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의 계급 투쟁을 소개하는 이유

- 동유럽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이야 말로, 동유럽 정권들의 특징을 비추는 조명.

- 일부 서유럽 좌파들은, 1956년 헝가리 혁명과 1968년 체코의 항쟁을 반혁명으로 치부. 이들은 1960년대 소련에 대한 환상이 사라졌을 때 조차도, 중국, 쿠바, 베트남, 등에 대한 환상에 매달림.

-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은 1950~60년대 동구권의 혼란과 유사함. 경제적 위기를 치유하려는 몸부림으로 개혁을 추구하지만, 개혁에 동반되는 사회적 격동을 두려워하여 개혁을 포기하는 상반된 두 길 사이에서의 동요와 갈등.

(1) 스딸린은 왜 일국사회주의를 주창했나

- 혁명을 지키는 과정에서 사멸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사멸. 레닌의 발병과 죽음 이후에 기존의 사회세력들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넓어짐. 1919년 당시의 볼셰비키의 단 10%만이 남게됨. 이들은 죽거나, 탈당하거나, 숙청당함.

- 크리스 하먼에 의하면, 스딸린은 혁명을 확산시키기를 거부하고, 소련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함.

- 스딸린의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1924년 그가 집필한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등장한다. 그의 주장에서도 일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잡은 것이 곧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러시아와 같은 농업국가에서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위해서는 몇몇 선진 국가 노동자들의 조력이 필수적이었다.

- 신경제정책 도입 이후에 볼셰비끼당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경제 정책의 근본적으로 노동자 계급 권력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일국사회주의론은 당내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론은, 비록 당장은 어중간한 상태였지만, 뜨로쯔끼와의 투쟁을 위한 이론적 무기로 고안되었다.

(2) 국가자본주의의 성립 배경과 특징은 무엇인가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 “우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50년에서 100년 정도 뒤져 있다. 그 간격을 우리는 10년 안에 없애야 한다.” 스딸린주의에 대한 공포가 서방의 산업혁명에 대한 공포보다 더 크다고 한다면, 그것은 스딸린이 영국과 같은 국가에서 2~3세기에 걸쳐 진행된 과정을 20~30년의 기간 안에 해치우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 1947년 말, 공산당의 통치체제가 안정된 이후, 불가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에서 광범위한 국유화가 진행되었다.

- 소련은 기존의 방침을 변경하여 독일 루마니아 헝가리 등에서 산업설비를 차출하거나 합작회사, 불공평한 무역, 등의 방식으로 배상금을 물림.

-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자들의 경쟁상의 필요 때문에 생활수준을 희생해야 하고 생산성을 증대시켜야 한다는 판에 박힌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는 것이다.

- 전후 토지개혁은 대지주 소유의 토지를 소지주 소유로 전환하였으나 이어진 농업집산화를 통해 다시 국가의 수중으로 집중시켰다. 그러나, 생산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방식의 집산화는 강제적인 산업화를 위한 것이었다.

- 산업화는 자신들의 경제발전 방식을 그대로 동유럽에 강요하려 한 소련 통치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강제적인 산업화가 실행. 경제 통합 시도는 없었으나 소련의 필요성에 따라 종속적 관계로 설정. 이는 유럽의 마샬 플랜에 견줄 수 있음.

(2) 전후 동유럽 국가들의 재건과정 (한국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겠다)

- 전전 동유럽 경제는 경제위기 속에서 나치즘을 비롯한 우익들이 주도하고, 산업 역시도 해외자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함. 자본주의 초기 국면에서 사적자본의 취약한 면모를 보여줌.

- 전쟁의 시작과 함께, 나치와 제휴하거나(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저항(체코, 폴란드). 제휴한 국가들에는 주요 산업과 은행이 독일로 흡수되거나 독일 경제와 유기적으로 맺어짐. 전후에 국가의 역할이 불가피.

