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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너의 목소리가 들려>
봄인데, 바람이 많이 분다.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 벚꽃이 빨리 피고, 벌써 다 져버렸다. 더이상 흩날리는 벚꽃의 장관을 못 보겠지, 했는데, 이번 바람에 꽃잎을 틔웠던 꽃줄기가 맥없이 스러진다.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뱅글뱅글 춤을 추며 떨어지는 꽃줄기들의 향연.
바람이 우수수.
하는 통에
내 마음도 우수수다.
거기에 더해,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주인공 제이도 우수수...
원나라 말기의 항저우에서 있었던 놀라운 마술. 이븐 바투타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읽고 있다.
마술사는 사라진 어린 조수를 찾아 밧줄을 타고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잠시 후, 마술사 역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득한 하늘이 문득 무겁게 느껴진다. 허공을 우러르는 사람들의 목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저 높은 곳에서 어린 조수의 팔, 다리, 머리, 몸통이 차례로 떨어져내린다. 둔탁한 소리가 나고 신선한 피가 튄다...잠시 후, 양손에 선혈이 낭자한 마술사가 밧줄을 타고 다시 내려와 여기저기 널브러진 조수의 몸뚱이들을 화가 덜 풀린 얼굴로 양동이에 주워담는다 ...뭘 더 바라는 거요? 그런데 그때 마술사의 뒤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다. 양동이를 덮은 거적을 들추고 아이가, 마치 긴 낮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하듯, 눈을 비비며 걸어나오는 것이다. -8
섬뜩하면서도 놀라운 마술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끝날 때까지 이 마술의 여운을 그대로 품고 있다.
그 소년이 제이였을까...
읽기 전에 문득 궁금해졌고, 읽는 동안 내내 궁금하고, 다 읽고 나서도 끝내 궁금함은 풀리지 않았다.
목소리만을 남겨두고 홀연히 ‘승천’해 버린 제이.
수천 대의 버스가 엇갈리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어린 엄마의 몸을 통해 이 세상에 태어난 제이는 돼지엄마의 보호 아래 유년기를 보냈으나, 곧 버림받고 만다. 시설의 보호마저도 박차고 나와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거리 생활을 시작하는 제이는 특이함, 그 자체다.
어린 시절 선택적 함구증으로 말을 못했던 동규와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밖을 헤매던 목란이 제이를 그나마 가까이 겪어보았던 사람이다.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로 집과 가족이 있어도 제발로 걸어나온 동규와 목란.
그리고 처음부터 길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제이.
그들의 삶은 너무 아리다.
이야기로 풀어놓을라 치면, 책 수십권은 될 거다...하는 나의 삶도 그들의 삶 앞에선 그냥 쭈그러져 있어야 하는 조그만 보따리에 불과하다.
어린 시절, 내가 그렇게도 읽고 싶어하던 명랑소설 대신에, 아빠는 줄기차게 소년소녀 가장들의 생활수기 모음집을 그렇게 사다 나르셨다.
재미도 없고, 눈물만 나는 그런 책들을 왜 사다 나르시냐고...
어린 나이에 그런 책들을 읽는다는 건....정말 교육적이지 않다고, 소리쳐 말하고 싶었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아빠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만약, 만약에 아빠가 버팀목이 되어 주지 못한다 해도, 살아야 할 이유는 있다.’ 정도를 알게 해주고 싶으셨던 거겠지.
부모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으니, 문득 내 부모님이 생각나고, 내 아이들이 생각난다.
광복절 폭주를 뛰는 길거리로 내몰린 아이들아...집으로 돌아가거라.
이제, 너희들의 정신적인 지주, 제이는 없다.
“제이가 바로 저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
“요즘 들어 자꾸 제이 목소리가 들려요.”
“뭐라고 하는데?”
“새로운 말은 없어요. 예전에 걔가 했던 말이 마치 녹음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다시 들려요.”
“가장 자주 듣는 말은 뭐니?”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예요.”
“제이가 했던 말이지?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야?”
“뜻은 모르겠어요. 그치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제이가 저를 용서한다는 느낌이 들어요.”-246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길거리로 나와서 오토바이 폭주를 뛰는 아이들이나, 버젓한 의사니 교수니 하는 직업이 있어도 마음이 뿌듯이 채워지지 않아서 할리 데이빗슨과 가죽 점퍼로 차려입고 질서정연한 바이크를 하는 어른들이나....
마음 기대고 쉴 곳이 없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고스란히 드러난 소설을 읽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가정의 중요성.
만들기도 어렵고, 꾸려가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다.
제이같은 자유로운 영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뒤따라가서 동참하고 싶어지는 나약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어린 시절 제이의 가냘픈 등 뒤에 솟아난 날개가 날 자리같았던 뼈.
너는 천사였니, 악마였니?
부디...나에게는 제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 가슴 아픈 소설의 뒷장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