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꿨다. 꿈에, 토요일 낮이었고 직장이었는지 학교였는지 어쨌든 뭐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는데, 내 여행친구와 나는 함께 '집으로 가자' 했다. 지하철 역까지는 거리가 꽤 됐는데, 나와 친구가 있는 곳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고 그 밑으로 주루루룩 길게 놓여진 계단을 내려가서 또 걸어야 지하철 역이 나오는 걸로 설정 되어 있더라. 친구는 이 역에서 지하철 타는 거 어렵다, 자주 오지 않는다며 뛰자고 했다. 그러면서 내 앞으로 다다다닥 계단을 뛰며 내려가는 거다. 나는 뛰어가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친구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 때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내 남동생이 그러는데 KFC 에 이제 맥주 판대요."
그러자 친구는 "아 그래요?" 하더니, 그러면 우리 지금 바로 집에 가지 말고 KFC 가서 치킨에 맥주 하고 갈까요? 그러는 거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네!" 했는데, 아아, 그렇게 치킨을 먹기 전에 알람이 울렸고 나는 잠에서 깬것이다.
깊. 은. 슬. 픔.
오늘 아침은 유독 일어나기 힘들었는데 ㅠㅠ 눈을 뜨고도 한참을 꼼지락 거리다가 몸을 일으키며,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오오, 내가 꾼 것은 예지몽이었던가! 아니, 들어본 적도 없는 이런 노래가 나오는 거다. 노래 내내 치킨~ 양념 치킨~ ♪ 이러는 게 아닌가!
아아..아침부터 치킨 치킨하다...
페미니즘 관련서적을 읽을 때마다 너무나 괴롭다. 나의 지난 발언들, 행동들이 떠올라 몹시 괴롭다. 그때 내가 어렸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아도 괴롭다. 아아, 나야말로 진짜 빻은 발언들을 많이 하고 다녔구나.. 떠올리며 언급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빻고 빻고 또 빻았었어..... 괴롭다......
특히 이 책에서 '이유나'의 <성 정체성:여자인지 어떻게 아세요?> 부분을 읽을 때는 더 그랬다. 나도 청소년기에 이 책을 만났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런데 이 책을 만났다고 내가 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보며 말합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는 역시 달라, 딸은 역시 애교지, 이 맛에 딸 키운다, 남자아이라 극성맞은 건 어쩔 수가 없어." 어찌 보면 당연한 말처럼 들립니다. 이미 평생을 그렇게 길러져 왔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수줍음 많고 다정한 남자아이나 골목대장 노릇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아이가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일부의', '유별난' 아이들로 분류될 뿐입니다. '여자 아이의 것'으로 분류되는 특징과 '남자아이의 것'으로 분류되는 특징을 모두 가진 그냥 '아이'들도 결국에는 '여자아이여서 그래, 남자아이여서 그래.'라는 범주에 묶여 버릴 뿐이지요. (이유나, 성정체성,p.155)
한 개인이 남성이나 여성 또는 그밖의 성별이라고 스스로 인식할 때 성별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치마가 성별을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라면, 치마를 입고 싶고, 안 입고 싶고는 여러분의 성별을 판단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치마는 여자만 입는 것이라고 명확히 정해져 있으면, 여자인 여러분중 치마를 입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성별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이런 '혼란'은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여자와 남자라는 단 두 가지 선택 항을 차별적으로 구성해 온 사회에서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혼란을 느끼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어린 나이부터 남자 아니며 ㄴ여자라는 차별적인 이분법 속으로 들어가기를 강요받는가에 달려 있지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성별 분류에 시달리는데, 사회적으로 정의된 '여자'라는 성별에 자신이 얼마나 들어맞는지 생각해 보는 것은 몇 살부터 괜찮다는 걸까요? (이유나, 성정체성, p.157-158)
조카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면 제 삼촌과 몸으로 노는 걸 즐긴다. 이제 여덟살이 된 여자아이와 이제 다섯살이 된 남자아이 둘다 공격~ 파워~ 하면서 제 삼촌위로 올라 타고 주먹을 휘두르며, 남동생은 이얏~ 하면서 그런 아이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함께 노는 것이다. 여동생은 땀난다고 그만하라고 해도 애들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 혼자 상대하는 남동생이 힘들어서 '이제 그만하자'고 해도 아이들은 좀처럼 멈출 줄 모른다. 삼촌 힘들어 그만해~ 라고 주변에서 어른들이 말리면, 아니, 요놈들이, 이제 이모를 공격하자~ 하고 내게 달려드는데, 아아, 나는 걔네가 달려오는 것만 봐도 힘들어, 이모한테 하지마~ 이러면서 도망치기 바쁘다.
