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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아이들 ㅣ 네버랜드 클래식 30
찰스 킹즐리 지음, 워릭 고블린 그림, 김영선 옮김 / 시공주니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이가 들어 어린이책을 다시 보기 시작한 데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출판 시장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어린이책이니 상대적으로 물량이 많고 원하는 책을 구하기 쉽다는 것이 장점이기는 했군요. 실제로 타운젠드의 [어린이책의 역사]에서 보고 솔깃했던 책들 중 많은 수가 (현재 구할 수 있든 아니든 간에)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좀 놀랐었습니다.
Charles Kingsley (1819 – 1875)
타운젠드가 '완벽하지는 않은 걸작' 이라고 말했던 이
[물의 아이들]은, 정말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철 들고 나서 읽은 어린이책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철 들고 나서 읽은 모든 환상문학 작품들 중에서도 분명히 상위권에 듭니다.
찰스 킹즐리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성직자이고 과학자였으며, 사회적 현실에 대한 관심과 따뜻한 유머까지 갖춘 사람이었을 겁니다. 이 책 속에 아동의 노동을 착취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비판이나 대안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고, 그저-작가가 속해 있지 않은 문화권의 언어로 표현하자면-측은지심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킹즐리의 시대에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결심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급진적인 사람인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다윈의 학설에 대한 지지를 보낸 것이나 이런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이나, 분명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이었던 킹즐리는 [물의 아이들] 속에서 여전히 훌륭한 성직자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물의 아이들]은 기독교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요정과 정령의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 톰의 수난이나 그라임즈 씨의 운명 뿐만이 아닌 여러 가지에는 분명히 기독교적 관념이 들어 있습니다. '(아이들이)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거나 톰도 안 들었으면 좋았을' 표현 속에서가 아니면 하느님의 이름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소년인 톰, 순수한 (아마도 기독교도) 소녀 엘시, 그라임즈 씨처럼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어른들의 죄를 다루는 방식은 각각 다릅니다. 톰이 첫 번째 죽음을 넘어 '물의 아이'가 되고, 이번엔 물의 아이로서 또다시 준비된 고난을 거쳐 새로운 '삶'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는, 글쎄...다른 걸 연상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
![](http://pds8.egloos.com/pds/200802/27/82/a0008982_47c4f0be55aeb.jpg)
워릭 고블, The Great Trout Rushed at Tom
하지만 킹즐리의 요정들은 톱니바퀴로 움직이고(은유라고 할지라도), 물의 아이가 된 톰에게는 (양서류의 것과 같은) 아가미가 생기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하고 즐거운 일만 하던 사람들은 곧바로 지옥에 떨어지는 대신 역진화 과정을 거쳐 다시 유인원이 되고 맙니다. 새로운 삶을 얻은 톰이 갖게 된 훌륭한 직업은 다름아닌 과학자입니다. 온갖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를 비롯한 해양 생물에 대한 킹즐리의 묘사는, 정밀하고 사실에 근접하려 애쓴 것이면서도, 건조한 설명의 나열을 피한 아름답고 정교한 비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남한테바라는만큼너도하라'요정Mrs.Doasyouwouldbedoneby의 모습처럼 구체적인 묘사를 피하려 했던 대목조차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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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아이들과 '남에게한만큼너도받으리' 요정Mrs. Bedonebyasyoudid
워릭 고블은 그려넣지 않은 아가미가
이 제시 윌콕스 스미스Jesse Wilcox Smith의 그림에는 그려져 있습니다.
한국어판 첫머리에서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차별적 요소를 언급하고 있지만, 실제로 작품을 읽어 보면 킹즐리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아시아인도 미국인도 아일랜드인도 아닌, 동포 잉글랜드인임이 명백해집니다. :] 현실에 존재하는 부정적인 요소들에 정면으로 비판을 가하지는 않는다 해도, 눈을 감고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이 책을 읽은 아이들은 당장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삶의 씁쓸한 측면을 보았을 때 킹즐리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될 테지요. 기독교적 인내와 선행과 반성 이외의 구원의 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불만이지만, 돼먹지 않은 어른들을 두들겨패는 '기계적 장치' 가 있어야 한다고 킹즐리가 생각했다면, 정말로 놀랍습니다. 21세기 한국에도 없는 장치지만요.
무엇보다 이 책이 그려내는 풍경은 정말로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삽화도 좋아요. 한국어판은 워릭 고블Warwick Goble의 그림을 채택하고 있는데, 그의 그림은 분위기도 묘사도 내용과 꼭 어울리고, 아름답습니다. 가끔 너무 그리고 싶은 것만 그리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만...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즐거운 이야기이고(좀 으악 싶은 내용도 있기는 합니다만), 킹즐리의 서술 테크닉은 너무 뛰어나서 저는 모처럼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습니다. 상냥한 영국 할머니의 목소리로요.
Trivia
1.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원문 전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략만 훑어봐도 한국어판에는 꽤 많은 생략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동화를 읽을 때 줄거리보다도 그 미칠 듯한 디테일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으셨던가요? 괜히 모두가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2. 제시 윌콕스 스미스에 대해서는 [북풍의 등에서] 이야기를 할 때 언급했지요. 이쪽도 멋있어요. 워릭 고블 쪽은 아름답고, 윌콕스 스미스는 박력있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원문의 묘사에 충실한 것은 제시 윌콕스 스미스 쪽의 묘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제시 윌콕스 스미스 버전 표지로 쓰였던 부표의 톰.
![](http://pds8.egloos.com/pds/200802/27/82/a0008982_47c4f4516d9cc.jpg)
연어와 톰. 워릭 고블의 송어 그림과 비교하며 보면 즐겁습니다.
달을 바라보는 톰 :
![](http://pds8.egloos.com/pds/200802/27/82/a0008982_47c4f231bb7a4.jpg)
워릭 고블, Fairy, Baby and Moon
![](http://pds8.egloos.com/pds/200802/27/82/a0008982_47c4f272009a4.jpg)
제시 윌콕스 스미스, Water Baby and the Moon
3. 알라딘의...이번에는 일러스트레이터의 한국어 표기가 틀렸습니다. 워릭 고블Warwick Goble입니다. 퍼스트 네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고블린'은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만...
4. http://librivox.org/에서 [물의 아이들]의 무료 오디오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잠깐 접속이 안 되더라도 파일이 나간 게 아니니 당황하지 말라는 공지가 있군요. (200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