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카'는 몇 해전에 남편과 이혼했다. 아이 둘과 함께 살면서 정해진 기간에는 남편에게 가 아이들을 맡기고 돌아오는데, 어린시절 자신이 즐겨가던 해변가에 아이들과 함께 갔다가 거기서 해골을 발견하게 되어 경찰에 신고한다. 그 일로 알게된 경찰 '에릭'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는데, 이런 대화를 한다.







그러니까 무려 '경찰'씩이나 되는 에릭이 '쫓겨났다는 이유로 아내와 자식을 살해한 남자'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거다. 자신이 쫓겨났기 때문에. 울리카 역시 남편 '안데르스'와 헤어졌기에 남편에게 무기가 없음을 다행스레 생각한다. 또한 자신 역시 헤어졌지만 자신이 그렇게 전남편과 아이들을 총으로 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이해를 못해는 울리카에게, 심지어 '경찰'인 에릭은 '니가 여자라서 이해를 못하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다. 자신과 같은 남자들에게 그 일은 너무나 큰 일이라고.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을 쏘는 걸 이해한다고?? 와, 경찰이라니, 가해자인줄. 무슨 경찰이 이렇게 아내와 아이를 쏘아죽인 남자에게 이입을 하지?? 이입할 상대가 따로있지. 어째서 이런걸까? 이 소설은 '스웨덴' 소설인데, 스웨덴에서도 역시 아내를 죽이는 남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에 대해 남자들이 감정이입하는 건 똑같은 건가? 공감능력 맨날 좆도 없다면서 가해자한테는 이입 졸라 잘해주시네.

애시당초 왜 아내가 남편과 살고싶어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다. 관심이가 없다고 한다 이들은...


이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대화에서도 그렇고 '울리카'가 꼴페미가 될 확률은 매우 높아 보인다. 이혼한 후의 그녀를 보자.



남편은 '그 정도로 나쁘지 않다'고 하는 상황에서 여자는 이혼을 결심하는 거다. 이혼하고 난 후에 그의 뒤치닥꺼리를 하지 않게 되어 좋다고 말하잖아? 그러니 그녀는 여자로서 살아가면서 결혼하면 남편의 뒤치닥꺼리를 해야한다는 걸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고, 또한 경찰인 '남자'와 대화하면서, 그들이 '헤어지자고 하면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가해자'에게 이입하고 있다는 것 역시 경험하게 되었다. 이론이 아닌, 자신의 삶이 이렇게 부조리로 가득 차있는데, 그런데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당시에 아직 페미니스트라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소설의 뒷부분에 어린 시절 알게된 남자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남자는 페미니스트를 '가만있는 남자에게 시비거는 여자'로 보고 있었던 거다. 자신이 하게됐던 모임에서 유일하게 토론하려고 했던 사람이 페미니스트였는데, 그 여자가 공격한 대상은 그 모임에서 얌전히 가만 있던 남자라는 것... 그 대화속에서는 '어휴, 페미니스트 들이란..'같은 시선이 느껴진달까.




물론, 이 소설은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이 아니다. 북유럽 신화를 가져와서 어린 시절 있었던 미스테리한 사건에 대해 풀어가고 또 그 때의 사랑과 동경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 작가가 신화와 미스테리를 잘 섞었구나, 라고 감탄하는 게 먼저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맞물리는 지점은 '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고 놀라웠으니까. 그러나 책을 다 읽고 책장을 엎으면서 나는


'이 작가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구나, 적어도 이 소설을 쓸 당시에는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었다. 오, 조가비 해변이여, 하필 지금 니가 나를 만나 고생이 많다.....





울리카는 어린 시절에 만난 동년배 친구 '안네 마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또 그녀를 동경하다가, 그녀와 친해지게 된다. 그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 기쁘고 벅찬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울리카는 이렇게 표현한다.



