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었던 나는 같은 과 친구와 함께 비디오방을 찾았다. 그때 선택한 영화가 《잉글리쉬 페이션트》였는데, 어떤 영화를 볼까 친구랑 그 수많은 비디오 테입 앞에서 고민하며, 손에는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영화는 지루하고 재미없었다고, 친구랑 나오면서 그렇게 얘기했던 것 같다. 굉장히 유명했고 또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영화였던것 같은데, 내게는 내용에 대한 기억의 거의 없고 그 때 감동을 받았던 기억도 없다. 줄리엣 비노쉬가 부상당한 남자를 간호했고, 외국인과 섹스했으며, 랄프 파인즈가 불륜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드문드문 기억이 났는데, 그러나 쇄골에 대한 기억만큼은 선명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쇄골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속에서 랄프 파인즈는 사랑하는 사람의 쇄골에 흠뻑 빠져있었고, 그래서 친구에게 거기를 뭐라고 부르지? 라고 궁금해 묻는 장면이 나왔었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파티를 하는데 랄프 파인즈는, 사랑하는 여자의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에 키스를 했던 장면이 기억났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선명히 기억하는 부분이었다. 랄프 파인즈는 여자의 쇄골에 빠졌었다는 것. 나는 책을 읽으면서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책에서는 그 부분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책은 그러나 내 기억과 조금 달랐다. 나는 그가 쇄골에 흠뻑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니 그는 쇄골 사이의 움푹 파인 곳에 빠진 거였다. 그리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그곳의 명칭이 등장한다.



"매독스, 여자 목 아래 오목하게 팬 부분 이름이 뭔가? 앞부분. 여기. 이게 뭐지? 공식적인 이름이 있나? 엄지손가락으로 누른 정도의 크기의 오목한 부분."

매독스는 정오의 땡볕 아래서 나를 잠깐 바라보지.

"정신 차려." (p.213)



나는 그가 웃으면서 몸을 돌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결후 아래 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여기는 흉골상절흔이라고 하네."

그는 그녀의 목에 오목 팬 부분에 공식적인 이름울 주면서 떠나간 것이죠. (p.315)



흉.골.상.절.흔.



저런 용어가 있었구나. 영화속에서도 저런 명칭으로 나왔었는지 모르겠지만, 들었다 해도 까먹었을 이름이다. 지금도 책으로 읽었고 이렇게 페이퍼를 쓰고 있지만, 아마도 돌아서면 저 이름을 잊을 것 같다. 흉골상절흔 이라니, 맙소사. 전완근 까지는 외우겠는데, 흉골상절흔 이라니...



흉골상절흔...




'해나'는 간호사이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간호해줬던 사람이고, 지금은 한 영국인 환자를 돌보고 있다. 



"난 이제 죽음을 알아요, 데이비드 아저씨. 모든 냄새를 알고 그들을 고뇌에서 딴 데로 정신을 쏟도록 할 수 있는 법을 알아요. 주 혈관에 모르핀을 재빨리 찔러넣어야 할 때를 알아요. 식염수 용액을 주사하기도 하죠. 죽기 전에 창자를 비우기 위해서요. 빌어먹을 장군들이 내 일을 했어야만 하는데. 빌어먹을 장군들 모두가. 강을 건너기 전에 선수 조건으로 했어야만 했어요. 도대체 우리가 뭐길래 이런 책임을 져야만 하는 거였죠? 대체 우리가 뭐라고 나이든 사제처럼 현명해져야만 하고, 아무도 원치 않는 무언가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얼마간은 편안하게 해주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거죠? 나는 그들이 죽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었던 종부 성사의 말을 하나도 믿을 수 없었어요. 천박한 말들.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ㅇ한 인간이 죽어가는데 감히 그렇게 말할 수가!" (p.112)



이 부분을 읽는데,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 생각이 났다. 전쟁을 하자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 '리더'라고 했던 말. 그러니까, 그 전쟁속으로 들어가 총을 쏘고 또 부상을 당하고 치료를 하고 상처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사람은 국민이지 리더가 아니다. 그 말은 즉, 해나의 '이런 일을 장군들이 했어야 하는데'와 통한다.




