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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양이현정 옮김 / 현실문화 / 2002년 4월
평점 :
지난 주말에 만난 친구는 요즘 독서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올해가 가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혹은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완독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안나 카레니나를 권하면서, 그 책을 읽으면 앞으로 하게 될 독서에 많이 도움이 된다, 그 책이 배경지식이 되어준다, 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독서가 얼마나 좋은지를 다시 한 번 말했다.
"책 읽는 거 너무 좋지 않아? 계속해서 읽다보면 그 책들이 쌓여서 내 배경지식이 되고, 그 배경지식을 가진 채로 책을 읽으면 기존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고 또 생각하게 돼, 사고의 확장을 느낄 수 있는거지. 너무 좋지?"
페미니즘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독서의 장점에 몇 가지가 추가된다. 세계 각지에서 어느 때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 또 활동을 해온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한껏 힘이 나기도 하고, 기존의 내가 가졌던 잘못던 생각에 대해 반성하게도 해준다. 무엇보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싫더라' 하는 것들에 대한 답도, 페미니즘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그간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얼마나 많이, '아 그 때 내가 그래서 그런거구나' 하게 되는지 모른다. 나는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면서 개념녀 코프스페 하는 대표적인 여자사람이었고, 그렇게 나 자신을 남성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했으며, 지금이라면 너무 끔찍했을 발언들도 해왔던 터다. 하나하나 그런 과거의 일들이 생각날 때마다 얼마나 내 가슴을 치는지 모른다. 무지했어, 나빴어. 많은 경우 무지는 독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포르노를 보지 못하겠다고 얘기해왔었다. 포르노에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그 당시의 내가 포르노를 보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해왔다. '어쩐지 싫고, 에로틱하게 나를 충동질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 사이에 '스토리가 없어서인가' 보다 라고 생각한거다. 확실히 그저 남녀가 벗고 그저 육체적 관계만을 보여주는 영상들은, 로맨스 영화에 비해서 그 재미도 떨어졌고, 재미가 뭐람, 대체 이걸 왜 보고 있어야 하는걸까? 라는 의문을 갖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 내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이 책,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읽으면서 나를 포함해 다른 많은 여자들이 포르노를 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됐다.
'포르노그라피'라는 말은 그리스어 '포르네'(매춘부나 여자 포로)와 그래포스(서술, 묘사)를 합친 것이다. 그러므로 포르노그라피의 언어적 의미는 '성을 사는 것을 묘사한 것'이며, 권력의 불균형, 성노예화를 함의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묘사하는 것도 포르노그라피의 정의에 포함된다. (p.104)
간단히 말해 포르노그파리는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는 권력의 불균형에 관한 것이다. 권력의 불균형은 섹스가 공격의 한 형태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하고 또 그렇게 이용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p.105)
여성이 피해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위험을 느끼는 여자들과 남성이 가해자인 것을 보면서 스스로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남자들 앞에는 긴 투쟁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아이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해 여성을 지배하거나 정복해야 한다고 믿도록 키워지는 한, 어떤 형태로든 포르노그라피는 존속할 것이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서, 또는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 여자의 복종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들에게 유리한 사회가 지속되는 한 포르노그라피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p.117)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포르노는 에로틱과 다른 것이라고 이 책에서 구분지어 주고 있다. 우리가 포르노속에서 보았던 발가벗은 남녀의 움직임은 그러니까 '섹스가 아.니.었.다.'. 나는 포르노에 대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글을 읽으면서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이것봐, 내가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어쩐지 눈물이 나지 않는가.
영화《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속의 '그레이'는 상대를 때리면서 섹스를 하는 사람이다. 순진했던 아나스타샤는 그레이를 사랑해서 그레이가 하자는 대로 하기는 하지만, 어느 날 그가 가죽 벨트로 엉덩이를 때렸을 때, 울면서 그에게 말한다.
'이게 당신이 원하는 거야?'
나는 때리면서 혹은 맞으면서 섹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냥 섹스는 '지루하니' 가끔은 그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들을 종종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궁금하다.
상대와의 섹스가 '왜 지루할까'?
지루한 섹스를 왜 할까?
왜 '사랑하는데' 때리고 맞으면서 그걸 즐겨야 할까?