-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과 소련의 점령지 분할 논의. (루마니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각 국의 공산당은 모스크바의 지시를 이행. 서유럽에서 나치의 통치를 대신하게 된 체제들이 미국과 영국 자본주의의 통제 하에 구축되었듯이, 동유럽 체제들의 성격은 소련의 통치자들에 의해 결정되어진 것이다.

- 1947년 말, 공산당의 통치체제가 안정된 이후, 불가리아와 헝가리, 루마니아에서 광범위한 국유화가 진행되었다.

- 1948년, 체코에서 기존 지배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를 공산당이 제압.

- 노동자들은 위로부터의 국유화와 아래로부터의 국유화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별다른 저항 없이 공산당의 집권과 경제정책이 수행될 수 있었음.

(3) 2차 세계대전 전후의 동유럽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의 관계는?

- 전쟁 전의 동유럽 공산당들은, 나치의 탄압과 소련에서 일어나고 있던 숙청 바람에 맞서 간신히 생존을 유지.

- 소련 공산당의 입맛에 맞게 유지된 소수의 공산당은, 전쟁 후에 기존의 국가기구(군대, 경찰, 관료기구)들을 파괴하기 보다는, 인수하면서 연립내각의 형태로 집권세력 진출하게 됨. 이들은 사회 혁명을 수행하기 보다는, 정상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고자 함. 이들은(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기존 기득권 세력들을 옹호. 실제 노동자 계급의 운동에서 지지를 받고 있던 정당(폴란드 사회당)이나 운동가들, 항쟁은(바르샤바 봉기) 나치 경력을 지닌 자들보다 더욱 심하게 박해. 당의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서 특권을 빌미로 당원 가입폭을 확대. (1945년 폴란드 공산당 당원 30만, 체코 115만, 루마니아 80만)

- 1947년 공산당이 사회 장악.

- 1948년 유고슬라비아의 티토가 스딸린과 결별한 이후, 대규모적인 숙청이 진행. 모스크바의 지배에 충성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판단의 잣대가 되어, 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각국 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체포, 투옥, 처형, 처벌을 받았다.

(4) 프라하의 봄을, 단순히 자유화 운동이라고 지칭해서는 안된다.

- 1950년대 소련과 동유럽은, 유고 중국과의 불화, 유고 알바니아 루마니아의 독립으로 혼란스러웠고, 대규모의 숙청이 자행되고 있었다. 소련에서는 흐루시초프가 스딸린주의를 비판하고 나섰다.

- 1960년대 초반, 50년대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산업이 생산이 한계에 봉착함. 1963년 신경제모델은 경제의 경쟁력을 목표로 함. 개혁주의자들은 경제개혁의 실패를 정치적 요소(지역당 당수, 공장 관리자)의 탓으로 돌림.

- 노보트니의 반대파들은 학생과 지식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함.

- 1960년대 들어 제한적인 자유화 조치가 시행. 두브체크를 비롯해 새로 집권한 관료들은 전임자(노보트니)들을 강도높게 비판하자, 언론, 집회를 비롯한 토론과 논쟁이 열리면서, ‘국민전선’이라는 정치조직이 생겨나기도 했다.

- 1968년 8월, 소련군과 4개국의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 침공하면서, 10월과 11월 대대적인 시위가 발발. 1969년 얀 팔라치의 분신자살 이후 80만명의 대중시위로 발전.

- “두브체크가 공산당 당서기에 당선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자유화 개혁을 실시했다” 라는 편견

- “프라하의 봄은 소련의 침공에 맞선 체코슬로바키아 정권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저항이다”라고 보는 편견: 체코슬로바키아의 두브체크 정권은 당내 보수파(친소 세력)들과의 권력싸움을 위해, 프라하의 봄(정치적 불안정을 빌미로 한 소련의 침공)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을 이용했다. 두브체크 정권은 처음에는 파업과 시위를 금지했지만, 후일 제도기관을 통해 소련의 침공을 비난하며 이를 옹호하는 당내 보수파를 고립시키고, 소련 주도의 연립정부 구성을 막아내는데에 성공했다.

