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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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읽은 최고의 책이다. 그런데, 이제 고작 1월인고로 그다지 어필이 안 될 것 같고,

작년 연말에 읽었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2012년 최고의 소설로 꼽았을 작품이라고 말해야겠다.

미국인이 아닌 제 3세계인으로서 겪은 9.11의 이야기다. 그간에는 미국인의 시선이 주였는데.

그래서 궁금하고 끌렸다.

 

파키스탄 출신인 찬게즈는 프리스턴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최고 경영 컨설턴트 회사 언더우드샘슨에 들어간다. 입사 이후로도 탄탄대로를 달리던 찬게즈는 순조롭게 미국 상류 사회로 진입해 달콤한 생활을 누린다. 첫사랑을 잃고 아픔과 상처속에 살아가던 여자친구 에리카도 만나게 되지만, 미국 월드트레이드 빌딩이 무너져내린 이후로 찬게즈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고, 에리카는 다시 자신의 상처 속으로 침잠해버린다. 나는 어디에 있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하던 찬게즈는 결국 파키스탄으로 돌아가서 '근본주의자'가 된다. 에리카는 끝내 잃어버린 채로.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쌍둥이 건물이 하나 둘 무너지더군요. 그 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그래요 혐오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의 첫 반응은 놀랍게도 즐거움이었어요. 

...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그 공격의 희생자들을 생각한 게 아니에요. ... 나는 그 모든 것의 상징성에 빠져들었던 거죠.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지루한 예의 바름 말고요. 정중한 예의 바름 말이죠. 당신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줘요. 나는 정말로 그게 좋아요. 흔하지 않은 일이에요.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어요. 나는 처음으로 그 뒤에 뭔가 부서진 것이 있는 걸 보앗어요. 확대경을 통해 봐야 보이는 다이아몬드의 작은 금처럼 말이죠. 보통 때는 보석의 휘황찬란함에 가려져 있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녀가 얘기했던 보석을 만들게 했는지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보는 건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것들은 시간과 대상을 골라 스스로 밝히는 법이니까요.

무의식적으로 그(필리핀 운전사)와 나는 일종의 제3세계적인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더군요. 그런데 내 동료중 하나가 나한테 뭔가를 물었어요. 내가 그에게 대답을 하려고 몸을 돌렸을때,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나는 그 -금발에 옅은 색 눈,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부적인 일에 몰두하는 표정-를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너는 정말로 이국적이구나. 나는 그 순간, 내가 그보다 필리핀 운전사와 훨씬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거리에 있는 사람들처럼 집에 가야 하는데, 내가 연극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맞아요. 내 생각은 황량했지요.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내가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네 나라가 다른 나라 일에 계속 관여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베트남, 한국, 타이완 해협, 중동, 그리고 이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말이죠. ... 게다가 나는 파키스탄인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미 제국이 힘을 행사하는 주된 수단이 재정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원조와 제재를 번갈아 하면서 말이죠. 그런 지배의 과업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건 옳은 일이었어요. 놀라운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거였어요.  

한국이 등장한다. 이 부분을 읽을 때는 내가 왜 찬게즈처럼 제 3세계적인 감성을 공유할 수 있었는지를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이 소설은 파키스탄을 방문한 한 미국인에게 찬게즈가 식당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된다. 중간중간에 그 보이지 않는 미국인때문에 긴장감 속에서 읽게 된다. 말하자면 파키스탄 웨이터의 험상궂은 인상에 겁내고, 누가 눈길만 줘도 소매치기일까 지갑을 챙기는 제스쳐를 취하며,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의심하고 겁내는 미국인을 계속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당신들은 해치지 않아요'라고 계속 얘기해주면서. 그러면서 독자를 향해 묻는다. 당신들도 이렇지 않냐고. ...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겁내고, 무서워하고, 화내고 있지 않냐고.     

 

150 여 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소설인데, 작가는 일부러 분량을 조절했다고 한다. 두꺼운 책 한 권을 읽는 대신 이 책을 두 번 읽어달라고. 나는 이렇게라도 남겨놓으려 책을 뒤적거리면서, 이미, 거의 두 번을 읽었다. 그리고 흥분해서 두 명의 친구에게 기프티북을 보냈다.

