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카터Peter Carter의 [칼과 십자가Madatan](이 제목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를 무언가와 함께 묶는다면 그 '무언가'는 역시 로즈메리 서트클리프Rosemary Sutcliff의 [횃불을 들고The Lantern Bearers]가 되는 게 맞을 겁니다. 시기상으로는 300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만 양쪽 다 애들 책에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진지한 인간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습니다-한 쪽은 매우 지적이며 다른 한 쪽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물론 이 표현은 종교가 지적이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략 저 시대 언저리부터 1000년간 종교와 지성이 동일시되던 시대니까 더더욱. [칼과 십자가]의 전체 주제가 무척이나 종교적인 데 비해 [횃불을 들고] 에서는 종교란 언뜻 지나가는 문제로만 언급될 뿐입니다-즉 이렇습니다 : 착한 종교인은 좋은 사람입니다. 근데 그 사람은 종교인이 아니어도 착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두 주인공의 인생이 외부의 개입으로 산산이 부서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칼과 십자가]의 마다Madaah(이 이름은 켈트 어로 '여우' 라는 뜻입니다. 제목의 'Madatan'은 '작은 여우' 라는 뜻이고요)는 갑자기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바이킹에게 노예로 끌려갑니다. [횃불을 들고]에서는 주인공 마르쿠스 플라비우스 아퀼라가 아버지의 농장에 머물고 있을 때, 색슨 족이 들이닥쳐 아버지와 농장 식구들을 죽이고 여동생을 납치해 갑니다. 아퀼라 자신도 2차로 들이닥친 주트 족의 노예가 되고요. [칼과 십자가]의 이후 내용은 마다의 세계가 더 넓어지면서 그가 또 무엇을 잃어버리는가 하는 데 집중되어 있고 [횃불을 들고] 에서는 잃어버린 것을 어떤 형태로건 되찾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서 분명히 이야기 자체의 분위기는 [칼과 십자가] 쪽이 더 어둡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둘 중 어느 쪽에 더 짙은 비관주의가 깔려 있다고 해야 할까에 대해서는 잠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다의 세계에는 '우리 편' 이란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마다가 그 사실을 학습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이 이야기를 ABE 전집이 보여 주는 '인생의 쓴맛'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는 이유입니다. ) 마다는 분명히 머리가 좋고 언어적 재능이 뛰어납니다. 다만 순진할 뿐.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세계에서 순진함이란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차근차근 잘 보여 줍니다. 그가 우연히 입 밖에 낸 켈트 족의 주문의 힘을 과신한 바이킹들은 그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됩니다. 후에 바이킹의 배가 잉글랜드 해역에서 난파당했을 때, 그는 이전에 우연히 얻은 십자가 때문에 살아납니다. 눈 앞에는 해안에 떠밀려 온 조난자를 이교도 바이킹이라는 이유로 고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다는 십자가의 힘을 의식하고 이대로 크리스트 교인인 척 행동하기로 합니다.
교회에 안주할 뻔 했던 마다의 인생은, 교회가 그를 스파이로 쓰려 했을 때 또다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불태우는 것이 비단 이교도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또 박살이 납니다. 교회란 결국 선의 편도 무엇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마다는 '동포 크리스트교도' 중에서 자기가 본 가장 구체적인 악, 영주의 아들을 살해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아버지와도 같았던 엘드레드Aeldred 수도사를 잃고 맙니다. 그는 절망에 차서, 그 전까지 애지중지하던 아름다운 필사본들을 살해당한 엘드레드의 화장용 장작으로 불태운 후 뛰쳐나와 이리저리 떠돌다 산적 무리의 두목이 됩니다.
어둡습니다. 지나치게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마지막에 구원받습니다. 죽어가는 마다를 구해 준 은둔자는 그 어느 수도사보다도 크리스트 교 교리의 본질에 가까이 간 사람입니다. 마다는 처음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똑바로 보고, 죄를 사하는 신의 진짜 의미를 깨닫습니다. 저는 크리스트 교인이 아니라서 '참회'가 그 종교에서 어째서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그 중요성과 의미를 이렇게 잘 구현한 것도 드물리라고는 생각합니다.
