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을 읽기 시작했다.

삽화가 있는 이 책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수시로 삽화가 나오는 것도 좋고 주석이 바로 해당 페이지 아래에 있는 것도 좋아서 이 책 읽기로 정착할 것 같다. 무척 마음에 든다. 민음사 신곡, 미안... 아무튼 이 책 좋아. 이 책은 좋지만 단테는 좀 읭? 스럽다.


자, 시작은 지옥편이다.

35세의 단테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저승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 자신이 살아있는 몸으로 저승을 여행해도 될지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단테에게 베르길리우스는 걱정하지 말라며, 천국에서 너를 안내해주라는 명을 받고 자신이 도와주러 왔노라 한다. 천국에서 내려와 베르길리우스에게 단테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다름 아닌 베아트리체라는 게 아닌가.


네?


그러니까 나는 단테 하면 바로 베아트리체를 떠올릴 정도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간 읽어온 책들을 통해 단테가 베아트리체랑 연인으로 사랑한게 아니라 혼자 바라만보는 짝사랑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고,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그게 뭔지 기억이 안난다) 단테랑 베아트리체는 사귄 적도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단테, 하면 베아트리체가 따라나올까, 어떻게 짝사랑만으로 바로 연관되는 사람이 됐을까, 불같은 사랑을 하다 파멸을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해프닝 이라든가 어페어라든가, 뭐가 없는데 어떻게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여인,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먼 훗날의 나조차도 알게된거지? 내가 모르는 그들 사이에 뭔가 있나, 정도만 생각했다가, 아아, 신곡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 의문이 풀린다. 단테는 자신의 작품인 신곡에 베아트리체를 등장시켰던 거다. 그것도 무려 천국에서 내려온 사람으로.


마이


하아- 

나는 그래서 좀 검색을 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베아트리체랑 단테는 사귄 적이 없다-이 틀린건지, 짝사랑한 여자를 천국에 있는 여자로 묘사한게 정말 맞는지.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단테 1265-1321

베아트리체 1265-1290


단테는 베아트리체가 죽기 전까지 9년간 딱 두 번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끓어올라 그녀를 잊지 못하고, 1308년부터 쓰기 시작한 신곡에 그녀를 천국의 여인으로 등장시켜 버린거다.


와...

나는 일단,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9년간 단 두 번 봤지만 사랑하는 일,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다.

나도 그런 적 있었다. 2년간 세 번 봤나 그랬는데 인생의 남자가 되었던 그런 경험이 있다. 그러니까 본 횟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것과 별개로 사랑하는 마음은 한없이 커질 수 있다는 걸 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처음보았던 순간이라든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보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을 글로 쓸 수도 있다. 좋은 영감이 될 것이다. 만났을 때의 기쁨과 언제 볼지 모르는 기대도 다 글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녀를 천국에 있는 것으로 그리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단테는 결혼도 하고 아내도 있었다는데 자신이 짝사랑했던, 그러나 결코 사귀지 않았던 여자를 천국에 있는 영혼으로 묘사했다는 건, 무얼 말하는걸까. 나는 이것이 단테가 베아트리체랑 실질적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성녀화 시킨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그러나 내가 겪어보진 못한 그녀-는 분명 성녀일거야. 이건 진짜 대놓고 너무 성녀로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나는 허공에 매달린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데, 아름답고 축복받은 여인이

나를 불렀고 나는 그분의 명령을 기다렸지 -제2곡 54


여기서 아름답고 축복받은 여인이 베아트리체.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 아니 그냥 알았던 여자를 작품을 통해 축복할 수도 있겠지만, 천국에서 왔다니까? 



