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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아리아나 프랭클린 지음, 김양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실은, 이 책의 뒷표지 및 광고문구를 보고서 '너무 낚는 것 같아서' 보지 말까 생각했던 소설입니다. 낚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너무 저를 개인적으로 노린 것 같은 작품이라고요. 12세기라는 배경이나 작가의 Ariana Franklin이라는 농담 같은 필명이나... 읽는 동안 미친 듯이 뿜으면서 몇 구절 인용해줬더니 친구가 '니가 쓴 거 아니냐' 고 말하더군요. 내가 그렇게 중세 밝히는 사람인 줄 아나. -ㅂ-=3
...맞지만...
캐드펠 시리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매 권 내용이 똑같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중세 영국이 너무 깨끗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그럴 리가 없잖아...중세의 위생적 아수라장에 대해 잠시라도 진심으로 고찰해본 적이 있는 작가들이 쓰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유머를 곁들인다면 래리 고닉의 만화처럼 되겠고 진지하고 담담하게 서술한다면 [도둑맞은 혀] 처럼 될 겁니다. [죽음을 연구하는 여인] 에서 중세 영국은 적당히 지저분하고 상당히 야만적이며 매우 광신적입니다. 한 마디로 제가 '중세적' 이라고 말하는 특징들-실은 21세기 한국에서도 매우 쉽게 찾아볼 수 있는-이 모두 살아 있는 땅 되겠습니다. 사라센 문명권이나, 이탈리아 반도의 국제도시들의 상대적으로 문명화된 상태와 비교하면 더더욱.
이 소설은 살레르노 출신의 여의사를 이런 영국에 데려와 팽개친다는 작가의 사디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이 상황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반응은 기대보다 지극히 가볍고, 좀 지독하게 소박한 기숙학교에 떨어진 응석받이 부자집 딸의 상황보다 더 심각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아요. 이런 타입의 전문직 여자 주인공은 까딱하면 무결한 잔 다르크가 되어버리기 쉬운데 기러기털 매트리스와 푸른 채소와 비단 속옷에 집착하는 아델리아는 명백히 소박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고 그 점이 이 캐릭터에게 아주 약간의 입체성을 부여해 줍니다.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역시 나폴리의 시몬과 헨리 왕(헨리 2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로 'Art'가 붙어야 할 것은 아델리아보다도 나폴리의 시몬 쪽입니다. 그는 유능한 밀정이자 비밀경찰로, 밀고 당기는 심리학의 기법을 적절히 사용해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내고 그가 원하는 정보를 얻어냅니다.
Henry II of England
본문에 언급된 헨리 왕의 '사치스러운 마누라'는 유명한
아키텐의 엘리너이고, 제 기억이 맞다면 캐드펠 시리즈에서 스티븐 왕과 미친 듯이 싸워대던 마틸다(모드) 여왕이 헨리의 어머니입니다. 어쨌든 이 사냥꾼 왕은 토머스 베케트 대주교의 머리를 박살내버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영국 왕과 그의 교회는 대개의 경우 언제나 피터지게 싸워 왔다는 느낌이 드는데(별로 종교적이지 않은 이유로.) 헨리 왕은 이 일로 폭군 취급을 받았고 토머스 베케트 대주교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_-; 헨리가 이 책에서 말하는 정도까지 결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기분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케임브리지의 끔찍한 연쇄살인이 그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뭔가 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바다를 가로질러 이런 큰 일을 벌인 까닭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Schola Medica Salernitana : A miniature from
Avicenna's Al-Qanun fi al-Tibb(The Canon of Medicine).
아델리아가 하는 수사보다도 더 매혹적인 것은 그녀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체득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으로, 잠깐씩 언급되는 살레르노의 의과학교실 풍경은 흥미롭고,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인 그 도시의 거리 모습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이 설레게 합니다. 작가는 물과 하늘과 바람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이 시절의 브리튼을 잘 살려내고 있는데, 그 점이 다소 경박한 문장이나 캐릭터를 용서할 수 있게 합니다. 하긴, 문장이 경박해 봤자 [다 빈치 코드]에 비할 바는 아니고, 라이트노벨도 읽는데 무슨 대수냐 싶을 정도이며, 여주인공이 너무 *여주스럽다*고 해 봤자 근래 한동안 접한 성격 이상한 여주인공들(이를테면 [벌집에 키스하기]의 베로니카 레이크)에 비하면 정말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프란 색 언더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오버하는 중세 여의사 정도야 저기에 비하면 귀엽지요.
500페이지가 넘는 책입니다만 굉장히 빨리 읽히며, 페이지수 때우기로 씌어졌다고 생각되는 지루하게 늘어지는 부분은 없습니다. 경박함과 속도감은 역시 양날의 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 대단한 추리적 요소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범인이구나 생각되는 놈이 그냥 범인입니다. -_-;) 결정적으로 에드워드 고리의
[The Loathsome Couple]을 연상케 하는 범인들의 묘사는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며, 특히 그 중 한 쪽의 최후에 대해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강렬한, 중세적 광기에 대한 매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 공동체여. 눈가리고 아웅인지 완벽한 해결책인지 모르겠지만...
핫하더라구.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게 제일 좋았던 것은 '상스러운 수녀' 같은 표현이나(데굴데굴 굴렀습니다) '더러움과 고양된 정신과 성서를 인용할 수 있는 능력은 신성함의 증거였다' 같은
못돼처먹은 문장들이었습니다.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