여덟살 여자 아이는 어제 유치원 졸업식이었는데, 장래 희망이 태권도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싶다는 거다. 의사와 과학자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는데(요즘도 그런 아이들이 많나??), 이 아이는 태권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했고, 우리 동네 자랑거리를 묻는 질문에는 태권도 학원이 있는 거라 했단다. 아 너무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권도에 잔뜩 재미를 붙여서는 태권도 선생님까지 하겠다고 하는 아이인데, 나는 이 아이가 이렇게 운동에, 자기 몸을 쓰는 것에 재미를 붙인 것이 무척 좋아 보인다. 제 삼촌을 공격하겠다고 처음에 폼을 잡을 때도 오오, 예전과는 달라졌다. 자세가 나온달까. 어쨌든 제 동생과 둘이서 힘차게 몸싸움 하며 제 삼촌과 논다. 그러다 혼자 노는 시간에 남자 조카는 변신 로봇을 갖고 놀고 그걸로 자기 혼자 1인극을 하다가, 변신이 잘 안되면 제 누나를 부른다. 누나~ 이거 변신시켜줘~ 하고. 그러면 제 누나는 달려와서 다다다닥 변신을 도와준다. 이럴 때 제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러는 거다.
확실히 남자아이가 달라...
??????????????????????????????????????????????????? 몸싸움도 같이 했는데, 변신 로봇도 여자조카가 더 잘 변신시키는데, 남자아이가...뭐가 다르다는 걸까? 누나는 장난감 미싱을 갖고 노는 그 순간에 동생은 변신 로봇을 갖고 놀아서, 그래서 '남자아이는 확실히 다르다'고 말하는걸까?
페미니즘에 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 쌓인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면서, 아아, 나도 그 때 그런 말을 했었지, 하고는 부끄러워지는 거다. 또한 불편해진다. 그냥 넘길만한 발언이 점점 줄어드는 거다. 다 거슬리는 발언들 뿐이야. 아아 기분 나빠, 왜저렇게 말하지..하는 상황이 너무 자주 발생하는 거다. 아니, 이전부터 그래왔는데, 그것이 왜 불편한지를 몰랐던것 같다. 이를테면 김치녀, 된장녀 같은 말들을 들었을 때, 그런 말들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되게 기분이 나빴던 거다. 처음 그런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빴을 때는 '나한테 그러는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이 여성을 혐오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내가 기분이 나쁜 부분에 대해 원인을 알게 됐다고 하는 게 맞을까(나는 요즘 나의 직감을 믿는 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점점 확신하고 있다). 원인을 모르면 고칠 수 없지만 원인을 알면 개선의 가능성이 보인다. 그러니 이 불편함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게 된다면, 불편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싫지만, 바꿔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열이면 열, 번번이 차별적인 시선과 대화 앞에서 그걸 고치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만 그 중에 몇 번은 언급하다 보면 지적 받은 당사자는 앞으로 발언할 때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내가 지난 과거에 내가 했던 발언들과 행동들에 대해 부끄럽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현재에는 완벽해졌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배우고 있고, 여전히 나는 어딘가에서 어떤 발언에서 실수를 하고 있을 것이다. 공부가 쌓이고 보이는 게 많아지면, 또 미래의 언젠가에 지금을 떠올리며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때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 더 생각하고 더 얘기하고 더 조심해야 겠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을 하고 살아가면서 정말 많이 '페미니스트가 왜그래?'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데, 나 스스로도 '페미니스트라며 이래도 될까?'하는 의문을 아주 많이 던지게 된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페미니스트를 욕보이는 거 아닌가 하고. 이럴 때 록산 게이가 '나쁜 페미니스트'를 들고 나와서 좀 편해졌었는데, 그렇다해도 내가 걷는 길이 매번 옳다고 확신할 수가 없다. 내가 실수할까봐, 내가 잘못할까봐, 내가 틀렸을까봐 겁난다. 옳은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들면 어떡하지? 고민이 많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에서 정희진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줬다.
