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에 전쟁 포로로 잡혀가 철로를 건설해야 했던 연합군 포로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잠도, 휴식도 주어지지 않았다. 말라리아, 각기병등 각종 질병에 노출되어 점차로 죽어갔지만, 그러나 일본군은 그들을 계속해서 학대하며 노동하기를 강요했다. 장교이며 의사였던 '도리고 에번스'가 전쟁 전에 살았던 삶, 그리고 이 포로로 지냈던 삶, 전쟁 이후의 삶에 대해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것도 그리고 전쟁 포로의 삶에 대한 것도 읽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 책장은 아주 느리게 넘어갔다. 전쟁에 대한 글을 읽노라면, 대체 전쟁을 왜 하는걸까 하는 의문만 이백번쯤 들곤 한다. 신념이란 무엇인가. 어째서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게 한다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모질게 고문하고 학대할 수 있는 것일까, 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인생이란 무엇인고 인간이란 무엇일까.
도리고 에번스는 오래 전에 헤어진 고모부를 휴가중에 찾아가게 된다. 그 때 그는 이십대의 청년이었고 결혼을 약속한 여자 '엘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모부의 아내에게 빠져버리게 된다. 고모부의 아내라면 고모여야 하겠지만, 고모가 죽고난 후 고모부가 재혼한 여자였다. '에이미'. 그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군에 있으면서 휴가를 주면 엘라를 찾아가는 대신 에이미를 찾아간다. 인생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일까, 를 생각하면서 읽다가 어쩔 수 없이 생각한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빠질까. 왜 이미 결혼해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빠질까. 뭐가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러니까 결혼을 약속한 사람에 대한 내 선택이, 결혼할 상대를 고른 내 선택이 잘못이고 실수였을까. 왜 지금 이 사람을 좀 더 빨리 만나지 못했을까 왜 이렇게 모든 걸 바꾸기엔 좀 늦어버린 시점에 이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을까. 내가 당신을 사랑할 거였다면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그런 상태에 있으면서 나를 찾아온걸까. 인생이란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리고 에번스는 분명 엘라를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결혼할 생각까지 햇었는데, 에이미를 알게된 후에는 엘라에 대한 감정들이 시들어진다.
예전에는 아름답고 이국적으로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 보였다. 처음엔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검은 눈이 지금은 암소처럼 경솔하게 남을 믿어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래도 자꾸 생각이 났기 때문에 점점 더 심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그래서 새로이 결심을 다지고 그녀의 품에, 그녀와의 대화, 그녀의 두려움과 농담과 이야기에 자신을 던졌다 이런 친밀함이 궁극적으로 에이미 멀베이니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짓눌러주면 좋을 텐데. ( p.143-144)
아, 너무 싫다. 자신이 흠뻑 빠진 여자를 잊기 위해, 기억을 짓누르기 위해 지금 이 여자에게 충실하력 억지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 엘라가 그걸 모를까. 내가 엘라였으면 그걸 모를까. 내가 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간절하게 바라보는 것을 내가 모를까. 그럴 때의 내가 당신에게 그냥 그 사람에게 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이잖아,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결코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 싫으면 그렇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시선을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걸까.
놀랍게도, 아주 놀랍게도, 엘라는 단 하나의 거짓말로 그에게 평생 복수를 했다. 그것은 이 소설의 끝에 나오는 것이고,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아,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사랑 때문에 어떤 것까지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집착 때문에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는가. 나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거짓말을, 엘라가 했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그 거짓말을 한 엘라를 욕할 수가 없다. 그것이 그 때 엘라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도리고를 제옆에 두기 위한 최선의 방법.
호주의 산불에 대한 소식으로 답답한데, 이 책에서도 호주 산불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야기의 배경이 호주인데 도리고의 아내가 머물고 있는 집에 산불이 나는 것. 도리고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출발한다. 책장을 덮고 생각했다.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연이란 무엇이고 운명이란 무엇일까. 뉴스에서도 볼 수 있는 지금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째서 나는 소설 속에서도 그대로 만나야 하는 것인가. 이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런 우연은 도대체 왜 일어나는 것인가. 안부를 전할 수 있는 사이라면, 지금 호주에서 당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을 수 있을텐데. 괜찮은건지, 거기에서 당신은 괜찮은건지.
책의 모든 내용들이 힘들어서, 책을 읽는 게 힘들었고, 그래서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리고 싶었다. 빨리 읽고 다른 걸 읽고 싶었다. 전쟁도 싫고 너무나 원하는데 가질 수 없어 힘들어하는 것도 싫고, 고문과 학대도 싫고 폭력도 싫고 외로움도 고독도 싫었다. 이 모든게 다 있는 이 책을 빨리 읽어버리고 싶었다. 나중에 나오는 산불 이야기도 싫고 거짓말도 싫었다. 다 싫었다.
그는 죽지 않았고, 그녀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p.506)
그것으로 충분한가.
정말 그런가.
힘들어요. 여자가 말했다.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질 수 없다는 게. - P105
어떡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을 정말 원해.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꼴사납게 보일 정도로 저 사람을 원해. - P167
처음부터 알았어. 그가 말했다. 그애가 처음 날 만나러 왔을 때부터. 문장과 문장 사이로 몇 마일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자동차가 한없이 펼쳐져 덜컹거리는 암흑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키스에게서 새오나오는 슬픔뿐이었다. 그 슬픔이 세상을 텅 비워버리는 것 같았다. - P196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외로웠고, 자식들과 함께 있을 때도 외로웠고, 수술실에서도 외로웠다. 그가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의학 모임, 스포츠 모임, 자선단체, 참전군인 단체에서도 외로웠고,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할 때도 외로웠다. 기운이 다 빠져버린 공허가 그를 에워쌌다. 뚫을 수 없는 공허가 사교성 좋기로 유명한 이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벌써 다른 세상에 가서 살고 있는 듯했다. 한없는 꿈 또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풀었다 되감기를 영원히 반복하면서. 꿈과 악몽중 어느 쪾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거기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다시 불을 켤 수 없게 된 등대였다. - P482
그렇게 그와 엘라 사이에 경험이라는 공모가 자라났다. 아이들을 기르는 것, 현실적이고도 다정하게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것, 함께 보낸 세월, 수십 년 동안 쌓인 두 사람만의 대화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소한 일들, 그러니까 잠에서 깨었을 때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체취와 아이가 아플 때 상대의 떨리는 숨소리, 서로가 앓은 병, 슬픔과 관심, 서로 기대하지도 않고 말해본 적도 없는 애정 같은 것들, 이 모든 것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더 확실하며 더 강하게 두 사람을 묶어주는 것 같았다. 사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엘라에게 묶여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도리고 에번스는 무엇보다 완전하고 확실한 고독을 느꼈다. - P489
그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기 직전까지 갈 때마다 그녀의 앞에 커다란 장애물이 나타났다. 한 번도 그녀를 찾지 않고, 약속과 달리 전쟁이 끝난 뒤 그녀를 다시 찾아오지 않은 그가 그녀를 거절할 것이라는 장애물. 이제는 두 사람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유명한 도리고 에번스가 되어 계속 유명해지는 중이었지만, 그녀는 아래로 자꾸만 가라앉는 하찮은 사람이었다. - P505
그는 죽지 않았고, 그녀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 P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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