 

다른 작품도 올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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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16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도 무언가 깨닫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고 돌아서 가지 싶어요.
작은 하나를 보면서도
곧장 깨달으면 아름다울 텐데요

북극곰 2013-01-17 16:12   좋아요 0 | URL
네~
어려우면 어려운 일이고,
쉽다면 쉬운 일인데 말이죠.

icaru 2013-01-18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까 근 2년(2012,2013)중에 최고의 책이란 거죠 ㅋㅋㅋ
와 디게 궁금해요~ 파키스탄 엘리트 청년을 통해 듣는 9.11
사진 이미지도 바꾸셨어여~ 굴곡이 있어보여, 얼핏보고 잘 그린 풍경화일줄 ㅋ

2013-01-18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4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가요 엄마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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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성인용 성장소설같단 생각을 한다. 엄마를 잃고나서야 깨닫게 되는 엄마의 인생, 엄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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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2-1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뿐 아니라, 자유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지요.ㅠㅠ
12월 19일, 닥치고 투표~ 2표!^^

북극곰 2012-12-20 08:41   좋아요 0 | URL
잃고나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네요.
어제는 제 인생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허망하고 어이가 없어서 잠이 안 왔어요.
 
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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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치명적인 매혹 뒤에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건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주는 것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인건가? 간만의 은희경,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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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11-2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옴마나 저도 두근두근 다음이 태연한. 으로 이어지는 독서를 했는데 어쩌다 보니 같은 출판사 책 읽기 독서가 됐더라고요. 근데 확실히 북극곰 님은 저보다 성숙한 오픈 마인드 독자세요. 전 남자 주인공이 맘에 안 들고. 여자 글어니까 류는 지나치게 이상화 신비화(?)하여 그려진 것만 같아서 진도가 잘. ㅠㅠ

북극곰 2012-11-20 08:55   좋아요 0 | URL
와, 정말요? 연이어 인생이야기를 읽는구나 했었는데. 이카루님도 그러셨군요? <새의 선물>을 읽고 은희경 참 좋았었는데 뒤에 나온 소설들도 계속 비슷한 느낌이라서 한동한 전혀 안 읽다가 이번에 우연히 읽은 거거든요. 간만이라 그랬는지 이번엔 좋더라구요.

근데요, 남자 주인공의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면을 묘사하는 부분이 저랑 비슷한 구석들이 좀 있어서 놀랐답니다. 제가 좀 삐뚤어진 면이.... ^^

마녀고양이 2012-11-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의 선물> 읽고 한번도 은희경씨 작품을 안 읽어본거 같아요.
그런데 북극곰님의 100자평이 너무 멋진걸요? ㅋㅋㅋ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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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처럼 저렇게 아스라하게 몽실몽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슬픈 앤딩으로 책장을 닫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읽는 동안 침울하게 가라앉진 않았다.

조근조근하고 담담하고 능청맞고 착하고 이쁜 책이다. 아니, 이쁜 아이다 아름이는.

부러 극적이려들지 않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건네는 김애란식 이야기가 좋았다.

 

장씨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읽을 때 나는

감기로 병원에 간 아이 둘을 기다리면서 쇠고기 무국을 끓이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이런 작은 일상에 감사해하며.

'너보다 더 아픈 나를 보면서 너가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난 그것도 감사해.'라는 아름이의 말에 일순 찔리기도 했고. 젊음과 나이듦은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했다.

아름이가 경험하지 못한 많은 '경험'들도 생각했다.

 

그리고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 얘기가 나왔을 때

나는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가 그 사실을 무척 미안해하며 자식들에게 고백하셨는데

나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잘하셨다고 했다. 서둘러 아빠를 배웅이라도 하려는 듯.

그게 사무쳤고 미안했다. 

막상 마지막 순간이 되니 아름이는 너무너무 무서웠고, 그렇게 사람이 그리운 적이 없었다고 했다.