사랑하면 쓰다듬어주고 예뻐해주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사람이 살아봤자 백년인데, 거기에 왜 굳이 왜 때리고 맞는 시간이 포함되어야 할까? 예뻐해주기도 시간이 모자라 안타까운데? 나는 섹스중에 맞고 싶지 않다. '더한 재미'를 보자며 섹스중에 나를 때리고자 하는 것은, 내게는 폭력이고 두려움이다. 내게는 두려운 이 폭력이, 포르노를 수시로 보는 많은 남자들에게는 '섹스중의 재미'가 될 수 있다는 데에서 권력의 불균형이 온다. 그러므로 내가 '맞기 싫다'고 내 의사를 표현할 때 나는, '자극적이지 않고 재미없는 순진한' 여자가 되고야 만다. 나는 폭력이 싫은 것 뿐인데. 당신이 나를 때리는 순간을 나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인데.
이 책은 전체적으로는 아주 온건하다. 서문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아직까지 이 책이 읽히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우며, 이 책이 시대에 뒤떨어지는 책이 되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다. 나는 이미 아주 멀리 와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이 책이 온건하며 또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수시로 느꼈다. 특히나 이 책의 한국어 출간을 축하하는 '현경'의 글은, 2002년에 쓰여진 걸 감안해야 겠지만, 너무 후졌다. 50대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젊어 보이고 아주 늘씬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다. 아아, 아니에요, 예쁜 페미니스트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축하하는 글을 읽고 잠깐 이 책을 읽지 말아야 하는걸까, 나에게 지나치게 온건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것은 나의 자만이었다. 나보다 앞서 페미니스트였으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수시로 나는 뒷통수를 때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또 시야가 한층 넓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트랜스 젠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는 한참이나 생각 속에 머물러야 했다. '앨리스 워커'와 ''린다 러블레이스'와의 인터뷰를 보면서는, 여자들은 계속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었구나, 새삼 생각했다. 나는 '린다 러블레이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서도 그녀를 백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수시로 과거를 반성해야 했고, 또 수시로 '내가 괜히 그런 게 아니었어'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한국영화를 잘 보지 않는다고 했을 때 왜 한국영화 무시하냐는 말도 더러 들었었는데, 그래서 흥행한 한국 영화를 보려고 하면 끝까지 보고 있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그것들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며 여자를 물화 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살아오면서 느껴지는 '촉'이라는 것이, 이제는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바니걸'로도 위장 취업해 일을 하고, 그 안에서 얼마나 여자들이 성적대상화 되고 물화되는지, 노동조건은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기사를 써냈었다. 그 안에서 그 일을 체험하는 것은, 하이힐과 꽉 조이는 옷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생생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그것들을 겪었다는 것이 대단하고 또 고맙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이런 일들을 진작부터 해오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진다.
낙태와 할례 그리고 여성이 쓴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출판까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책에서 다뤄야 할 중요한 것들을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 '아, 이건 좀 시대에 뒤떨어졌지, 더 나아가야지' 할 때 조차도, 아마 그 당시에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지금! 계속 쓰고 말하고 행동해야 하고 더 과격해져야 한다. 더 거칠어져야 한다.
분노는 행동을 위한 에너지를 일으키는 배터리와 같다. (p.23)
훌륭한 정치가를 뽑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좋은 책이 계속 출판되도록 열성적으로 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다. 비평가와 학자들은 안전하게 먼 나라의 작품들로 명작의 전당을 채우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네트워크와 출판사를 만들어내고 기존 질서를 바꾸기 위한 압력도 가해야 한다. 실제로 현재 많은 페미니스트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고 있다. (p.182)
예전에 내가 갖고 있었던 남성우월주의적 편견을 생각해 보면, 그 편견 안에는 여성에 대한 경멸,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경멸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사회에서 하등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 겪는 가장 가혹한 처벌이라 할 수 있다. 사회는 우리를 세뇌하여 우리 스스로 열등하다고 믿게 만든다. 설사 우리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다 해도 자신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여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한다. 열등한 집단이 아닌 우월한 집단과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p.219)
사실상 백인 남자들의 처벌 방식 중 가장 많이 애용되는 것은 조롱과 인신공격이다. 자기 주장이 강한 여자가 미모를 가지고 있거나 젊다면, 뒤에 든든한 남자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여성이 성공하면 아마 남자 상사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 거라고 판단한다. 만약 늙은 여성이나, 남성의 기준으로 볼 때 매력적이지 않은 여성이 힘있는 행동을 하면, 남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복수하는 거라고 말한다. 남성의 부속물이 아닌 완전히 성숙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행동하는 여성은 더러운 농담의 밥이 된다. 조롱은 기성 체제를 수호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첫 번째 무기이고 더 심한 공격이 그 다음에 이어진다. 그런 여성에게는 더욱 더 자매애가 필요하다.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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