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성경을 자기 것 만들면 3천년을 산 것과 같죠”
한국의 책쟁이들/⑪ ‘토라 연구가’ 이기대씨

임종업 기자
  
  


» 그한테 책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무림의 숨겨진 비급처럼 철저하게 몸과 영혼의 단련과 연결돼 있다. 일단 체화하고 나면 반복해 읽기와 명상에 필요한 원텍스트를 제외하면 모두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가. 그의 책들은 알맹이를 빼먹고 던져두어 생긴 조개묻이처럼 쌓여 있다.

책은 왜 읽는가? 답을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물음 자체가 괘씸한 질문이다. ‘왜 사느냐’처럼…. 책이 있으니 그냥 읽을 뿐 무슨 이유가 있는가, 라고 일축하기에는 뒤끝이 찜찜하다. 한번이라는 삶의 무게가 너무 큰 까닭. 목적이 왜 없겠는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마른 들풀도 의미없는 존재가 아닐 터인데….

겉 모양만큼이나 속 생각이 다르나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왜’라고 자문할 수 있어 비인간과 다르다. 빈도와 깊이가 차이있겠지만. 이번 책쟁이는 그 ‘왜’를 새삼스럽게 돌아보게 한다.

이기대(49)씨. 서울 서대문구청 7급 공무원으로 관내 거주 외국인의 등록관리, 증명발급 등이 그의 업무다. 취업, 유학, 초청비자 등으로 90일 이상 국내 체류하는 외국인은 주소지 변경 등 중대한 변동사항이 있을 경우 14일 이내에 관할구청 또는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 터. 그가 상대하는 사람들은 70%가 연희동에 집단 거주하는 화교이고 나머지는 일본인, 미국인, 중국동포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하니 그한테 맞춤할 법하다. 그의 특이점은 제3 외국어 히브리어도 능통하다는 사실. ‘제3외국어 히브리어’에 그만의 ‘왜’가 숨어있다. 그는 자신을 토라연구가라고 소개했다.

“당신의 정의는 영원한 정의, 당신의 법은 언제나 진실됩니다.(시편 119편 142절) 여기서 ‘법’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는 ‘토라’입니다. 토라는 좁게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넓게는 구약성서 전체를 말하죠. 그러니까 성경은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히브리어-한국어 대역성경을 펼쳐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진리는 생명으로 가는 길잡이이자 생명 그 자체입니다. 성경에는 진리가 감춰져 있지요.” 그는 모든 종교 가운데 ‘민 하샤마임’, 즉 하늘로부터 온 것은 토라뿐이라고 믿는다. 그한테 토라를 읽고 행하는 삶이 곧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에무나(믿음)와 에메트(진리)의 어근은 ‘아만’(믿는다 라는 동사)입니다. 믿음과 진리가 분리되지 않는 거죠.”

그는 성서를 100번 이상 읽었다. 원래의 히브리어로도 줄줄 왼다. 어디에 무슨 구절이 있고, 그 구절이 무슨 뜻인가 원어로 꿰고 있다. 관련 자료도 구할 수 있는 한 다 보았다고 말했다. 기독교(신약), 이슬람교(코란)의 원전이나 관련 자료도 두루 섭렵했다.

‘토라’가 진리라고 믿는 공무원

“유월절에 해야 할 일을 규정한 출애굽기 12장 가운데 흠없는 수컷 양을 해질 무렵에 잡으라는 구절이 있는데, ‘해질 무렵’이라는 번역은 분명히 오역입니다. 원어에는 ‘베인 하알바임’ 즉 ‘두 저녁 가운데(between the evenings)’라고 되어 있어요. <탈무드>를 보면 첫 저녁이 오후 3시, 둘째 저녁이 오후 6시입니다. 그러니까 베인 하알바임은 오후 3~6시죠.”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숨지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사건이 오후 3시에 일어났으므로 토라에서 말하는 유월절 희생양과 일치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만일 번역을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기독교에서 예수를 희생양으로 믿는 근거가 사라진다!

“모세가 던진 지팡이가 변해서 뱀이 되었다고 하지요? 히브리어로 ‘탄닌’인데, 그 말은 경우에 따라 뱀, 악어, 개구리 등 다르게 번역돼 있어요. 유대교 회당의 랍비도 어느 것이 정확한지 모르더군요. 탄닌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런 것도 흥미로운 연구 대상입니다.”

그가 토라의 세계로 들어가기는 1986년. 구청 직원으로 공무원에 첫발을 디딘 이듬해다. 여러 가지 책을 보다가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눈이 머물고 결국 유불선과 기독교 등 종교를 거친 끝에 유대교로 귀착되었다. 당시 일본으로 철수한 이스라엘대사관 소개를 받아 미8군 영내 미군과 군속을 위한 유대교 회당과 끈이 닿았다. 당시 랍비 필립 실버스타인(현재 유대인목회자연합회장)의 호의로 매주 그곳을 출입하면서 유대교에 깊이 빠졌다.