또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도 나를 기다리셨을까. 무서우셨을까.

그래서 나는 국 위로 보글보글 뜬 기름을 건져내면서

그만 목놓아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아름이는 '까꿍'하고 사라졌지만, 사라져도 그 자리에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걸 안다.

나는 어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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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2-11-19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읽으셨구나. 재빠른 행동력!!!
리뷰 읽으니까 저도 덩달아 몽글몽글
목놓아 우셨다니, 아 ㅡㅡ 전 이름이가 아빠에 대해 하는 말중에
나를 낳은 다음에 누굴 이겨본적이 없다는 말이 잊혀지질 않더라고요.
꼭 아름이의 상태 때문이 아니라 그게 부모 마음이란거지 싶고.

북극곰 2012-11-20 09:05   좋아요 0 | URL
맞아요. 부모된지 얼마 안되었어요
부모.라는 게 이런 거구나라는 그런 맘..

이카루님 리뷰보고 냅다 주문했지요. ^ 책지르는 날은 스트레스 받은 날입니다. ㅠ.ㅠ
 
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고전 독서법 진경문고
정민 지음 / 보림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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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면 다 아는 내용인데 어쩜 이리 흡인력이 있을꼬.

'독서'와 관련된 책은 묘하게 끌린다. 

다른 사람들은 '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읽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책읽는 내 모습'과 비교하기도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기도, 되새기기도 하고.

어린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정민 선생의 진정을 잘 알아주었으면 싶다.

나는 근래에야 책읽는 재미는 알게된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긴 했는데,

마르고 닳게 읽던 동화책이나 컬러학습대백과 이런 책들을 빼고,  

커서 읽은 책들은 너무 겉만 핥아댄 것 같아

참으로 허송세월하였구나 싶다.

아직도 기억나는 허송세월의 대표작은

대학교 1학년 때 읽은 '마의 산' 과 '푸코의 추'.

그마나 '마의 산'은 좀 나았던 듯도 한데,

'푸코의 추'는 진심 한 단락이라도 이해를 했던가 싶다.

마냥 '끝까지 읽고 말겠다'는 오기 말고는 하나도 없었던 독서.

그러니 이런 독서는 읽었으나 안 읽은 독서.

 

돌이켜보면 폭풍독서를 하던 시기들이 있었다.

고 1때와 대학교 1학년 때, 그리고 둘째는 낳고나서 약간 우울증기가 있었던 때.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모두 현실도피용이었던 것 같다.

저녁 8시 반에 취침하던 중 3학생이 겨울방학을 지내고나니

저녁 10시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해야하는 고 1학생이 되어 있었고

나와 맞지 않는 학교 리듬에 내 바이오리듬을 억지로 맞춰사느라(난 새벽형 인간이었던거다! ㅋ) 

고전했던 고 1때, 미친듯이 읽었고,

원하던 대학이 아니고 어쩌다?보니 가게 된 대학교 1학년 때

그 상실감을 달래려고 또 미친듯이 읽었다.

이번 달은 몇 권 읽었넵. 하고 스스로 자랑하려는 욕심만 과해서

하나하나 깨쳐보겠다는 생각도,

조분조분 따져보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이런 독서도 읽었으나 안 읽은 독서.

ㅠ ㅠ

 

(라고 말하려니 왠지 슬프고도 억울해,

그래도 나의 뇌 어느 구석에 무의식 속에라도 박혀 있을거라 또 위로를 덧붙인다. ㅋ )

 

지금은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 시간을 조각조각내서 그 참에 읽는 책맛은 얼마나 단지.

읽다보면 조금씩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은 또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일을 평생,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말이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 걸려 알게된 독서의 즐거움을

안내해주는 책이니 이 책은 강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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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22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받아들이거나 헤아릴 수 있는 책을 읽으며
마음을 깊이 다스리면
나중에는 어느 책이든 다 읽을 수 있어요.

즐거이 읽고 삶을 누리셔요~

북극곰 2012-10-23 09:00   좋아요 0 | URL
조금씩 깨달아갑니다.
이런 책을 읽다보면 나도 이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는 아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