아퀼라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닌니아스 수도사가 중요 인물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그냥 좋은 사람일 뿐입니다. 물론 아퀼라는 그에게서 온정 어린 도움을 수 차례 받습니다만, 제 기억에 따르면 닌니아스가 수도사가 자신의 신앙을 강렬하게 어필한 것은 딱 한 번으로 아퀼라에게 그의 원수를 '용서하라' 고 강권했을 때입니다. (사실 용서할 수밖에 없었지요. 죽었으니까.) 이것은 본문에도 나와 있었다고 기억합니다만 아퀼라는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속이 텅 비어 버렸을 뿐. 기억하시는지요? 그래서 그는 마음의 빈 틈을 메꾸기 위해 충성할 상대를 찾았고, 그게 아버지가 섬기던 암브로시우스Ambrosius Aurelianus였습니다. 딱히 그가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어서 택한 것도 아니고, 한 자리 얻을 수 있어서도 아닙니다. 그는 별 마음도 없이 그냥 주군이 시키니까 네스와 결혼했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른 이유라면 네스가 여동생을 닮아서겠지만...-_-;) 책 한 권 내내 이 아퀼라라는 남자는 너무 괴로움을 당한 나머지 동력이 끊어져 버린 선풍기 같은 상태로, 밖에서 바람이 불거나 손가락을 집어넣어 뱅글뱅글 돌리면 회전하기는 합니다만 스스로 움직이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410년경의 Roman-Britain 지도. 원본(1111X1497)
이야기는 다시 책 앞 부분의 불타는 농장으로 돌아갑니다. 로마 군단이 브리튼에서 떠나던 날. 살해당하는 그리스인 가정교사와 불타는 책 두루마리들. 아퀼라가 끝없는 전투에서 발견한 '그가 지켜야 할 것'은 '문명'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 끊임없는 전투는 지금까지 이룬 것을 뒤엎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국가' 라는 개념이 민족 혹은 씨족 밖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아직까지도 습득하지 못한 개념이지요.) 그는 로마의 군인이었지만, 브리튼 인입니다. 아퀼라의 공백 상태는 그가 하고 있는 싸움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작가의 장치입니다. 아퀼라의 아내 네스는 색슨 족입니다. 보티건의 세 아들들이 귀순해 왔을 때 암브로시우스는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지켜야 할 것은 함께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모양을 이루는 브리튼이라는 나라입니다.
[횃불을 들고]는 결말에서 극적인 성취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는 채로 시간은 사람들을 닳게 합니다. [칼과 십자가]의 일본어판 제목인 [끝없는 싸움果てしなき戦い]은 [횃불을 들고] 쪽에 더 잘 어울리는 제목일 지도 모릅니다. 암흑이 덮쳐오면 남는 것은 오직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입니다. 지키지 못해도 지키려 했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로마 군단이 떠나가 버린 브리튼의 바닷가를 비추던 루투피에Rutupiæ의 등대처럼.
Trivia
1. 로즈메리 서트클리프의 책들은 번역도 되었고, 이것저것 구해 읽어 봤지만 피터 카터 쪽은 전혀 정보가 없었는데, 이번에 조사하면서 [Children of the Book]이란 책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17세기 비엔나 공성전을 배경으로 하는 진지하고 어두운 책이라는군요. 표지나 제목이나 정말 읽고 싶게 생기지 않았습니까?
이 이야기는 ACE88 전집에 [운명의 아이들]이란 제목으로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
2. 여기저기 하고 다닌 얘기입니다만, [횃불을 들고]에서 보티머Vortimer의 죽음은 너무나 탐미했다고 생각됩니다(...)
3. 두 권 다 좋아하는 책들이라 리뷰 쓰면서 지나치게 기분 낸 거 맞습니다. : 3
4. 카터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는 진짜 없습니다. 모 저널에서 카터의 책에 대한 글을 하나 찾았고 [REPRESENTATIONS OF ANGLO-SAXON ENGLAND IN CHILDREN'S LITERATURE] 라는 누군가의 96페이지짜리 석사논문을 읽을까말까 하고 있었지요.
5. 또 지난 겨울 글입니다. 이 글을 쓴 후에 [횃불을 들고]의 새 번역본이 나왔지요.
표지나 번역자나, 굳이 사야 할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