- 두브체크는 소련과의 협상을 마무리 지은 이후, 본국으로 돌아와 당권력을 재확립하는 ‘정상화’ 조치들을 취했다. 이 과정에서 검열은 강화되었고, 경찰과 당 관료계통의 명령계통은 정비되었으며, 당내 보수파는 축출, 언론의 자유는 축소되었다.

- 작가동맹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어떤 적절한 정치 프로그램도 공식화시키지 못하고, 결정적인 정치 주도권을 공산당에게 넘겨줌.

- 두브체크의 사임과 함께 개혁파들은 몰락함. 후사크를 비롯한 기존 관료세력이 재집권.
- 동유럽의 지식인들 또한, 동유럽 사회와 1948년 쿠데타에 대한 모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함.

- 노동자들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정치적 요구안에는 쉽게 동감하지 못하다가, 관료제적 통제기구가 혼란에 빠지자 노동조합 민주화를 요구하며 투쟁하기 시작함.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어쩔 수 없이 하부조직의 자치권 증대를 용인.

(5) 혁명의 일반법칙은 무엇인가

- “낡은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성장한 구성원들은 낡은 사회의 사상을 상당 부분 공유한다. 그들이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은 과거의 유산으로 인해 압박 받는다. (중략) 노동자 계급이 이러한 상황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계급 내부의 양극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 “정기적인 선거를 치르고 현장 노동자들의 작업장 회의에 소환권을 부여해야만 일반 노동자의 대표자가 자신을 선출해 준 사람들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개혁파들의 대부분은 권력보다는 차라리 개혁을 포기하고자 했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두브체크의 개인적 변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대부분의 개혁파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태도였다.

- 가장 급진적 지식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조직이 발전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역사에서 잘못된 교훈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은 역사가 이미 거쳐 지나온 길을 다시 밟을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 노동자계급이 정치 위기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한 이상, 그들의 입장은 적대적으로 될 수 밖에 없었다.

- 당장의 강렬한 소망을 제외하고는 후속 조치에 대해서 제각각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 경찰기구의 개혁은 상당한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 과정이 관성에 따라 발전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찰은 자신의 지위 유지 욕망에 동기가 유발된다. 국가 주도 테러가 있을 때는 그것에 전력을 다하지만, 정치적으로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어느 쪽 편도 들려고 하지 않는다.

- 개혁시기 대중들은 시큰둥해 했지만, 지식인과 작가, 기자, 등 직업상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해야 하는 자들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 대중이 처음 행동 시작할 때, 전통적 관례 때문에 낡은 사회에서 자신보다 약간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을 대표자로 선출하는 경향이 있다.

- 어떤 계급집단도 단 한번의 자발적 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한꺼번에 인식할 수는 없다.

- 반대파의 주류는 비교적 특권층에 속하면서 정치적 영역에 실제적 통제를 가하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로 구성.

- 파업은 총체적 승리의 무기가 아니다. 그 적도 자신의 결정적인 이익이 위협받게 되면 파업을 이겨낼 수 있다. 총파업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파업이 봉기로 전화했을 때 뿐.

- 그 전략은 항상 일정 시점까지는 성공할 수 있었다. 종종 미약한 노동운동은 국가의 정책에 관심을 두지 않고서도 힘을 키워갈 수 있다.

- 1919년 영국 생디칼리스트와 로이드 조지 “국가보다 더욱 강력한 세력이 등장할 때, 그 세력은 국가의 기능을 대신할 준비를 갖추든지 아니면 한걸음 양보하여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든지 해야만 됩니다. 신사 여러분, 당신들은 그런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 그들이 작아 보이는 문제들을 극복하는 데 성공하게 되면 그들은 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다.

