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굿모닝 맨하탄》을 보았다. 오래전에 티비에서 해줄 때 놓쳤던 영화라 언젠가 봐야지 했었는데 마침 비행기 안 상영 영화에 있었다.


인도에 거주하는 인도인 여자 '샤시'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일찍 일어나 커피라도 한 잔 할라치면, 남편이 일어나 부스럭대며 차를 달라, 밥을 차려라 요구를 한다. 밥상에 둘러 앉아서도 남편과 딸아이는 샤시가 영어를 못한다고 무시하기 일쑤다. 여자가 잘 하는일, 취미를 붙여 신나서 하는 일, 돈도 벌어다 주는 일은 간식인 '라두'를 만드는 일인데, 이 일을 가족들은 높이 쳐주질 않는다.


그런 참에 미국에 사는 '샤시'의 조카가 결혼을 한다면서 샤시네 가족을 초대한다. 남편은 샤시에게 좀 더 일찍 가서 결혼 준비를 도우라고 말한다. 샤시는 그렇게 뉴욕에 도착해 언니네 가족들을 만나지만, 혼자서 카페에 가는 것도 두려워질 정도로 영어를 못하는 자신에게 주눅 들어 있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4주만에 영어 완전정복' 이라는 학원을 알게 되고, 언니네 가족들 몰래 그 학원에 등록해 매일 영어를 배우러 다닌다.


학원에는 각 나라별로 각자의 사정으로 영어를 배우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영어를 거의 하지도 못하는 그들이 4주동안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원에 모여 영어 실력이 점차 나아지는 걸 보게되는데, 역시 누군가 공부하는 걸 보는 건 정말이지 즐거운 일이다. 더불어 내 공부의욕도 마구 샘솟고.


어느날 샤시가 학원에 늦었다.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샤시에게 선셍님은 반복해서 "You may not." 이라고 말한다. 들어가도 되냐는 말을 제대로 해보라는 다그침이다. 이에 샤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선생님에게 묻는다.


"May I come in?"


그제야 선생님은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하고 그렇게 그 수업은 계속 진행된다.




샤시의 영어 실력은 처음과 달리 아주 좋아졌고, 영어로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가능해졌다. 영화는 보수적인 모습을 버리지 못해 가끔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를테면 아내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후려치기 하는 남편에게 아내도, 그리고 다른 친척들 그 누구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게다가 그렇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여전히 남편 당신은 내사랑' 이라고 하는 것도, 아이를 낳고 진정 행복해지라는 샤시의 조언도... 아아, 그 와중에 깨우친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게 남아있더라. 그러나 열심히 영어공부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영화를 통해 보는 건 너무 즐거웠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다보고 내 동행에게 '저런 학원 정말 있을까, 4주만에 영어 정복해주는?' 이라고 물었고,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냥 일단 영어로 무조건 대화하게 하는게 영어 실력을 정말 향상시켜주는걸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 데가 있으면 나도 기꺼이 갈텐데!




긴 비행을 마치고 JFK 공항에 도착했다. 기존에 미국에 왔던 적이 있는 사람과 이번에 처음인 사람이 다른 줄로 서게 되어있었다. 여권을 스캐너에 읽히고 통과해 입국심사 줄에 섰는데, 내가 선 줄의 내 앞 사람이 막 입국심사를 마치고 나갔다. 이제 내 차례였다. 입국심사를 받기 위해, 나는 심사관에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묻고 있었다.



"May I come in?"



아아아.. 몇 시간 전에 본 영화에서 나온 대사를 이렇게 바로 써먹게 되다니! 완전 오픈된 곳이 아니어서 가능한 물음이었다. 심사관은 그렇다며 오라고 했다. 아... 역시 영어는 영어 생활권에 들어와야 비로소 향상되는 것인가. 물론 내 늘어난 영어 실력은 고작 May I come in? 이 다였지만, 이 얼마나 뿌듯한 일인가. 사람은 배웠으면 써먹어야 하는 법. 나는 어째 이 문장을 평생 잊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4주만에 영어를 완전 정복할 수 있다면, 나도 뉴욕에서 그곳을 찾아 열심히 다녀보리라, 고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건만, 뉴욕에서 며칠 지내면서는 '그냥 한국에서 공부하자'로 마음이 바뀌었다. 물가가 너무 비싼 까닭이었다. 기본 팁은 메뉴에 적힌 가격과 별개로 18퍼센트나 되어서, 내가 이렇게 짧게 여행온 사람이라 지불이 가능하지, 이 곳에 산다면 나는 이것들을 먹고 다닐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게다가 시내 중심에 위치한 호텔의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여태 여행하면서 다녔던 호텔들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주고 묵고 있건만 시설은 딱히 좋지 않았다. 객실에 있는 욕실 변기의 수압도 낮고 자꾸 막혀서 직원을 불러야 했다. 내가 여기에 한달간 묵으려면 비행기 값과, 호텔값과, 밥값이 필요할텐데, 아아, 이럴 거면 한국에서 과외를 받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야, 노팅힐 대본 사둔 거...그거 보자. 마침 《시녀 이야기》원서도 샀잖아. 필사하자.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기에서도 공부할 수 있어!!





