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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젠더 ㅣ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남자친구'라는 표현 보다는 '애인'이라는 표현을 즐겨쓴다. 지금이야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보다 '애인'이란 표현이 더 권장된다는 걸 알지만, 사실 나는 그걸 알고 그렇게 즐겨 쓴 건 아니었다. 그저 애인 이란 단어가 내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거기에 '반드시 여자는 남자만을 사귄다'는 고정관념을 없애기 위한 걸 추가할 수 있겠구나 싶다. 나는 잘 해오고 있구나,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그렇게 친구랑 대화하다가 문득 내가 누군가에게도 '애인있어요?' 라고 물었는가, 라고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성친구(애인)의 유무를 묻는 건 실례인 것 같아 잘 안물으려고 하고, 혹여라도 호감가는 이성이 있어서 애인의 유무가 궁금하다면 빙 돌려서 묻는 편이긴 하다. 이를테면 '그 반지는 어떤 반지에요?' 라든가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나요?' 라든가(두 개의 질문 모두 호감가는 남자에게 물었었고 첫번째 질문에는 커플링 이라는 대답을, 두번째 질문에는 아내랑 함께 살고 있다는 답을 들었었다. 슬픈 이야기..sad story...) 그러나 직접적으로 묻는 경우도 더러 있었고, 그때 나는 거의 대부분 '여자친구 있어요?' 라든가 '남자친구 있어요?' 라는 식으로 물었던 것 같다. 아, 내가 '나 애인 있어요', '내 애인은' 하고 애인이란 표현을 즐겨쓴다고 해서 잘하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다른 사람에게는 습관적으로 '남자친구 있어요?', '여자친구 있어요?' 라고 물었었어..
나는 얼마나 많이 습관적으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까?
갈 길이 멀다.
정원(ftm)은 여성으로 취업한 후 업무와 관련 없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업무를 강요받고 봉급이나 승진, 일상적인 문화에서 차별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남성으로 취직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여성 상사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여성으로서 부당한 점을 이야기하면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남성으로서 여성 직원에게 강요되는 것을 바꾸자는 제안, 예를 들어 "자기 컵은 자기가 닦자"라고 하면 자신은 `자상한 남성`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결국 컵은 여성들이 씻는 것으로 정리되는 것을 보면서, 남성이 가지는 `평등`에 대한 공포는 여성에 의해서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 것을 참을 수 없을 때 나온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p.118-119, 나영정)
이성애 밖에 모르는 사회에서 동성애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성애적 틀에 갇히는 해석의 한계와 이성애적인 언어로만 묘사되는 표현의 빈곤함이 생기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이성二性으로 나뉜 인간들은 이성애異性愛를 하는 것이 이성理性이다` 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고는 성별이 남성인지 여성인지에 따라 마음을, 정체성을, 섹슈얼리티를 너무나도 쉽게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렇게 젠더에 구속되어 있는 섹슈얼리티는 끊임없이 동성애자에게 이성애를 모방한다는 혐의를 씌운다. 그리고 동성 간의 사랑은 이성 간 사랑을 아류로 만든다. 그러나 섹슈얼리티를 젠더에 구속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패러디이자 경쟁자로서 동성애를 본다면 어떨까. 그렇게 되면 주목받는 것은 더 이상 성별이 같은지 다른지가 아니다. 이제 무엇으로 상대의 마음을 끌리게 할것인지, 나한테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등 수많은 질문과 의심에 휩싸이는 것은 이성애자들일 것이다. (p.137-138, 한채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이성애자들이 서로 진짜 이성애자를 가려내려고 하는 모습, 남자들이 진짜 남성이 누구인지 증명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모습 말이다. 아마도 이 논쟁의 마지막 모습은 결국 아무도 원치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는 초라한 껍데기들만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지구 종말을 다루는 비극적 영화의 결말처럼 황량하고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 치열한 의구심 끝에 마침내 모두가 깨닫게 되길 바란다. 사실 `진짜`나 `원본`따위는 없다는 것을. 자신이 껍데기로 지목될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비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모두가 다 원본이라는 것을 말이다. (p.140, 한채윤)
공동체는 여성의 증여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지만 동시에 위계적으로 분할된다는 점에서 여성은 위험한 물건이다. 자본과 여자는 남성을 주인과 노예로 양분한다. 그것은 축적이 가능한 물건이기 때문에 남성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낭비/파탄의 경제`가 아닌 `축적의 경제`를 발생시키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수직적인 위계 구조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이를 통해 모두가 주인이었던 남성은 주인과 노예로 양분되는 운명에 처한다. 남성을 주인과 노예로 양분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과 자본의 축적은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런 공간들이 극단적인 형태로 마초적 언사를 반복적으로 수행하고 구성원들에게 그것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이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초들이 이 공간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이 공간을 통해 마초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계속)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이 항변하는 평등의 주체가 남자와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평등이란 남성들 `간`의 평등이다. 신자유주의와 양극화에 따라 남성은 자본과 여성을 소유할 수 있는 자들과 소유할 수 없는 자들로 나뉘었다. 현실의 이 세계는 여성과 자본을 소유할 수 없는 자들을 주인이 아니라-국민이란 말 그대로 나라의 주인이지 않는가?-노예로 만들었다. 여성의 교환과 소유를 통해 보장되던 남성들 간의 가정된 형제애는 심각하게 훼손되었고 그 결과 `남성` 사이의 연대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시급한 것은 이 남성들 간의 연대를 복원하는 일이다. 따라서 모든 남성들은 여성이 되어버린 `게이`들과 `초식남`을 처단하고 형제애의 공동체를 복구해야 한다. 그래서 이 공간에서는 끊임없이 군대와 군가산점에 대한 요구와 `꼴페미`들에 대한 처단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남자는 그 안에서 검증되고 만들어지고 수행되는 것이다. (p.155, 엄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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