- 대중운동은 노동자들이 경제적 투쟁의 승리를 통해서 정치적 투쟁에 대한 자신을 얻고, 나아가 정치적 승리가 경제적 성과로 연결된다는 생각을 가질 때만이 그 힘을 얻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감은 스위치를 조작하는 지도자에 의해 기계적으로 생겨날 수는 없다.

- 마르크스 “모든 무장봉기에서 방어는 곧 죽음이며, 적과 겨루기도 전에 패배로 빠지는 길이다. 적의 힘이 분산되어 있는 동안 적을 놀라게 해서 떨게 하라. 그런 식으로, 동요한느 분자들을 당신 편으로 끌어 들이라. 당통의 말대로, 대담하게 더욱 대담하게.”

- 뜨로츠키가 지적했던 것 처럼, 총검을 휘둘러 많은 것을 얻어 낼 수는 있지만 그 위에 영원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뭇솔리니와 히틀러는 순수 군부 정부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소부르주아계급의 대대적이고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1936년 프랑코, 1973년 피노체트 역시 마찬가지.

- 그 단계에서 승패의 관건은, 하나의 계급이 사회 전체의 문제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의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지도부가 형성되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 노동조합은 봉기 지지하지만, 지도할 수는 없다. 노동자 무장과 군 내부 세포활동을 위한 지하활동이 필요.

- 정당은 상대적 소수의 지식인과 노동자로부터 시작한다.

(6)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의 노동자자주관리

- 부하린 “만약 모든 공장이 그 공장의 노동자들만의 소유가 되는 상황이 된다면, 그 결과는 공장들간의 경쟁일 것이다.”

- “시장적 과정이 노동자들로부터 사실상의 의사결정권을 빼앗게 될 것이다.”

- “오직 전 노동자 계급이 통합되어 자치하는 사회에서만이 사회적 성격, 연대감, 보편성들이 명확히 드러날 수 있다. 특정 집단의 배타적인 자치는 국가주의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양분을 공급할 뿐이다.”

(7) 1953년 동독의 투쟁, 1956년 폴란드(노동자평의회 운동), 1980년대 폴란드(생디깔리즘의 한계, 자주관리 운동의 한계, 민족주의, 교회), 1956년 헝가리(노동자평의회 운동)

- 전후 소련의 통치에 맞선 투쟁. (한국의 상황과 비교할 수 있다.)
- 임금삭감안 폐지와 자유선거 실시 요구, 감옥의 습격과 당사에 대한 방화 경찰 린치
- 사회주의통일당(SED) 울브리히트 “불순분자들이, 공장에서, 건축 부지에서, 전차에서, 버스에서 그리고 공공 장소에서 연좌파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거짓말로 사회 불안을 확산시키려 한 것이 목격되었다.” 사회민주당 계열 분자들의 행위 때문이라며 숙청
- 서독정부 “봉기의 목표는 친서방적인 것이었다.” 소련 탱크 공격 직후 서베를린 경찰이나 노동조합 본부 등지에서는 무기 지원 거부,
- 소련군 25000명 투입, 267명 사망 1300명 재판 회부
- 대량의 양보정책 개혁정책, 질서 회복된 후 많은 부분 취소

- 1956년 6월. 포즈난 노동자들.
- 대규모 시위, 경찰서 급격, 수감자 석방
- 모스크바 “제국주의자들과 폴란드의 반동적인 지하첩자들은.. 혼란을 선동하고 거리의 소요를 야기시켰다.”
- 고무우카는 소련의 군사위렵에 대해 대중봉기로 맞설 것 처럼 위협함.
- 700여명의 진보주의자 명단 작성해 체포, 폴란드군과 소련군 합동작전, 소련 군함 출현
- 1956년 10월. 소련군 철수
- 10월 좌파
- 개혁정책: 식량증산과 소비재 부문 투자, 노동자 경영참여 / 노동조합과 노동자평의회 내에 당원들 침투.
- 1958년 2월 파업 금지, 4월 노동자평의회 의회 종속, 10월 10월 좌파 활동 금지

