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더슨의 테이프 - P
로렌스 샌더스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2년 1월
평점 :
절판


 -저는 로렌스 샌더스를 몹시 좋아합니다. 예전에 동쪽나라에서 나왔던 앤솔로지 [이야기꾼]에 수록된 다소 편향된 이 작가 소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뜁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먹부림이 3할, 공작새 같은 주인공 탐정의 옷장이 3할, 팜 비치의 인간관계 시궁창이 나머지를 차지하는 아침드라마급 미스터리인 찌질한 맥널리 시리즈입니다. 가끔은 먹부림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만, 샌더스의 다른 소설에 비해 유혈과 변태에 휘말리지 않고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식사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안티-제임스 엘로이라고나 할까요.

 [앤더슨의 테이프]는 로렌스 샌더스의 작품 중에서 맥널리 시리즈와는 상당히 먼 방향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로이의 [블랙 다알리아] 등에 가깝다는 건 아니에요. [앤더슨의 테이프]는 시종일관 읽는 사람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합니다. 소설 한 편 전체가 어떤 '테이프들'의 녹취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에는 센세이셔널하고 풍부한 묘사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한 꺼풀 가려져 근질근질한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어요. 앤더슨은 가끔 침대에서 여자를 울리고, 또 가끔은 자기가 울음을 터뜨리지만 대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그리고, 또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 편이 훨씬 자극적입니다!

 그래서 전 [앤더슨의 테이프]를 미스터리로서보다는, 무언가 굉장히 도색적인 물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아우얼의 에일라 시리즈에서 쬐끔의 두근거림을 찾는 아이랑 비슷하군요. 이 소설은 맥널리 시리즈나 그 비슷한 것들을 더 먼저 본 제게 로렌스 샌더스가 젊을 땐 이런 걸 할 줄 알았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런 뛰어난 변태가 나중엔 그냥 변태가 되어버리다니 이만큼 슬픈 일도 없을 거예요.

 물론 이 소설의 백미는 저 도청테이프들이 계획적으로 설치된 게 절대로 아니며 설치한 기관들 사이에 합동수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정치여... 각자 다른 의도로 도청을 위해 설치된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들이 겹쳐지며 사건의 진상을 조금씩 드러낸다는 구성은 높이 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사건과 무관한 캐릭터들의 과거사 역시도 흥미롭고요. 이 작품은 1971년에 에드가상을 받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 50살 먹은 신인작가에게 얼마나 열광했을지 생각하면 제가 다 짜릿해져요.

 다시 읽는 동안 새삼 존 '듀크' 앤더슨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책장에 빠져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정확히 어디가 포인트인지 지적을 할 수는 없는데 이 남자 하여튼 굉장합니다. 혹시 영화화한다면(애초에 이런 종류의 소설이 영화화가 가능한가라는 점은 접어두고) 이런 앤더슨의 불안정한 매력을 잘 살리는 것이야말로 관건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1971년에 영화화된 적이 있더군요. 그리고 그 영화에서 앤더슨 역은...션 코너리. 차라리 날 죽여라...

 음, 실은 2006년 언저리부터 저 영화의 리메이크 얘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 같아서는 그저 주저앉지만 말았으면, 앤더슨이 맷 데이먼이라고 해도 용서해 줄 테니까라는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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