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의 죽음으로부터
플린 베리 지음, 황금진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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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는 주말이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언니 레이첼의 집에 놀러간다. 원래 가기로 했던 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언니네 집에 언니를 만나러 가는 건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이다. 그런데 언니가 역에 마중 나와 있질 않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언니네 집에 도착한 노라는 거기에서 언니가 키우던 개가 잔인하게 학살당한 걸 목격하게 되고, 놀랄 틈도 없이 언니의 시체도 마주하게 된다. 그 후부터 노라는 언니를 죽인 살인자가 누구일지 제 손으로 꼭 잡고 싶다고 생각하며 언니 집 주변을 관찰하고 이웃 사람들을 따라다닌다.


언니 레이첼은 십대 시절 파티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에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 새벽 시간이라 주변에 사람이 없었고 그 남자는 갑자기 나타나 폭력을 심하게 가한 뒤에 사라진 것-아마 우리나라 뉴스라면 묻지마 폭력이라 칭했을 것이다-. 레이첼은 그 뒤로 몇 년간 그 사람을 찾아 헤맸다. 경찰에서 체포해주지도 않았던 남자, 그 남자를 찾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응징하고 싶었기에. 그러나 그로부터 십년 이상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남자를 잡지 못했고, 언니와 그 남자를 찾아내고 잡는 것을 함께 했던 노라에게 언니는 언젠가 이제 그 일을 그만뒀다, 이제 그 일이 없던 것처럼 살자, 라고 말했더랬다. 어쩌면 언니를 살해한 건 그 남자일까? 언니가 그 남자를 찾아낸걸까? 언니는 나에게 남자친구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남자가 있었던걸까? 언니와 결혼까지 약속했던 그 남자에겐 알리바이가 있나? 경찰은 모든 용의자들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진걸까?



영화 《더 컨덕터》는 지휘자가 되길 꿈꾸는 여자 '안토니아'가 등장한다. 뉴욕필 하모니 최초의 여성 지휘자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라는데, 안토니아가 베를린에서 지휘를 공부하고 지휘자가 되기까지도 여자라서 힘들었고 주변 사람들 모두 그녀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베를린에서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하며 지휘자의 길을 열심히 밟고 있던 중에, 베를린 오페라 지휘를 최초로 한 여성이 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여성은 남편의 기부금으로 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게 된거였고, 그 공연은 사람들의 야유와 환불요청으로 마무리 되며, 다음날 신문 기사는 '역시 여자는 지휘자가 될 수 없다'고 실린다. 뇌물과 실력없음으로 그 자리에 섰던 '그 여자' 한 명은 그 사람으로 평가되기 보다 '여자 전체'를 대표하게 됐다.이 기사를 보여주며 안토니아의 스승은 '이게 앞으로 너에게 일어날 일'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마주치게 된다. 사소하게는 사무실에서도 생긴다. 여자들은 잘못하면 울기나 하고, 라는 말 따위 듣기 싫어서 화장실이나 비상구 계단에 가 우는 일도 생기지 않는가. 여자들은 야근 안하려고 하잖아, 여자들은 힘든일 안하려고 하잖아 등등, 한 사람의 어떤 특징은 그 사람 개인의 일이 되기보다 전체 여자에 대한 대표성을 띠기 때문에 여자들은 행동에 제약을 받는다. 내가 여기서 이러면 또 여자들은~ 이라는 말이 나오겠지.



한 여자가 개인으로 인정받기보다 전체 여자의 대표성을 띠는 것처럼,

한 여자의 행동 하나, 혹은 잘못 하나는, 그 여자 자체를 표현하는 대표성을 띠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레이첼이 폭력을 당해 온 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고, 피를 흘리고 경찰에 신고했을 때 경찰은 '술을 마셨냐', '그 시간에 거긴 왜 갔냐' 등으로 마치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폭력을 유도한 것처럼 얘길한다. 감옥에 혹시 가해자일지도 모를 사람을 만나러 갈 때 배꼽티를 입은 언니가 노라는 영 못마땅하다. 여기에서 주는 인상이 언니 자체를 '그런 여자'로 볼까봐. 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드러나는 한 면으로 '그런 여자'가 되어버리곤 하니까.



노라는 언니를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고 경찰에 얘기했지만 경찰은 믿지 않았다. 이웃집 남자가 영 의심스러운데 결국 그 남자가 언니와 불륜관계였던 걸 밝혀낸 것은 노라의 끈질긴 추적과 그로 인한 아내의 의심이었다. 노라는 이제 언니를 죽인 용의자가 되었다. 노라가 언니랑 싸웠던 시간들이 분명 있었고(많았고) 언니가 동생을 나쁜년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으며, 남자 취향도 같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노라가 언니를 죽인걸까?



언니의 살인자를 찾는 게 이 책의 내용인지라 때로는 집요하게 느껴진다. 언니가 살해당했으므로 동생이 제정신일 리 없지, 편집증적이야, 라는 생각도 나도 모르게 들게 된다. 그러나 읽을수록 한 여자 개인이 여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한 여자가 지닌 어떤 면이 그 여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언니는 유부남과 잤고, 때로 배꼽티를 입기도 했지만, 그러나 언니는 폭력을 당한 여자에게 연대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그렇듯이. 병원에 찾아온 여자의 상처가 교통사고의 상처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던 사람이었고, 그 여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상황에서 피해자를 구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자, 그렇다면 레이첼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한 명의 여자가 어떤 실수로 인해서 혹은 어떤 잘못으로 인해서, '그런 여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여자'라고 칭하기에 그녀는-여자 한 개인은- 아주 다른 많은 면들을 가지고 있다. 가까이서 늘 자주 만나는 동생이 그 누구보다 알고 있는 면들이 많지만, 그런 동생조차도 몰랐던 면들이 그녀에게 있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그리고 스스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게 그 여자 한 개인이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여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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