"살육 병기의 개발은 적을 얼마나 멀리, 보다 간단하게 대량의 희생자를 내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맨손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는 날붙이를, 그리고 총기류를, 포탄을, 폭격기를, 결국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이런 식으로. 거기다 미국의 경우 이건 나라를 지키는 기간산업 중에 하나가 되었어. 그래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루벤스는 이런 연구를 접하고 나서 현재 일어나는 전쟁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전쟁 당사자 중에서 가장 잔인한 의사(意思)를 가진 인간, 즉 전쟁 개시를 결정하는 최고 권력자만큼 적으로부터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었다. 백악관에서 만찬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통령은 적이 흩뿌린 피를 뒤집어쓰지도, 육체를 파괴당한 전우가 내뱉는 단말마의 외침을 듣지도 않는다. 살인에 뒤따르는 정신적 부담을 거의 받지 않는 환경에 있다. 군대 조직이 이러한 형태로 진화하고 과학 기술 덕에 병기가 개선되고 있는 이상, 근접전에서 살육이 격렬해지는 것이 당연했지만 전쟁의 의사결정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대규모 공중 폭격을 명령할 수 있는 셈이다. (p.255)




전쟁이 얼마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이렇게나 많은 책이 말하는데도 여전히 전쟁중이라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능력없는, 적절하지 못한 리더가 얼마나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도 이렇게나 많은 책이 말하는데도 여기저기 적절하지 못한 리더가 '투표로' 뽑히는 것도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은 온통 이상한 것 투성이다...



책을 읽을 때면 으레 그렇듯이 이 책을 읽다가도 여러가지 생각에 빠지게 됐는데,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알고 뛰는 것은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어느 한 곳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여기에 오기 위해 그렇게 뛰었던 거구나, 하지.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뛰는 방향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늘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뛰지는 않고 있는데, 걷는 것이 내 성향에 잘 맞기 때문이다. 나는 좀 쉬기도 하면서 걷고 있지만, 내가 가는 방향을,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반은 온 셈이란 생각이 든다. 음, 너무 뜬구름 잡는 얘기 같구먼.



점심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아저씬 여자를 좋아했죠? 여자들을 좋아했잖아요."
"난 지금도 좋아해. 어째서 과거형으로 말하는 거냐?"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요. 전쟁이며 이런저런 일들이 있으니까." (p.77)

그는 결코 가정 생활에 익숙해진 적이 없는 중년의 남자다. 일생 동안 그는 영구적인 친밀감은 피했다. 이 전쟁 이전까지는 남편이라기보다는 연인에 맞는 남자였다. 그는 연인들이 혼돈을 떠나가듯이, 도둑들이 가난해진 집을 떠나듯이 쓱쓱 빠져나가는 남자였다. (p.157)

그는 이제 늙어버렸다. 갑자기. 그녀 없이 살아가는 데 지쳤다. (p.232)

그에게는 아무도 없다. 사막 때문에 진이 빠진 게 아니라 고독 때문에 진이 빠졌다. (p.232)

나는 이런 일들을 믿어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질 때면 우리의 영혼에는 역사가인 부분, 약간 현학적인 부분이 있어서 서로를 모르고 지나쳤던 만남이 있었음을 상상하거나 기억하지요. 클리프턴이 그보다 일 년 전 당신에게 문을 열어주었으나 필생의 운명을 무시했던 것처럼. 하지만 몸의 모든 부분은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 대비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모든 분자는 일어나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한 방향으로 뛰고 있지요.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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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6-12-14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잉글리시 페이션트.. 전 정말 재미있게 봤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독일에 지도를 넘겨주던 그... 친구의 아내인데 반해버려서.. 자꾸 애수(1999)랑도 겹쳐지고 그랬더랬죠.

그나저나 쇄골 사이 움푹 파인 곳 이름도 참 어렵습니다.

다락방 2016-12-14 17:19   좋아요 1 | URL
제가 영화 내용을 거의 기억을 못하는데요, 이 책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책과 영화가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만간 영화도 다시 보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나저나 꼬마요정님은 이걸 정말 재미있게 보셨군요! 저도 다시 보면 또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네요.

흉골상절흔..
안외워질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