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비를 위로 치웠다.' 헤르브란트 바커르의 데뷔작 『그곳은 평화롭겠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단순하지만 참으로 뛰어난 첫 문장이다. - 헤트 파롤


이 책의 뒷표지에서 이런 추천사를 봤다. '아비'? 아비라니, 아버지를 말하는건가? 아니면 이름이 아비(Aby) 라는건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려나 싶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비가 아버지를 지칭하는 건 맞지만 그게 호칭으로서의 아비인지 이름으로서의 아비인지 아직 분간이 안된다. 



이 책은 네덜란드 소설이고, 그래서 나는 네덜란드 원서를 찾아 첫 문장을 확인해보면 금세 확인될 수 있을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마존닷컴에서 검색한 네덜란드 원서는 미리보기가 안되더라. 해서, 영어로 번역된 책을 찾아 첫 페이지를 봤다. 이렇게 되어 있었다.





아비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호칭이 맞았다. 아직 이 책의 50페이지까지 밖에 읽지 않아서 왜 굳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않고 아비라고 하는지, 영어에서는 father 로 번역했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아비'라고 번역한건지 그 이유를 갸웃해하며 생각해본다. 아버지를 아비라고 칭해야 할 이유.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아비'는 '아버지의 낮춤말' 이라는데, 어쩌면 굳이 낮춤말을 써야 했던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은 아버지를 현재, 50페이지까지에서,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홀대하고 있으니까. '배고파' 라는 아버지의 말에 '가끔은 누구나 배가 고파요' (p.16) 라고 대꾸하고 '목말라' 라는 아버지의 말에 '가끔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p.21) 라고 대꾸하니까. 그 홀대의 의미에서 굳이 아비라고 번역했을거라 짐작은 하지만, 굳이 그래야 했던걸지는 모르겠다. 네덜란드 원서에도 아버지를 낮춤말로 표현했을까? 여튼 읽는데 아비 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툭툭, 걸린다. 그리고 '위로 치웠다'고 되어 있는데 위층으로 옮긴거니만큼 '위층으로 치웠다' 고 쓰는게 낫지 않았을까. 난 위로 치웠다고 해서 침대를 반으로 갈라 윗쪽에 놨다는 줄 알았다, 처음엔. 그러나 위층으로 옮긴거였다. 



내가 이 소설을 어떻게 알게된건지를 모르겠다. 내가 이 소설을 어떻게 알고 읽으려고 사둔거지? 그건 기억나지 않지만, 그리고 '아비'가 자꾸 소설에서 나를 튕겨져 나오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오랜만에 만나는 꼭꼭, 천천히 씹어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다. 차악- 가라앉은 분위기, 비밀스런 무언가가 그 가라앉은 분위기에 숨겨져 있을거란 어렴풋한 짐작.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천천히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게다가 네덜란드 소설이라니, 이 얼마나 낯선가! 모르는 단어, 모르는 문장들마다 친절하게 붙어있는 페이지 하단의 주석은 이 책을 한층 더 재미있게 만들어준다. 나는 사실 소설을 읽으면서 굳이 주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모르면 모르는채로 넘어가도 괜찮은거라고 생각하는 편이라 띄엄띄엄 읽긴하는데, 네덜란드라는 아주 낯선 나라, 그 나라의 풍경에 대한 주석은 아주 흥미롭다.



길을 뺑 돌아 양들의 방목장으로 가서는 양들의 숫자를 세어본다. 암양 스물세 마리, 숫양 한 마리, 모두 모여 있다. 빨개진 암양들의 엉덩이를 보니, 숫양을 치울 때가 된 것 같다. (p.18)



위의 문장에 주석이 달려 있는데 그 주석은 이렇다.



* 양들의 번식을 위해 매년 가을 숫양 한 마리를 빌려 암양들과 교미시키는데, 숫양의 배에는 빨간색 스탬프 통이 채워져 있어 숫양이 암양과 교미를 하면 암양의 엉덩이에 스탬프가 찍힌다. (p.18)



앗. 신기하다. 재미있다. 만약 내가 언젠가 네덜란드에 가게 된다면, 양목장을 방문해 암양의 빨간 엉덩이를 보게 된다면, 나는 그 때 아마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저 양, 좀전에 숫양과 교미했구나, 하고. 

또 있다.



"신터클라스 파티 했으면 좋겠어." 아비가 말한다. (p.20)



신터클라스? 나는 이 문장의 이 단어를 보자마자 이것은 '산타클로스'의 오타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자꾸 '신터클라스'라 나오고 역시 내가 궁금해할 걸 알았는지 주석이 달려있다.