뉴욕에 머무는 동안 가장 좋았던 시간은 <휘트니 뮤지엄>에 갔던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가는 내내. 나는 혼자였고 핸드폰으로 지도를 봐가며 온전히 걸었다. 한시간 가량을 열심히 걸어가며 낯선 장소를 한껏 감상했다. 뉴욕은 이번에 세번째 방문이었는데, 그간 첼시 쪽은 오질 않았었네. 여긴 또 그간 내가 갔던 곳과 다르구나 싶어 몹시 신나고 흥분됐다. 먹구름이 끼어 곧 비가 올 것 같아 중간에 마트에 들렀는데, 3단우산의 가격을 보니 우리돈으로 25,000원 가량 하는거라. 얼라리여.. 내 캐리어에 우산 들어있는데, 이 돈 주고 도무지 우산을 살 수가 없다.. 하고는 그냥 나왔다. 그래, 일단 그냥 걸어보는 거야. 걷다가 비 오면 그건 그 때 생각하자, 하고 나는 열심히 걸었다. 그렇게 휘트니 뮤지엄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 혼자, 이 낯선 거리를, 실컷 걸어 온전히 감상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한껏 신났다. 비가 오지만 알게 뭐람, 그건 이따 다시 생각하자. 나는 그렇게 천천히 그림들을 보았는데, 아아... 6층의 야외 테라스에서 나는 행복 오브 행복을 느껴버리고 만다. 너무 좋으네요 진짜... 테라스의 까페에는 파라솔도 있어서 비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비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는 주변의 전망이라니. 도시와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데 너무 좋아서 ㅠㅠ 울고 싶었습니다 ㅠㅠㅠ 나는 그렇게 의자에 앉아서 한참이나 바깥을 보았다. 그림을 보러 왔다가 테라스에 반해버렸네. 그 모든 시간들이 충만했다. 동행과 따로 떨어져 혼자서 지도를 보고 낯선 거리를 걸었던 시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내 기대 이상의 장소를 만나는 짜릿함.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미술관을 나왔을 땐, 비가 멎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나 '언젠가는 미국에서 살아볼거야' 했는데, 이번에 가서는 '나는 이곳에서 살 수 없을 것이다'를 생각했다. 모든 걸 새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 지금 이곳에서야 내가 차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지만, 그곳에 가면 나는 무엇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가기 전에 영어도 익혀야 할텐데. 그리고 내가 어떤 일자리를 얻든, 그 물가를 감당할만한 월급을 받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기는 할까. 911 메모리얼 뮤지엄을, 휘트니 뮤지엄을, 구겐하임 뮤지엄을, 노이에 갤러리를 가 실컷 감상하고 성 패트릭 성당과 성 토마스 교회에 들러 바라던 것을 기도했고, 크림치즈가 잔뜩 들어간 베이글과 육즙이 흘러 넘치는 스테이크를 먹고 다시 긴 비행을 하고 한국에 도착했더니, 불금도 내 생일도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한국에 없는 동안 모두 그냥 지나가버렸어.



이번 생일엔 케익을 하나도, 한번도 먹지 못했네, 생각한 것도 잠시, 한 달전쯤 친구가 보내준 케익 기프티콘이 내게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오호라! 14일 밤에 먹어야지. 마침 그 날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기도 하고 언제나 내가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니까, 그 날 케익을 바꿔서 먹자. 와인을 마시자. 냉장고에 훈제 오리도 있어. 그걸로 근사한 안주도 준비하자. 2007년 그 날 그랬던 것처럼 아주 행복한 기분이 되어야지. 나의 특별한 날들을 자축해야지.




밤을 꼴딱 새고 출근했다.


날이 개고 있고 여름이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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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8-16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하탄은 여행으로는 좋지만 살기에 너무 비싼 곳이죠. 대도시들이 다 비싸지만 그중에서도 최고. 중부 남부 시골로 가면 물가도 싸고 동양인이 별로 없어 영어도 많이 늘 거 같기는 한데 거기는 또 너무 볼 것도 할 것도 없고 하니...

다락방 2019-08-16 09: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프시케님. 어릴 때부터 뉴욕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지만 지금 다시 가보니 뉴욕에선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휴... 현실감각 제대로 들이닥쳐서..
그렇지만 여행으로는 참 좋은 곳이에요. 물론 비용이 많이 들긴 하지만, 뮤지엄들 많은 것도 너무 좋고 도시 자체가 그냥 어딜 둘러봐도 너무 좋아요! 저는 뉴욕에 또 가고 싶어요. 또 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