지옥의 첫단계 가장자리 '림보'에는 숱한 예술가들이 나온다. 거기엔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들도 등장한다. 그러니 단테가 신곡에 베아트리체만 등장시킨 건 아니다. 단테의 생각만으로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있는 것도 별로지만, 그런데 천국의 여인이라니, 이건 너무 이상하지 않나.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현재라면, 이거 진짜 너무나 문제 많은 작품이 될 것 같은데? 단테 신곡 읽고 지옥편 그림 그리는 사람들도 많고 또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순전히 단테의 기준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에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천국에 있다? 물론 글을 쓰는 작가가 자신이 그리는 인물을 어떤 상황에 놓을지 결정하는 것이겠지만, 베아트리체 잘 모르잖아. 베아트리체가 지옥의 입구 혹은 그 밑, 그 밑으로 들어갈 잘못을 품고 사는 사람일 수도 있잖아? '그 여자는 그럴 리 없다'는 단테 머릿속의 베아트리체가 신곡에 있는게 아닌가. 나는 김 숨의 소설, [당신의 신]이 생각났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p.64)
















나는 단테에게 말하고 싶었다.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구원자가 아니야! 그녀는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산 것도 그리고 죽은 것도 아니야. 당신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혼을 원한다는 그녀의 요구를 그는 번번이 묵살했다. 혀가 꼬이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온 날 밤, 마침내 따지듯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그게 그거 아닌가?"

"억지 부리지 마!"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p.58-59)



김숨의 소설에서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구원자로 삼고 그녀가 이혼하자고 하자 그건 자신의 영혼을 버리는 거라고 억지를 쓴다. 자기 멋대로 신으로 만들고 자기 멋대로 그 신이 나의 영혼을 내팽개쳤다고 말하기. 이것과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다른 것 같지 않은거다.


모르겠다. 베아트리체의 입장은 어떨지.

베아트리체가 이미 죽은 뒤에 저 작품이 쓰여졌고 발표되었으니 베아트리체 본인은 자신이 작품속에서 어떻게 그려졌는지 알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녀가 살아있는 중에 이 작품이 나왔다면,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람들이 모두 나랑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또 지금으로부터 몇백년전의 일이니, 베아트리체는 나와는 달리 단테의 소설에 천국 여신으로 등장한 걸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시대적 배경이 지금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그걸 좋아했을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훗. 그 사람은 나를 성녀로 만들어줬지, 나를 등장시켰어, 그거 내 얘기야, 라고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다. 누가 나를 신으로 생각하는거? 질색팔색이다. 



자, 이제 지옥 얘기를 해보자면,

지옥의 첫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누굴까?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고 비록 업적이

있더라도, 네가 믿는 신앙의 본질인

세례를 받지 않았으므로 충분하지 않다. -제 4곡 36



허허..그것참.. 단테의 신곡이 불신지옥의 기원인가.. 명동 가면 가끔 사람들이 길에 서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외치는데, 그러니까 내가 굳이 죄를 짓지 않아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그들은 외치잖아? 그런데 단테가.. 그랬네요. 지옥의 첫단계에는 죄를 짓지 않았어도 신앙을 갖지 않으면 오게 된다... 불신 지옥이네요. 오 마이 갓.. 


네..

불신 지옥의 기원.. 이십니까, 단테여!!



제6곡까지 읽었는데, 지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언급했듯이 거기엔 우리가 익히 아는 이름도 있지만(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 등등) 생소한 이름도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세미라미스'인데 각주에는 이렇게 설명되어있다.



세미라미스Semiramis(B.C. 1356~B.C.1314). 그녀는 아시리아의 니노스 황제의 부인이었고, 니노스가 죽자 정권을 장악하여 페르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였다. 온갖 음란함을 일삼았으며 심지어 자기 아들과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비난을 받자 욕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법률로 합법화하기도 했다. -p.63



오와 정권 장악에 온갖 음란함?? 근친상간에 법 고치기?? 너무 궁금해져서 세미라미스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 어려서부터 비둘기에 의해 교육받았고(네?) 비둘기가 되어 승천했단다. 대단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았으면 또 비둘기로 승천도 해보고 그래야지. 하하하하하.



아무튼 지옥에 있는 사람들 구경하고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지옥에 있었겠구나 싶다. 지옥에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중 1인이 나였을거야. 휴...



자, 계속 읽어보자. 계속 읽다보면 나는 내가 지옥이 아니라 연옥에 있을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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