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티에 라탱
사토 겐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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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시대가 느껴지지 않아.
이 작품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는 지역색이 있다면 일본이요, 시간대가 있다면 20세기일 겁니다. 이런 종류의 기술을 당대 사람의 '회고록'의 번역이라고 우기려는 시도는 어불성설이에요. 너무나 무모합니다. 이 작가는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전공자의 함정' 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대사각하의 요리사]에 의하자면 프렌치 요리사가 하는 요리는 다 프랑스 요리라지만 역사 전공자가 쓰는 소설이 다 역사소설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16세기 파리의 디테일을 엄청나게 늘어놓고도 이렇게 시대가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니 이것도 나름대로 재능입니다. 저같은 디테일 마니악에게 이런 소리를 듣는 것도 굴욕이고요! ;ㅁ; 뭘 하고 싶었는지, 작가의 의도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받쳐주기에 이 소설은 너무 가볍습니다.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은 비단 유머 탓만도 아니지만, 저런 식으로밖에 *유머*를 창출해낼 수 없는 작가라면 해서는 안 될 시도 같기도 하군요.


실존인물 1, 프랑수아 1세 (1494-1547)
소설에서는 엄청난 미남이라고 쓰고 있는데 이 초상화를 아는 사람은 좀 당황스럽습니다.

 가장 문제는 역시 캐릭터입니다. 기본적으로 등장인물들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데 실패했기에 그들의 행동 동기에 대해서도 한없이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게, 한 명을 제외하고는 설정이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인 것도 아니라고요! '이해할 수 없는 놈' 설정이 붙은 건 딱 한 명인데 그 놈은 또 너무나 빤하단 말입니다. 저는 '한없이 초인에 가까운 캐릭터에게 인간적 흠결이랍시고 알량한 약점을 덧붙이려는 시도' 를 너무나 싫어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 경우를 그리스 비극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약점이라는 게 '여자에 약하다' 수준일 경우에는 정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를 모르겠어요. 이 책의 마지스테르 미셸은 의도상 그런 초인이 분명한 캐릭터입니다만 결과는...흠, 요즘 말로 하자면 비웃깁니다. 뻘쭘해서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어요. 제가 소설에 대해 '시파 못 봐주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의 8할이 '남자 주인공이 역겨워서' 인 걸 감안하면 이번엔 정말 길게 참았습니다. 코로나corona한 캐릭터가 멋져 봐야 얼마나 멋질 수 있겠느냐는 못돼처먹은 생각도 들기는 했지만...


실존인물 2, Saint Ignatius of Loyola (1491-1556)


실존인물 3, Saint Francis Xavier (1506-1552)
'조각난 남자'

화자 드니 쿠르팡을 제외한 나머지 '실존인물' 캐릭터들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두서없이 성격과 일화를 들이밀기는 하는데 너무 가볍고 피상적입니다. 등장할 때마다 거의 매번 '그 이름도 유명한' 수준의 수식어를 다는데, 앓느니 죽지. 그들의 논쟁이라는 것의 연출도 정말 미간을 부여잡을 수준이고, 이해가 안 가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습니다. 다만 드니 쿠르팡 캐릭터는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형식에는 조금 문제가 있지만 감정의 변동이나 사고 레벨은 아마 저 시대 사람들 평균을 훌륭하게 구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_-; 이름값만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얕은 속셈이 보인달까,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너무 생각이 부족합니다. 세계에서 찾아온 지성들이 모인 카르티에 라탱의 이야기인데도, 제가 사랑하는 달콤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흔적조차 없고 말이죠.

Trivia
1. [바로크 사이클]에도 등장했던 소시지 케이싱이 당연히 여기서도 등장. 방종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역사가 길고도 길다?!
2. 일본어판 표지 하나.

뭐든 저 한국판 표지보다 나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표지는 정말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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