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 살이 꽃잎이라면, 비늘은 물고기의 살
모든 살의 마지막 이름은 뼈 -어접린(魚接隣) 中
낯선 시어들도 어렵지만 하나하나 놓고 보면 어렵지 않은 단어들도 시 안에서 되게 어렵게 자리잡고 있는 걸 본다. 아니 그러니까 남들에게도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라, 내게 그렇다는 거다. 나무의 살이 꽃잎이라면 비늘은 물고기의 살, 같은 표현을 나는 도무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래서 이 연을 딱 읽고는, 아아, 이 시집은 나랑 친해질 수가 없는 시집이구나, 했다. 하아- 뭔가 머리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느낌이야...
그래도 어떤 시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어떤 시는 먼 데 사는 친구 J 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 시는 친구에게 닿았을까?
라고, 시집의 접힌 귀퉁이들마다 들춰보는데, 내가 무슨 시를 보냈는지를 모르겠네 -_-
바람의 지문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속눈썹의 효능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가는 봄과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건네준 사라므이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온 곳을 모르므로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눈에 든 꽃가루를 호- 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언제 헤어진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화농의 봄, 다래끼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음, 내가 편지지에 다래끼, 라고 쓴 기억은 없으니 적어도 위의 시를 보낸 건 아닌 것 같다.
기억의 체증
몸이라는 집에 잠시 머물다 떠날 것들
저마다 자리를 움트는 족족,
체증을 일으키고 있다
요사이 당신이라는 집에
세 들고 싶다는 나의 목소리가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서성이고
자주 식욕이라고는 텅 빈 잣죽 그릇과 마주했다
난감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피가 그런 걸 어떡해 라고 대답했었다
사혈(瀉血), 피를 흐르게 하다
기억처럼 긴 실로 엄지손가락을 묶는다
손톱 끈의 검게 갇힌 시간들을 지르는 바늘
맺힌 시간의 피돌기가 풀리며 건네는
피의 말이 멀리서 들릴까
귀에 머물지 않고 사라지는 그 말들의 뜻
동그랗게 말려 올라오는 검붉은 시간들
언젠가는 열망으로 맺히던 기억들의 끝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들의 전언
내 몸에 잠겨 있던 전언들이 피가 되고
그 피가 살이 되어 생의 피돌기로 살아 있다
검은 시간은 흘러 없어질 거라는 환한, 착각
울지 않기 위해 시간의 잇몸을 앙다물다
시시로 미치던 피의 순간이 있었다
기억의 체증에 오래 시달려야 할 것 같은 예감
바람을 숨으로 빚어내는 것도 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풀린다는 말이
꿈인 것만 같은 꿈
음...이 시도 내가 적은 시가 아닌 것 같아...
오래된 근황
내 지문을 기억하는 건 그의 지문이 아니다
깍지 낀 손의 기억이 식어가므로
아직 완성하지 못한 문장의 페이지가 아닐까
노트 속 마침표 대신 찍힌 지문들
급한 약속이 생각난 듯 내가 사라지면, 그는 간발의 차이
로 때를 놓쳐버린 손님처럼 지난 시절을 잠시 후회할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왔다는 후회는 쉽게 씌어진 문장과 같고
이번 생에선 마주치지 말자
일찍 이루어진 꿈, 서늘하겠다
노트의 시간이 멈추면, 주인을 잃은 내 책상 모서리는 혼자
닳아가겠지 불면의 베갯잇에 머리카락 몇 올, 검은 외투 안쪽 주머니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혹시 깜박 잊고 두고 간 마음 따위
그러나 근황 이어지다
사과 주름이 깊어질 때까지 바라만 보는 화가와 같이
하루 한 줄만 쓴다, 마침표와 지문 사이
문득 떠오른 어느 학자의 말
세상의 모든 책보다 숨겨놓은 포도주 한 병이 더 향기롭다
기억의 풍경이 기우는 동안
안부는 없고 오늘도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지문의 문장을 마치기에 이른, 먼
아, 위의 시 같다. 포도주와 향기..라는 단어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된다. 흣.
가끔 소식을 전하지만, 잘 지내나요?
조만간 당신의 우편함에 이 시가 도착할 것 같아요.
저는 잘 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