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없는 대안 원자력 발전 공학과의 새로운 만남 22
신부용 지음, 황주호.이임택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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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2003년 여름에 시작되어 한해가 넘도록 지속되었던 부안 방사성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 유치 반대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부안 사태', 혹은 '부안 민란'이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정부와 부안군민 사이의 갈등은 깊었고 격렬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군민들이 모여 촛불시위와 상경집회를 벌였고, 정부와 부안군청을 향한 분노는 전․의경들과의 마찰로 번져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4년 1월 정부가 주민투표법을 공포한 이후로도 1년 여간 계속되었다. 결국, 새로운 방폐장 부지를 선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 갈등은, 농사를 짓거나 구멍가게를 하던 평범한 시민 43명이 구속되고, 지역 공동체가 분열하는 상처로 계속 이어졌다.

부안의 갈등은 이제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 국민들 사이에 핵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방폐장 설치를 둘러싼 갈등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것은 1990년 안면도, 1995년 굴업도를 비롯해 20여 년간 무려 8차례나 시도했으나 실패한, '숙원의 국책 사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아니, 상처가 아물어가는 지금이야 말로, 허심탄회하고 진지하게 핵과 원자력, 그리고 에너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시기이다.

이런 노력에 갈등의 두 주체였던 정부, 국민과 더불어 에너지 전문가들의 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어떤 지역에 방폐장을 설치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현재 전체 에너지 소비의 15%에 불과한 원자력 발전의 향후 전망과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며, 그에 앞서 "핵과 원자력 발전은 안전한가? 그리고 필요한가?"라는 국가의 에너지 전략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부용 박사의 <대안 없는 대안 원자력 발전>이 놓여진 자리가 이곳이다. 저자는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리장 부지선정위원으로 활동한 분으로서, 전문적 지식과 더불어 일선의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방폐장 설치의 첫 번째 쟁점은 시기였다. 국책사업을 20여 년간 미뤄왔던 정부에게도, 하루  아침에 방폐장 유치 결정을 접한 부안군민들에게도 시기 문제는 절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안군 내의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은 논외로 하더라도, "방폐장 설치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찬성측과 반대측의 의견은 달랐다.

하지만, 시기와 관련한 문제를 살피는 것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선, 에너지란 공기와 같아서, 우리에게 너무나 가깝고도 먼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루도 전기나 석유와 같은 에너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에너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은 월말의 사용료 고지서를 받아볼 때가 고작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기 이전의 에너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전기와 석유는, 우리가 사용하기 쉽게 가공한 최종적 형태의 에너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너지가 어디로부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1차 에너지는, 45%가 석유, 24%는 석탄, 원자력과 LNG가 각각 12%와 14%, 물이 나머지 1%를 차지하고 있다. 한눈에 석유와 석탄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석유와 석탄 같은 1차 에너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원들을 거의 대부분 수입하고 있으며, 그중 석유의 수입량은 세계 4위에 달한다.

시기의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에너지 자원을 자급자족하지 못하는 이상, 한국의 에너지 전략 역시, 세계 에너지 상황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에너지 확보 경쟁이야말로, 석탄과 석유 자원의 고갈 정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석유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받으며 중동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역시 러시아와 합심해 중동에서의 석유 확보에 들어갔다. 일본은 지방자치단체장들까지 나서서 시베리아, 아프리카 할 것 없이 세계 방방곡곡을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세계 4위에 달하는 한국의 석유 수입량은 단지,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의 70%가 총성 없는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나머지 30%만이 우리 스스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 이것이 바로, 30%의 절반(14%)을 차지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 전략이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자력 발전의 시기 문제는, 단지 원자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지속가능한 에너지 공급 전략에 관한 문제이며, 해외 의존 비율을 줄여 좀 더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청정에너지․그린에너지와 같이 '환경 친화적' 이라는 수식어를 독차지하고 있는 에너지 발전 역시, 환경의 영역에서 벗어나, 에너지 공급 전략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두번째 쟁점은 안전성이었다. 안전성은 시기 문제 보다 더 뜨거웠던 쟁점이자 중요한 쟁점이었다. 부안군민들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에 대해서 불신하고 있는 것이 무시하지 못할 사실이었고, 여기에는 1979년 미국 스리마일 섬과 1986년 구(舊)소련의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의 기억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물론, 국민들의 여론이 절대적 다수라 해서 그것이 곧바로 올바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불신이 전적으로 무지로부터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원자력 발전은 방사능 누출 위험이 있으며, 폐기물은 방사능이 약한 것조차도 최소 300년을 관리해야 하며, 수명이 다한 발전소를 폐기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란 드럼통에 새겨진 검은색의 방사선 심벌마크가 주는 인상과 달리, 그것은 모든 물질을 이루고 있는 원자핵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우리 생활과 극단적으로 분리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방사선의 강도이며, 우리는 이미 일상적으로 약한 강도의 방사선을 쬐고 있다. 우리는 방사선의 강도를 인위적으로 조정해 X선, CT 촬영에서와 같이 의료 보조용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갑상선 치료, (방사성 물질인) 라돈 목욕탕, 등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방사선을 이용하는 기관은 전국에 걸쳐 2,500여개에 달할 정도이다.

