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공에서 앨라배마까지 - 2012 뉴베리상 수상작 ㅣ 한림 고학년문고 25
탕하 라이 지음, 김난령 옮김, 흩날린 그림 / 한림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의해 함락될 즈음, 하 가족은 베트남을 탈출해서 미국으로 간다.
모든 게 낯설고 우호적이지 않은 새로운 곳. 열 살 하는 이렇게 말한다.
"때때로 평화로운 앨라배마보다 전쟁 중인 사이공에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베트남을 떠날 준비를 하는 장면에서 폭풍 눈물을 쏟았다.
한 보따리만큼의 물건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두고 가야한다면 나는 무엇을 담을까.
남겨진 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라는 상상만으로도 슬퍼졌다.
시로 담아낸 간결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길게 풀어쓴 이야기보다 훨씬 더 감정적으로 와 닿았다.
상황을 직시하고 또박또박 지적질하는 꾸앙 오빠는 가끔 통쾌했고,
부르스 리를 흉내내는 부 오빠는 든든했고,
병아리의 죽음에 슬퍼하는 섬세한 코이 오빠는 안스러웠고
욱하면서도 당당하고 재잘재잘대는 막내딸 하는 무척 귀엽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싱그러웠다.
그리고 남편은 전쟁 중 실종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이 모든 아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의 현실.
시 쓰고 멋만 내고 살았던 엄마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며,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며 억척으로 살아내야 했던 삶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엄마의 심정으로 이 아이들을 바라보니 또 눈물이 또르르....
------------------------
....
외할아버지도 뒤따라오실 예정이었지만
외할아버지는 아들인 외삼촌을 기다리는 중이었고
외삼촌은 외숙모를 기다리는 중이었고
외숙모는 일주일 뒤에 태어날
배 속에 든 아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바로 그 주에
남과 북이
문을 닫아 버렸다.
더 이상
왕래도 못하고
편지도 안 되고
가족을 만날 수도 없었다.
---------------------------
...
고구마 꼭지를
엄지손톱만큼
잘라 내려다가,
마음을 바꿔서
손톱 초승달만큼만
잘라 내기로 한다.
음식을 아끼는
내 알뜰함에
스스로 대견해서
마음이 뿌듯했다.
엄마의
깊은 눈에 맺힌
이슬을 보기 전까지는.......
"에그...... 우리 딸,
반 입 거리도 안 되는
고구마 꼭지
아까워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에서 자랐어야 하는데......."
-----------------------------------
...
모두 알고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이 배가
마치 개미집이 붕괴되어
미친 듯이 기어오르는 개미들처럼
꾸역꾸역 올라타는
사람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것들.
하지만
그만 태우라고
할 만큼
매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자신들 바로 앞에서
줄이 끊긴다면
그 심정이 어떨지
다들 짐작하기 때문이다.
---------------------------------------
...
엄마가
카우보이의 친절에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하시자,
꾸앙 오빠가 한 마디 한다.
그건 미국 정부가 후원자들에게
지급한 돈이라고.
엄마가
미국 정부의 관대함에
더욱 놀라며 고마워하시자,
꾸앙 오빠가 또 한 마디 한다.
그건 전쟁에서 패한
죄책감을 덜기 위한 거라고.
엄마 얼굴이 불붙은 종이처럼
잔뜩 구겨졌다.
엄마가 꾸앙 오빠를 꾸짖는다.
그 입 다물라고.
"다른 사람의
호의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정치적 의견 따위는 다 배부른 소리야.
이래저래 따질 여유가 없는 거야."
--------------------------------
...
한 아주머니가 옆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기 머리는 도리도리.
난 동정받는 게 싫어서
뒤로 물러섰다.
동정받는 사람은 기분 나빠도
동정하는 사람은 기분 좋다고
엄마가 그러셨거든.
----------------------
...
"얘들이 나를 쫓아다니고,
나한테 '부-다, 부-다' 소리 지르고,
팔뚝 털을 잡아당기고,
팬케이크 얼굴이라고 놀리고,
교실에서 나를 툭툭 쳐요.
그래도 제가 참고 기다려야 해요?
저는 그 애들을 때리면 안 돼요?"
"오, 내 딸아,
때때로 싸워야 할 때가 있단다.
하지만 되도록
주먹이 아닌 다른 방법을 쓰도록 하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