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중앙일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 신계륜 당선자 인사특보, 이해찬 민주당 의원, 한나라당 소장 개혁파인 심재철, 김부겸 의원,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이들은 23년 전인 1980년 5월 15일 한 곳에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에 맞서 운동권이 격렬한 투쟁을 벌이던 당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여명이 결집한 서울역 광장 시위의 주역이 바로 이들이었다. 당시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엄청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기에 20대 초반의 우리는 너무 어렸고, 상황을 너무 몰랐다"고 말한다.

80년 5월 15일 서울역 부근 경찰 저지선에 시내버스가 돌진해 전경 1명이 숨졌다. 한 학생이 치켜든 플래카드에서 '경희대 복학생회'를 확인한 경찰은 현장에서 시위를 이끌던 문재인(청와대 민정수석 내정자)씨를 연행했다. 당시 경희대생 文씨는 75년 교내시위로 제적됐다 80년 복학했다. 문재인씨는 이날 청량리 경찰서로 연행된다. 그리고 며칠 만에 文씨는 유치장에서 사법고시 2차 합격 소식을 들었다. 경찰서장은 소주 파티를 열어줬고 경희대 재단이사장의 신원보증으로 文씨는 석방됐다. 文씨는 후에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일했다. 盧당선자는 20년 변호사 동업자인 文씨에 대해 "나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이라고 소개했다.

지도부는 흔들리고 있었다. 신계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철야농성이라도 벌이자.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시민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복학생 막내인 김부겸씨 등은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다. 일단 퇴각하자"고 했다. 함께 있던 서울대 이수성 학생처장(전 국무총리)도 "여기저기 알아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충고했다. 공수부대 출동 움직임이 전해지자 지도부는 결국 '회군(回軍)'을 결정한다.

80년에 이어 84년에도 구속됐던 유시민씨는 명문장의 '항소이유서'로 유명하다. TV토론 사회자로 활동하던 그는 지난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바리케이드 앞에서 화염병을 들던 심정으로'라며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다. 盧당선자는 이 당에 대해 "같은 여당이자 전략참모가들이 모인 곳"이라고 말한다.



'서울의 봄' 당시 구속학생 중에는 유종일 한국경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있다. 졸업 후 친형인 유종근 전 전북도지사의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했던 그는 지난해 '노연(盧硏.노무현과 함께 하는 연구자 그룹)'을 만든 핵심 주역이었다. 2001년부터 노무현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그는 지난 대선 때 盧후보의 핵심 공약들을 구상했다.



'서울의 봄' 주역들인 운동권 2세대들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지 않았다.
당시 숙명여대 형난옥 총학생회장(현 현암사 전무)은 "그때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친구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20년이 흐른 뒤인 2000년에 다시 모여 '봄날 동우회'를 만들지만 정기모임도 없고 연락조차 뜸하다.

80년 5월 17일에는 광주에서 대규모 민주화항쟁이 벌어졌고 신군부는 이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정권의 폭력성을 목격한 운동권 학생들은 과격해졌다. 화염병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지하서클에는 사회주의 혁명이론이 스며들었다. 노선투쟁도 치열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광주항쟁은 80년대 운동의 모태이자 학생운동 의식화.조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 첫 신호탄이 이른바 무림(霧林)사건. 파고 들수록 실체를 종잡을 수 없어 붙여진 이름이다. 80년 12월 11일 서울대 도서관 학생식당에 뿌려진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을 정부는 '명백한 좌경화'로 규정했다. 당시 선언문을 써 구속됐던 김명인씨는 현재 문학평론가로 우뚝 섰다. 고세현 창작과비평 사장, 현무환 웅진미디어 사장, 최영선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등도 함께 구속됐다. 구속자 중 서울대 토목공학과 학생이었던 윤형기씨는 학원가에서 전설적 기록을 세운 인기 수학강사다.

  

81년에는 학림 부림사건 등이 꼬리를 물었다. 노동운동 학생운동의 연대를 강조한 학림사건으로 이선근(민노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 민병두(문화일보 정치부장) 박문식(회계사)씨 등이 구속됐다. 같은 해 부산지역 대학생 21명은 불온서적을 읽었다 해서 구속됐다. 이른바 부림(釜林)사건이다. 盧당선자는 이때 부산대생 이호철(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내정자)씨의 변호를 맡으면서 운동권 책을 처음 접하고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노무현이 국회의원이 됐을 때 첫 보좌관이 이호철씨였으며 그는 지금도 당선자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중 한사람이다.

82년 3월 18일의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은 운동권에도 큰 충격이었다. '반미(反美)운동'이 갑자기 돌출한 데다 지나치게 과격하고 대담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고신대생 문부식(현 당대평론 편집위원)씨는 7년 만에 석방된 뒤 시인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文씨는 무림사건의 주인공 김명인씨와 공개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의 방화로 교내 진입 경찰 7명이 숨진 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보상심의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면서 벌어진 '80년대 반성 논쟁'에서다.
"성급한 결정이다. 진압경찰의 희생을 무의미한 죽음으로 몰고갈 위험이 있다." (문부식)
"새삼 '내 안의 폭력'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의 잣대로 80년대 인간을 몰아붙이고 학대하는 짓이다." (김명인)
운동권 내부의 과장된 명분론과 과잉 폭력을 경계한 文씨에 대해, 金씨는 당시 국가의 '거대한 폭력'부터 먼저 짚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82년부터 대학가 이념서클 사이에 벌어졌던 '사투(思鬪.노선투쟁)'는 NL(민족해방)대 PD(민중민주) 논쟁으로 이어졌다. 지하 유인물을 통한 이 노선 투쟁은 86년 자민투.민민투라는 별도의 투쟁조직을 탄생시켰다. 당시 지하 유인물 주인공들의 '오늘'은 다양하다. 85년 '깃발'을 쓴 문용식씨는 벤처기업 나우콤 대표이고, 함께 구속된 안병룡.황인상씨는 변호사가 됐다.

운동권 필독서로 70만부나 팔려나간 '철학에세이'의 저자 조성오씨는 41세에 사법고시에 합격, 현재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학생운동 조직화도 빠르게 진행됐다. 84년 학도호국단 대신 직접선거로 총학생회가 구성되고, 85년에는 전국 연합 공개조직인 전학련이 등장했다. 대규모 연합시위로 '학생회장=구속'의 관행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 서울대 마지막 학도호국단장인 백태웅씨는 '사노맹(남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오랜 투옥생활 끝에 현재 미국에서 사회운동 전반을 연구 중이고, 84년 첫 서울대 총학생회장 이정우씨는 현재 변호사다.

 

같은 해 고려대 김영춘 총학생회장은 민정당 중앙당사 점거 농성 사건으로 구속됐고 지금은 한나라당 의원이다. 전학련 초대 의장 출신 김민석씨는 재선의원을 거쳐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뒤 국민통합21로 옮겨가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김민새'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특별취재팀] 김창호 선임전문위원, 이철호 차장, 백성호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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