- 1971년 5개년 경제발전계획. 주요 서방 산업은행과의 거래. 80년대 들어 외채 늘어나.
- 1980년 3월 그단스크 조선소의 파업. 1,000만 조합원
- 임금인상, 출산휴가, 정치범 석방, 노조결성 권리 승인
- 1980년 12월 소련군 투입
- 당 지도부: 정치적 활동이 부정부 상태를 만들고 있다고 공격. 노조 내부에는 과격분자와 모험주의자들이 있다고 비난.
- 연대노조는 총파업을 취소.
- 경제학자들의 개혁안. 중앙집권계획을 폐기하고 각 기업 별로 스스로 생산목표 설정하고, 자금 조달 책임질 것.
- 생디깔리즘이 모순에 처하면서 바웬사는 연대노조 본연의 민주적 방식을 없애려 함.
- 군의 야루젤스키 이 개입하면서 정리. 파업금지법 상정. 연대노조 지도자 체포

- 1956년 6월 폴란드 포즈난 시위 이후, 10월에 임레 나지 복권
- 작가동맹을 비롯한 중간계층이 주도한 시위. 소련과의 관계, 경제의 독립, 노조 민주화, 농업의 자치권, 정권 교체, 등을 요구
- 광범위한 노동자평의회가 건설. 평의회 임원은 대다수 젊은층.
- 서방 좌파들: 호르티를 추종하는 반동분자들과 서방의 첩자들이 선동한 반혁명
- 소지주당,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들은 정계개편에 중점을 둠.
- 소련군 철수, 연립정부 수립, 자유선거 약속, AVH 검거, 헝가리 중립화 선언, 국민방위군 창설(중앙 국가위원회 설립)
- 소련과의 협상이 진행중이던 11월, 헝가리 대표단이 소련에 체포. 소련군 재투입
- 12월 노동자평의회 임원 전원 체포, 일부 사형

(8) 권력구도

- 소련: 스딸린 / 흐루시쵸프, 말렌코프(1954년 제거)
- 헝가리: 라코시 / 임레 나지 – 그란디오스 투자계획 취소, 개인 경작 허용
- 폴란드: / 고무우카, 기에레크 – 야루젤스키

(9)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간단하게 말해서, 흐루시쵸프는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계급의 이익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된 권력기구와 그와 결부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체계를 파괴하려 했던 것이다.

- 그가 맞이했던 가장 심각한 어려움은 그가 낡은 신화를 파괴해야만 하면서도 동시에 통치를 담당한 사람들의 권력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 이 사건으로 인해 헝가리(1956)와 폴란드(1956)에 큰 영향을 미친다.

(10) 축적은 국가자본주의에서 더 많았다

- 1949~1955년 사이에 축적은 국가자본주의에서 40%로 더 많았다. 서구는 20%.

(11) 1956년 폴란드 고무우카 정권 아래 소련군이 퇴각한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아이작 도이처 “일종의 아래로부터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발전하여 스딸린주의의 오명을 씻어낼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했다” 만델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폴란드에서 승리하기까지는 많은 전투를 남겨두고 있지만, 수백만의 노동자가 다시금 자신들과 노동자 국가를 동일시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전투”

- 고무우카는 수감되기 직전 충직한 스딸린주의 비밀 정보부원, 사회당 농민당 파괴에 주요한 역할

(12) 노동자평의회

- 평의회가 진정으로 최고 권력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개별 공장에 흩어져 있는 평의회가 하나의 평의회 체계로 탈바꿈해야만 한다. 낡은 관료적 행정기구에 종속적이거나 의존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

(13) 자주관리 운동

- 개별 기업들의 자치권을 위한 협상이 아니라, 경제 전반을 장악하기 위한 운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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