* 매년 12월 초면 스페인에서 신터클라스가 선물을 가득 실은 배를 타고 흑인들과 함께 네덜란드로 오는데, 네덜란드 사람들은 12월 5일이면 이 신터클라스가 집 안의 굴뚝을 타고 내려와 선물을 두고 간다고 오래전부터 믿어왔다. 매년 12월 5일은 축제일로 네덜란드 가족들은 신터클라스를 기념하기 위해 선물과 직접 지은 시를 주고받는데, 여러 명의 가족들이 파티를 하는 경우에는 누가 누구에서('누구에게' 로 고쳐야 할듯) 시와 선물을 줄 것인지를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제비뽑기 결과는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야 알 수 있다. 신터클라스는 성 니콜라스라고도 불리며,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 전통은 미국으로 건너가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은 산타클로스를 신터클라스의 변종으로 간주하여, 신터클라스와 산타클로스를 각각 달리 칭하고 동일시하지 않는다. 네덜란드의 신터클라스는 12월 5일에 오고, 산타클로스는 크리스마스 때 온다. (p.20)



오오! 재밌다. 신터클라스는 산타클로스의 오타가 아니었어!! 게다가 네덜란드 사람들은 산타클로스를 변종이라 간주한대. 오오. 이 책이 이 때부터 재미있어진 것 같다. 앞으로 읽다가 내가 모르는 네덜란드에 관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주석으로 보여질까, 그걸 알고싶다는 생각이 막 드는거다. 물론, 주인공이 왜 아버지를 홀대하는지, 그 홀대의 배경은 어떤것이었는지, 이 가라앉은 분위기와 그 분위기 속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천천히 읽고 싶어지는 소설을 만나서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 부디 끝까지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구글로 이 책의 네덜란드 원서를 검색하려다가, 오, 이 책이 작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됐다. 그러자 이 책을 어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끝까지 재미있을까? 





아 무척 기대된다, 이 책의 책장을 덮는 그 순간이. 내가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이 가라앉은 분위기가 결국은 나에게 묵직한 감동을 주게 될까? 나는 읽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게 될까? 나에게 어떤 느낌들이 찾아들지, 어떤식으로 나를 후려치게 될지 알 수가 없어 설레이고 기대된다. 나는 오늘 기차를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갈건데, 그 기차 안에서 이 책은 내 좋은 친구가 되어주겠지. 부디 퇴근후 피곤에 쩔어 쿨쿨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 밤엔 광어회와 화이트와인을 앞에 두고 친구들과 실컷 수다를 떨어야지. 건배, 하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해야지. 그나저나 알라딘에서 계속 문자가 온다. 주문한 상품이 배송되었다부터 시작해서 중고등록 알림문자 까지...아아- 중고등록 알림문자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나는 여전히 판단할 수가 없다.



울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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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기후 2014-02-1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다락방님의 서재로 들어와서 저 첫 문장을 마주하는 순간 근친을 떠올렸어요. 일을 끝낸 후 위로 밀어버린 건가.. 했다는. ;; 난 쓰레기 변탠가봐요... 아니면 어제 읽은 <작가란 무엇인가>의 이언 매큐언 인터뷰 때문이던가. ㅡ,ㅡ

네덜란드는 재미있는 나라네요. 가보고 싶다 ㅜㅜ 전 이번 올림픽 중계를 한 번도 안 보다가 어제 이상화 1,000m 경기를 봤는데, 해설자가 막 한탄하더라고요. 네덜란드가 우리나라 빙상 기술을 다 빼가서 메달을 휩쓸고 있다고. 히딩크 데려와서 월드컵 4강했던 건 뭐냐 하고 피식 웃었는데... 암튼, 다락방님은 크로아티아에 이어 가고 싶은 곳이 한 곳 더 생긴 건가요? 나도 다른 나라 좀 몸으로 느껴보고 싶은데... 돈과 시간이 같이 받쳐주는 날은 대체 언제쯤 올까요? ㅎㅎ ㅜ

다락방 2014-02-17 10:03   좋아요 0 | URL
이언 매큐언의 소설은 어이쿠야, 워낙에 하드하지요. 그런 작가의 인터뷰를 읽고 이 글을 보셨다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근친, 떠올릴 수 있는 겁니다.

저도 네덜란드 가보고 싶은데 또 막상 닥치면 무서울 것 같아요. 낯선 나라니까..전 아무래도 익숙한 걸 선호하는 것 같아요. 변화를 싫어하고 모험을 꺼려하는 수줍은 다락방인거죠. ㅋㅋㅋㅋ 돈과 시간이 같이 받쳐주는 날은 올 리가 없습니다. 안오죠. 그럴라면 로또 당첨되든가 해야하는데 그건 흥, 내게는 오기 힘든 일이고 재벌집 남자가 나에게 푹 빠지는 일도 있을 수 있겠으나, 흥, 이것 역시 로또 당첨만큼의 확률인거죠. 역시 빚내서 다녀오는게 답입니다. 다녀와서 뼈빠지게 일해 갚는 수밖에...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