100번 이상 읽었다는 성서는 너덜너덜해져 책등이 완전히 꺾였고 쪽쪽이 붉은 줄이 죽죽 그어져 있다. “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베에트 하아레츠.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창세기 1장1절) 성서 첫 구절이 일곱 마디죠. 신이 천지와 안식일을 창조한 날수와 일치해요. ‘행운의 7’은 여기서 유래했어요. 그리고 ‘베레쉬트’를 거꾸로 문자치환해서 읽으면 ‘티슈리베알렙’ 즉 ‘티슈리월 1일’이 되지요. 유대 민간력 1월1일입니다.” 그의 달변은 계속됐다.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행위의 옹호에 이르기까지.

그는 책과의 인연을 기적이라고 했다. “마음으로 원하는 책은 모두 얻어 보았어요.”

행자부 한국지방자치단체국제화재단의 중국 주재관으로 베이징에 32개월 동안 머물 때는 초면의 남경대 유대학연구소 쉬신 교수한테서 중국어본 유대백과사전을 받았다. 남경 중화기독교협회를 통해서는 보기 힘든 두 상자 분량의 기독교 자료를 구입했다. 신과 인간, 우주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유란시아>라는 책은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사업가한테서 소개받았다. 한참 도교에 빠졌던 20대에는 국립도서관 고문서실에서 본 필사본 <황정경> 말미 “정성을 다해 황정경 100독을 하면 <대동선경>을 만나리라”라는 메모를 통해 <대동선경>을 만났다. 그 책은 희귀한 도교경전으로 한국 첫 도교사찰인 ‘도관’을 연 박병극씨가 큰절을 하고 그한테서 복사본을 얻어갔다. 그가 이렇게 책을 말하는 것도 기적을 짓는 일이 아니겠는가. 언뜻 무협지 같은 얘기다.

한문 실력 뛰어나 무협지 200종 번역

1978~79년 그는 실제로 무협지 200여종을 번역했다. 신당동 쪽에 있던 대룡각이라는 출판사. 입사시험을 치러 서울대 출신자와 함께 합격했다. 고교 때 별종 취급 받을 정도로 한문을 잘했고 졸업 무렵엔 백화문을 줄줄 읽을 정도의 실력이 바탕이었다. 당시 대룡각은 쌍벽을 이루던 무협지 출판사 중 하나로 편집부 상근자가 10여명. 그는 한달 두 종꼴로 2년동안 번역했다. 주로 와룡생의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공무원 봉급이 10만원 안쪽일 때 그의 한달벌이는 40만원이었다. 책이 잘 나가면 전체 직원이 삼겹살 불고기로 회식을 하고 5만~10만원의 금일봉이 주어졌다. 번역자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근사한 도사이름을 썼다. 무협지는 유불선, 연애, 원수갚기가 세 축. 초식은 도가, 격식은 유가, 원수갚기의 출가는 불교와 관련돼 있다. 그는 세 가지 축과 뿌리를 알면 무협지 번역은 아주 부드럽다고 말했다.

“독서는 정보를 얻고 연구를 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죠. 그 다음은 명상과 기도로 이어집니다.” 만일 성경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하면 3천년의 지혜를 얻는 것이고 3천년을 산 것과 같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생활패턴만 바뀔 뿐 삶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것. 요즘 연구논문들은 95%가 인용이고 자기얘기는 5%에 불과하다고도 말했다.

얼마나 책을 읽으면 이런 주장을 자신있게 펼치는가. 그가 가진 책은 두 평 베란다에 꼬깃꼬깃 300권이 전부다. 나머지, 아니 몸통은? 2000년 12월 중국주재관으로 떠나면서 4톤 짐차에 가득실어 충북 진천의 이삿짐 보관센터 창고로 보내고 6년째 보관료를 물고 있다. 형편이 나아지면 짐을 찾아와 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희망으로 그칠지도 모를 일. 한때 책들은 모이고 쌓여 베란다에서, 거실로, 안방으로 쳐들어왔다. 빨래를 널 수도 없고, 나중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어두침침했다. 아내는 이렇게는 못 살겠다며 이혼하자고 몇번을 을렀다. 결국 이삿짐센터로 간 책들은 무기한 유배에 처해졌고 그 이후의 책은 베란다에 유폐되었다. 이씨의 책은 이씨의 방문을 넘을 수 없도록 돼 있다. 만일 그곳을 벗어나면 책임 못진다는 무서운 아내의 엄포 탓이다. 그래서….

집에는 300권만…창고 보관 6년째

그는 일단 구득한 책은 다 읽는다. 읽지 않을 책은 사지 않는다. 읽는 속도가 빠르니 어느 책이어도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잡식성. 그한테 책은 종이와 활자로 보관하는 물건이 아니다. 읽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책 이야기는 결국 종교, 인생으로 이어지고 묻는 자와 대답하는 자가 뒤섞었다. 못다한 얘기는 배웅길에도 이어졌고 쿵후의 발차기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오십 나이에 이런 자세가 나오는 사람이 있느냐면서. 그한테 책은 몸의 책이다. 어쩌면 무림의 비급처럼, 배우고 익히는….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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