물론, 원자력 발전에는 의료용 이상의 강도가 사용되며, 높은 강도의 방사선은 신체에 여러 가지 악영향과 더불어 사망에 이르게 할 위험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의 원료로 사용되는 순도 2~5%의 우라늄235 그 자체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터질 수가 없다. 이는 마치 맥주와 같이 알코올 함량이 낮은 술에 불이 붙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따라서, 스리마일 섬이나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에서도 사고의 원인이 된 것은 원료 자체가 아니라, 원료를 발전하는 원자로의 결함이며, 흔히 오해하는 바와 같이, 방사선에 과다 노출되어 사망한 이들에게서 유전에 따른 기형출산과 같은 사고는 없었다는 것이 공식적인 조사 발표이다.

이렇듯 쟁점이 되었던 '시기'와 '안전성'의 문제는, 좀 더 면밀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나무를 석탄이, 석탄을 석유가 대체했듯이, 원자력이 석유를 제치고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떠오를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원자력 역시, 19세기와 20세기를 풍미했던 석탄 석유가 그러했듯이, 과거의 에너지원이 가진 단점을 보완하면서 더 높은 효율을 제공하는 기술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자력 에너지의 광범위한 이용과 특성을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제는 기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개발했고 이용하는 사회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기술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이득이 될 수도 손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자력 발전이라는 인류가 발명한 기술을 한국 사회의 소통 구조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저자 역시, 방폐장 설치를 둘러싼 논의 구도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타국의 에너지 경영 사례들과 반핵운동의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

저자는 스웨덴의 사례를 강조하고 있는데, 한국과 같이 지하자원이 부족하고 동시에 공업국이라는 점에서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스웨덴에서는 탈(脫)원자력을 목표로 하고 있으나, 대체에너지가 개발될 때 까지는 한시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운용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화력과 대규모 수력 발전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 현재 50%를 원자력이 40%를 수력이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정당과 국민 사이에 충분한 논의를 통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국민들은 고비용의 청정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비용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갈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들은 스웨덴의 사례를 인용하고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 GDP를 비롯한 양국의 경제적 능력은 물론이며, 국가 예산의 쓰임새를 비롯한 국민 복지의 차이가, 스웨덴과 한국을 단순 비교할 수 없는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국민들이 국가의 장기적인 미래를 위해 청정에너지 사용에 따르는 고비용을 투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의식수준과 더불어 우선적으로 경제적 능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정당이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해 정책으로 입안, 시행하는 것은 분명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다.

한국 정부 역시, 오랫동안 원자력 발전의 안정성과 보완대책을 강구해왔다면, 원자력 발전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설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생명과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국민들의 가치관과 에너지 발전은 한가지만을 선택하는 제로섬(zerosum) 게임이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 채널을 마련하고, 저자와 같은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도록 권장해주어야 한다.

저자가 비판해 마지않는 반핵운동 단체 및 환경운동 단체에 대해서도, 과도하게 사법처리 운운하기 보다는, 끌어안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국가 에너지 전략의 로드맵은 정부와 시민단체, 국민과 지방자치단체까지 광범위하게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옛 격언이 있다. 치열해지는 국제사회의 에너지 경쟁에 패배해 암흑천지가 될 것이라는 극단적 위기론 보다는, 합리적인 의사소통 구조 속에서 국민적인 에너지 경영의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것이야 말로, 2003년의 부안과 같은 국가적 갈등을 줄이고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에너지 선진국이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저자의 노력이 빛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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