 마음에 둔 그녀가 제발 범인이 아니어서, 가가의 마음이 상처 받을 일이 없기를’ 하며 소설이 끝날 때까지 빌었다.

다카야나기 발레단에서 일어난 두 번째의 살인 사건은 발레단의 마스터이자 안무가, 연출가인 가지타의 돌연한 죽음. 무대 앞 좌석에 앉아 지켜보던 그가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미오가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공연의 마지막 총연습을 하던 중에 살해됐어요. 자세한 건 아직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지만 십중팔구 독살이야. 독극묵이 묻은 바늘에 찔렸어, 오로라 공주처럼.”-123

 

하루코를 연모하던 남자 발레리나 야기유가,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하루코의 무죄를 증명하겠다며 4년 전 뉴욕에서 있었던 일을 알아보려 하던 중, 가지타와 마찬가지로 니코틴이 든 음료를 마시려다 맛이 이상해서 뱉어내어 겨우 목숨을 구한 일도 연달아 일어난다. 두 살인 사건의 연관성을 찾아 가가가 추리를 하다 과거 뉴욕에 유학을 갔던 두 발레리나 아키코와 야스코의 존재를 알아내게 되는데, 가지타를 살해한 용의자를 야스코로 지목하고 찾아가 보니, 야스코는 이미 수면제 다량 복용으로 자살한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하루코가 정당방위를 주장하는 한 사나이의 살인 사건.

 

“가가 씨, 혹시 <사랑의 시간>이라는 영화 아세요?”

“모릅니다.”

“어느 곳에 발레를 잘하는 소녀가 살고 있었어요. 그 소녀에게는 존경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하원의원에 출마하려는 신인 정치가인데, 소녀는 어떻게든 그가 선거에서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호두까기 인형>총연습 때에 소녀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어서 엄청난 박수를 받아요. 내일이면 드디어 공연 무대에서 춤출 수 있다니 꿈만 같아-. 하지만, 돌아오는 지하철 안헤서 병이 났어요. 엄마 머리가 아파-. 그리고 소녀는 죽죠. 근데 남겨진 소녀의 일기장에는 내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그 젊은 정치가는 선거에 이기는 거예요.”“슬픈 이야기군요.”

“네, 하지만, 그래도 나는 그 소녀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놀랍도록 완벽한 춤을 추었고, 자, 내일도, 하는 때에 죽었으니까요. 너무 어린 나이에 찾아온 죽음이 슬픈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댄서로는 최고의 죽음이 아닐까요?”-209

 

환절기에 빈혈이 잦다는 미오. 어느 비오는 날, 가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날을 암시하듯이.

세세한 스토리 묘사나 등장인물의 감정 등이 최대한 절제된 담담한 서술. 오로지 구성과 트릭, 가가의 이성적인 사고로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추리소설이 전개된다.

그리고, 기대하지 못했던 결말.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그는 플로리나 공주의 얼굴인 미오에게 조용히 입술을 맞댔다. 무언가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의 입맞춤이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가가는 미오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343

 

묵묵히 사건의 진상을 찾아 추리를 하는 가가 이야기에서는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이번 <잠자는 숲> 은 한결 어깨에 힘을 빼고 부드러운 표정을 한 가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은 라스트 신. “당신을 사랑하니까.”

꺄악~

 

무덤덤한 사나이의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여심을 뒤흔드는 것이 또 있을까.

가가처럼 직업이 경찰인 내 남자, 서도령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오리지널 경상도 사나이. 직업 탓인지, 함께 산 세월이 10년이라 이제 열정이 사그라든 탓인지, 무슨 말을 하면, “그래서?”라고 말을 끊듯이, 혹은 피의자 신문하듯이 대꾸하는 탓에, 지금은 대화가 2분 이상을 넘기기 힘든 그런 부부 사이가 됐지만, 마음만은 따뜻하다고 자부하는 내 남자.

키도 180에 못 미치고, 카리스마도 가가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결혼하자.”이 한마디만은 가가 못지않게 심플하고 대담하게 했던 남자.

10년 전의 프로포즈 장면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잠깐 콩닥였다.

참, 주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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