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도와주신다고요? 어떻게요?"
내 목소리도 그만큼 나직하다.
그는 뭔가 알고 있는 걸까, 루크를 본 적이 있을까? 실종된 그를 찾은 걸까? 내게 다시 루크를 돌려줄 수 있나?
"어떻게 도와줄 거라 생각해요?"
여전히 숨소리나 다름없는 낮은 목소리. 다리 위로 미끄러져 올라오는 게 그의 손인가? 그는 장갑을 벗어던졌다.
"문은 잠겨 있소. 아무도 들어오지 않아요. 그 사람 아이가 아니라는 건 절대로 발각되지 않을 거요."
그는 장막을 걷는다. 그의 얼굴 아랫부분은 하얀 가제 마스크로 가려져 있다. 한 쌍의 갈색 눈동자, 코 하나, 그리고 머리카락이 갈색인 머리 하나. 그의 손은 내 두 다리 사이에 있다. (p.106)
아이가 없어 대리모를 데리고 사는 대부분의 사령관들은 불임인 경우가 많다. 그것도 모르는 채로 시녀들은 어쩌면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고. 시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도 나이 제한이 있다. 사령관과 아이를 갖는 행위를 치르는 것도 임신 가능성이 높은 날 하루 이틀이고.
오브프레드 역시 임신하지 못하고 있고 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녀들은 매달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 몸에 이상은 없는지 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 갔더니 닥터가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며, 자신과의 섹스를 제안한다. 명목상 그가 하는 제안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너희들이 만나는 늙은이들 대부분이 불임인데 너네들이 겪는 고통을 보니 끔찍하다, 는 것. 그러니 자신이 기꺼이(!) 그 일을 함으로써 도와주겠다는 거다. 닥터는 그녀를 검진하면서 어떻게든, 어디든,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를 만질(?)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에 시녀는 고민해야 한다.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진심 어린, 진심 어린 동정의 목소리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즐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동정이며 이 모든 일들을. 두 눈은 동정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지만, 한 손은 초조하고 성급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다.
"너무 위험해요. 그럴 수는 없어요."
죄의 대가는 사형이다. 하지만 현장에서 들킬 때의 일이다. 그것도 증인 두 명이 있어야 한다.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진료실에 도청 장치가 되어 있거나 문 뒤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이?
내 몸을 훑던 그의 손이 뚝 움직임을 멈춘다.
"생각해 보세요. 당신 차트를 봤어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더군요. 하지만 당신 인생이니까."
"고맙습니다."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남겨야 한다.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여운을 흘려야 한다. 그는 느릿하게, 아쉽다는 듯이, 손을 치운다. 그의 입장에선 이걸로 끝이 아니다. 검사 결과를 위장할 수도 있고, 내가 암이나 불임이라고 보고해서 나를 '비여성'들과 함께 식민지로 추방시킬 수도 있다. 지금 듣고 본 일은 없었던 일로 쳐야하지만, 어쨌든 내가 맡게 된 이상 지금 우리 사이의 공기 중에는 그가 지닌 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떠돌고 있다. 그는 은근슬쩍 내 허벅지를 가볍게 툭툭 두들기더니 장막 뒤로 물러난다. (p.107-108)
닥터에겐 권력이 있다. 그녀의 목숨을 쥐고 흔들 권력, 그녀의 앞으로의 남은 날들을 쥐고 흔들 권력. 그에게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조심해야 하고, 그의 기분을 건드리면 안된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것은 자신에 대한 테스트가 아닐까, 하는 것도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내가 수락했다가 혹여라도 이것이 테스트라면, 그래서 자신이 불법에 관여하게 된거라면 역시 목숨을 잃을 테니까. 그런 선택의 기로 앞에서 이걸 선택해도 저걸 선택해도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선택 자체가 그녀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그리고 그것을 그녀의 '선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는걸까. 내가 비록 임신해야 하는 여자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해야 앞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닥터의 강간의 손쉬운 목표가 된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비극인가.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랑 그럴 순 없어, 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은 또 비극 한덩어리를 더하고.
어떻게든 그의 기분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러나 그녀가 범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 것을 드러내면서 그 시간을 간신히, 무사히 넘겼다고 하면, 그러면 결과적으로 잘됐다고 할 수 있을까?
"다음 달에 봅시다."
나는 장막 뒤에서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왜 겁에 질린 걸까? 경계를 넘어서는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덥석 사람을 믿어 버린 것도 아니고, 위험을 받아들인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안전한데도. 나를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건 선택 그 자체다. 탈출구, 구원의 길. (p.108)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자신의 앞날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공포. 이제 비로소 그 순간이 지나갔으니 안도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닥터는 다음 달에 봅시다, 라고 말했다. 다음 달에도 어김없이 시녀는 이 병원에 방문해 이 닥터에게 진료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 지금 일어난 이 일은 그 때 또다시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제안이 반복되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해봤겠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진다. 본의 아니게 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겨버려. 시녀는 지금은 아니라고 해서 무사히 넘어갔지만, 다음달에는 그리고 그 다음 달에는 어떻게 될까? 다음 달에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는 사실, 그걸 알면서 지금 이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계속 공포는 그녀에게 들러붙어 다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집에 가서 사령관에게, '그 병원 닥터 이상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겠소' 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어. 그저 묵묵히 그 선택 아닌 선택과 강요를, 압박을, 그 무거운 분위기를 혼자 견뎌내야 한다. 게다가 다음에 또 그것이 올 거라는 걸 각오해야 한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 그녀에게는 어떤 권력도 없다는 것,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권력 자체가 그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면서 '내가 너를 임신시켜서 너를 고통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닥터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을 성폭행에 이용하려고 하는 남자. 자신이 가진 힘을 알기 때문에 자비로운 척, 자선을 베푸는 척 강간에 다가갈 수 있는 남자.
한 남자는 그녀의 위기의 순간을 이용해서 성폭행을 하고자 하고,
또 한 남자는 그전에 같은 일로 목숨을 잃은 시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지금 시녀에게 또 시키고 있다. 걸리면 죽는 건 그가 아니라 시녀니까.
선택이 주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더 두렵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은 그녀가 사실은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게 아닌가.
아, 권력을 가진 놈들이 자상한 척 하고 배려하는 척 하는 게 진짜 너무 싫다. 그러면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려 하는 게 너무 싫어.
애트우드가 1985년에 쓴 작품이 2019년인 지금에 읽어도 그 간극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몹시 슬프다. 그때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아무것도 변한 것 같지 않아 슬프다. 여전히 좆같은 놈들이 권력을 쥐고 앉아있는 게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