세상에는 우리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방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과 우리는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성별이 같고 연령도 어느 정도 맞으면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경우에는 마법에 걸린다거나 종속된다거나 표현이야 어떻든 하여간 그런 상황이 되지만, 사실은 두 경우 모두 똑같다. 나에게 안네 마리는 이런 열쇠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그다지도 큰 의미가 있었다. 반면 안네 마리에게 나라는 의미는 그 정도로 크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사라질까봐 늘 두려웠다. (p.84)




어쩌면 운이 좋았던건지, 혹은 좀 더 늦게 만나는 게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울리카는 '안네 마리'라는 '나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을 만난다. 그 사람은 너무 특별하고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데, 나는 이런 사람을 우리 모두가 인생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게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울리카는 어린 시절에 만났지만 누군가는 이십대에 또 누군가는 삼십대에 또 누군가는 칠십대에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나에게 오는 열쇠를 지닌 사람이, 본인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설령 알지라도, 그러나 그 사람에게 가는 열쇠는 내가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니가 나에게 오는 열쇠를 가졌다면, 나 역시 너에게 가는 열쇠를 가져야 함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래야 딱 들어맞잖아. 너가 내 짝이고 내가 니 짝이고. 그런데 인간사가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고 명쾌하지도 않다. 당신은 나에게 오는 열쇠를 가졌고, 나는 저 사람에게 가는 열쇠를 가졌고... 그래서 당신은 나에게 너무나 큰 의미인데, 나는 저 쪽에게 너무나 큰 의미...아 빌어먹을 시츄에이션 이잖아. 인간사가 이렇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나에게 오는 열쇠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서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나 상대가 사라질까봐 늘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에게 그다지도 큰 의미'인 사람에게 '나는 그정도로 그 사람에게 크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는 건 너무나 시리지 않은가. 이건 드러낼 수 없는 아픔이고 드러낼 수 없는 가슴 시림이다. 한 겨울에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단지 두꺼운 외투 하나만 입은 느낌이랄까. 외투로 감싸지만 그걸 벗기면 시린 가슴...



인생....

열쇠.......

큰 의미...........





울리카는 서른 일곱이 되어 우연히 안네 마리의 오빠와 재회하게 된다. 당연히 그 역시 성인이 되었고, 조금 배가 나왔다. 이들은 십대에 해변가의 텐트 안에서 서로를 안았던 사이, 울리카에게는 쉽게 말해 첫남자.. 가 되는 것이다. 이들이 삼십대에 우연히 재회에 2박3일을 같이 있게 되는데, 서로의 변한 모습에 알아보지 못하기도 하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빵과 차를 함께 먹다가 어느새 그것은 와인으로 바뀌게 되는데, 나는 이들의 와인과 또 대화, 그 넓은 집에 둘만 있는 걸 보면서 '자지마...'하고 불안해졌다. 울리카야 이혼해서 싱글이지만 남자는 '아내가 사흘 뒤에 데리러 올거야' 라고 말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들이 잘 거라는 건 너무 뻔한 일이었다. 한 번 잤던 사이가 다시 자는 건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이고, 물론 그것이 십대 시절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도덕적으로 살 순 없다. 머릿속으로 분명 '해서는 안돼'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일을 하게 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나만해도 수시로 집앞에서 무단횡단을 하는 통에 딱지를 끊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나 역시도 울리카의 상황이 되면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원해서 그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에게 아내가 있다는 걸 아는데... 알지만, 그런데 내가 막 너무 좋아했던 남자고 그러면 또 '에라이 저질러버려' 이러면서, '아 몰라 이 다음은 나도 모른다, 될대로 돼라' 이러면서 잘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아내의 입장이라면.... 내 남편이 일한다고 나갔다가 우연히 옛날 여자 만나서 한 번 자고 들어왔다고 하면, 물론 내가 모르게 그렇게 하긴 하겠지만, 그런 일이 잇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돌잖아... 내가 그걸 알고나서 쿨하게 '오! 그래, 맞어, 이해해, 옛날 애인 만나면 한 번 잤던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괜찮아' 할 수 있을까? 아 시부럴 .... 짜증이 샘솟는데..... 그런데 내가 너무 사랑했던 남자를 우연히 만났는데 아내가 있다고 말하면 나는 또 입술을 꽉 깨물고 '너는 아내가 있으니까 겁나 자고 싶지만 안잘거야' 이렇게 할 수 있을까.....내적 갈등 진짜 오지게 하다가 아아, 현재를 즐기자... 또 막 이렇게 되면.... 아 힘들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음...

사는 건 고민의 연속이고 갈등의 연속이고 고통의 연속이어라.


걍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게, 마주치고나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까, 거리를 걸을 때는 땅바닥만 보면서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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