페미니즘, 우리말로는 여성주의라고 하지요. 이 페미니즘은 아주 다양합니다. 1인 가족, 자녀가 없는 가족, 삼대 이상이 모여 사는 대가족, 이성애 커플이 아닌 동성애자 가족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가족이 있듯이, 페미니즘 이론도 한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최근 유엔 공식 기구나 인권 운동 진영에서는 가족(families)이나 페미니즘(feminism/s)을 복수형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는 100명의 여성이 있다면 100가지 페미니즘 이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들의 처지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지요. (정희진, 프롤로그, p.9)
내게는 좋은 친구가 많다. 우리는 대부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만, 그런 친구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들에 대한 의견은 종종 갈린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다 다른 게 맞을 것이다. 나는 내가 옳다는 방향으로 가면서, 또 친구들이 옳다고 하는 방향을 들어보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되겠다. 자꾸만 나는 '어디 하나 잘못하기만 해봐' 하고 딱 두고보며 대기하는 시선들을 마주치지만, 굴하지 않고 가겠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또 넘어지기도 하니까.
치킨으로 시작한 페이퍼이니 치킨으로 끝을 맺어야겠지만, 딱히 치킨으로 끝맺을만한 게 생각나지 않는군. 우먼스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고, 나는 집에 가고 싶다. ㅜㅜ
페미니즘은 여자와 남자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찬찬히 살펴보면 여자와 남자의 차이보다는 여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또는 인종과 인종 사이의 차이가 더 크기 때문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도시에 사는 디자이너 여성과 농촌에 사는 농부 여성, 팔순잔치를 앞둔 할아버지와 내일 중학교를 졸업하는 소년. 이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는 경험은 같은 성별이어도 너무나 다르지 않을까요? 페미니즘은 사람들 간에 무수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차이보다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훨씬 크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차이에 주목하기 때문에 차이가 커 보이지만, 공통점에 주목하면 공통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 모두 인간이고, 인간은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며, 모든 인간은 개성에 상관없이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아주 당연한 상식을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랍니다.(김고연주, 공동체 생활, p.40)
왕따 현상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는 듯합니다. 첫째는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에요. 둘째는 ‘왕따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왕따인 친구와 어울리다가 나까지 왕따를 당할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두려움입니다. 먼저, 첫 번째 원인을 들여다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생각은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차이는 다양성이고, 다양성은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라고요? 그렇다면 그 친구를 한번 떠올려 보세요. 목소리는? 말버릇은? 걸음걸이는? 취미는? 장래 희망은? 좋아하는 과목은? 성격은? 아마도 그 친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거예요.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친구의 여러 모습 중에서도 사회의 촘촘한 차별 기준에 따라 열등하다고 생각되는 모습이 더 쉽게 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김고연주, 공동체 생활, p.41)
"예쁜 것도 능력이야."라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예뻐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된 것입니다. 더 나은 외모는 자기를 향상시킨 증거가 되지요. 이런 식으로 여성을 옭아매는 시각은 외모의 문제를 개인의 노력, 능력의 문제로 돌려 버리고 외모 평가의 화살은 여성 개인에게로 향합니다. (김애라, 외모지상주의, p.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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