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라는 이름, 참노동자라는 이름 김승호씨를 찾아서
이인휘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징집돼 군대에 끌려갔다가 1974년 제대를 해서 돌아오니 암울하더군요. 서너 평짜리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고 있는 겁니다. 제대한 첫날밤 발을 뻗을 곳이 없어서 동생들 다 재우고 앉아서 잠을 자는데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더군요.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사회 변혁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았던 나였습니다. 하지만 경동시장에서 밥튀기 장사를 하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외면할 순 없었죠. 취직을 해서 뒷바라지를 했어요. 3개월 정도 일을 하는데, 미쳐버리겠더라구요. 내가 가진 놈들을 위해 일하려고 이제까지 고생했나 싶었죠. 선택을 해야 했어요. 가족이냐, 내 삶이냐.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습니다.

직장에서 받은 월급을 갖고 소리 없이 성남으로 갔어요. 당시 성남은 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지요. 어떤 대단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과 함께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거죠. 75년 여름 기술을 배우면서, 주민교회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이 병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사복’들이 문을 열어 젖혔습니다.
“손들어!”
그들은 내게 총구를 들이밀며 서울대 시위 사건의 배후 조종자를 찾았어요. 당시 김상진이가 ‘진정한 민주주의가 돼야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 자살을 했었거든요. 아마도 서울대 출신 요주의 명단을 작성해 조사하다 내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죠. 결국 그 사건과는 관련이 없어 풀어줬지만, 그들은 나를 끊임없이 감시했습니다.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떠나왔는데,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용납하지 않더군요. 그때만 해도 학생운동 인자들이 현장에 가는 것 자체가 보안법 대상이 될 수 있었거든요.

'문제는 학교다. 내가 비록 학교 생활 속에서 세상에 대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이젠 그게 너무도 힘든 짐이 되었구나. 끊자. 학생운동과의 모든 인연도 끊어버리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직장을 다시 잡고, 야간 기술 학원을 다녔습니다. 1년쯤 그렇게 생활을 하다가 기술이 있어야 공장에 들어가서 노동운동을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습니다. 77년 말쯤 직장을 버리고 양평동에 있는 금속 공장에 들어갔어요. 공장은 그야말로 비참한 환경이더군요. 정말 자고 먹고 일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삶 그 자체였어요. 그 곳에서 한 3개월 동안 현장에 대한 감을 익히고, 구로 공단에 있는 공장으로 이전했죠.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또다시 감시가 따라붙더군요.

이게 무슨 업보인가. 정말 지독한 놈들이구나. 이젠 학교와의 인연도 끊었는데 평생 저놈들 감시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니…. 합법적인 신분을 갖자. 몇 년 벙어리처럼 냉가슴 앓으며 지내면 나를 포기하지 않겠나. 좋다. 그런 생각으로 어용인 한국노총으로 들어갔어요. 78년 말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노총 섬유노조 말단 직원으로 들어가 교육 선전부 차장을 거쳐 교선 부장으로까지 올라갔지요. 처음엔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어요. 국장이란 놈이 이북에서 넘어온 안기부 프락치인데, 이놈이 내가 출근을 하면 24시간 감시하는 거예요. 놈들은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알면서 뽑은 거거든요.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는데, 이상스럽게 행동하면 골치 아프니까, 늘 감시를 한 거지요.

출근해서 화장실 가는 때를 빼놓고 책만 보는 일을 되풀이하다가 ‘동일방직 사건’과 ‘YH 사건’을 겪게 되었죠. ‘YH 사건’ 일어날 때가 내가 2년째 되던 해입니다. 국장이란 놈이 ‘YH’ 저놈들 빨갱인데, 빨갱이란 성명서 한 장 쓰자고 하데요.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그들을 빨갱이로 몰다니. 해도 너무 한다 싶어 국장이란 자와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자 직원들이 두 패로 갈라졌어요. 안기부에서 파견 나와 있는 놈들이 국장 쪽으로 달라붙고, 양심적인 직원들과 중간파까지 나를 응원했지요. 옥상에서 한판 붙자고 했지만, 싸움해 봐야 자기들만 망신당하는 꼴이 되니, 신경전만 매일 부려댔지요. 그러면서 지내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나고 10.26 사태가 터진 겁니다.

당시 노동운동 쪽에 관여하던 선배 그룹들을 만났지만 지켜보자는 결론만 들었습니다. 답답하더군요. 어차피 누군가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막혔던 숨통을 토해내듯 거리로 뛰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난 간염을 앓고 있었지만 가만 있을 수는 없었어요.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때가 눈앞에 닥친 겁니다. 쓰러져서 죽어도 좋다, 라는 각오로 6개월 동안 집도 안 들어가고 전국을 뛰어다니며 신규노조 결성을 서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5월 17일 서통노조를 결성했는데, 그 시각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겁니다.

다음날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데, 계엄선포가 된 거예요. 광주에서 전화가 불나게 오고, 19일엔 사람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비상이다! 선배들이 모였지만 또 다시 관망론이었습니다. 쿠테타가 분명하니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난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여동생이 직장생활로 모아 사준 어머니가 낀 금가락지까지 팔아서 모은 돈 40여 만원을 가지고, 00일보 원판 삭제 안 한 것을 빼돌려 복사를 하고 뿌렸지요.

하지만, 이미 거리는 얼어붙었습니다. 총을 맨 군인들이 거리를 장악하고 모두들 다시 어디론가 숨어들었습니다. 참혹했습니다. 노총에선 나를 일주일 무단 결근으로 처리해서 해임시켰습니다. 간염은 더욱 도져 몸도 무너지고, 마음은 황폐해져 어디에 둘 곳을 몰랐지요. 죽은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내 마음을 집요하게 괴롭혔습니다. 이제까지 세상을 읽고 대항해 왔다는 내 자신이 얼마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가를 한번에 보게 된 겁니다. 그토록 일사천리로 진행된 쿠테타를 모르고 있었다니…. 80년 겨울은 참혹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3개월 동안 투병 생활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이를 물었습니다.

딛고 일어서야 한다. 관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자. 10년 동안은 최소한 노동자, 민중으로서 철저하게 바닥 생활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노동운동 한다고 할 때, 학생운동과의 인연을 철저히 끊은 것처럼, 노동운동을 하면서 알던 사람들을 다 끊었어요. 몸이 회복되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죠. 기술을 배우자.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자. 보일러공 자격증을 따서 81년 제지 공장에 들어갔습니다. 그 곳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부인될 사람을 만났습니다. 광주항쟁을 통해 카톨릭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그 사람을 만나면서, 연인적 감정보다는 동지로서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6개월 정도 그녀와 만나면서 ‘노동계급’이 나서야 혁명이 된다는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이 참혹한 세상으로부터 좀더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이 되려면, 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지요. 우린 결혼하고 단칸방을 마련해서 우리부터 혁명의 세포가 되어, 철저하게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하자고 맹세했던 거지요.

서울대 시절,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저는 1949년 6^25가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울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기와집 하나 없는 산골 마을이었지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어릴 적엔 탄피 같은 것을 주어서 장난을 하며 자랐답니다. 증조부께서 장사를 한 돈으로 농토를 모아 아버지 대에는 농사를 지었지요. 50여 가구되는 마을에서 논 열 다섯 마지기와 밭 스무 마지기 정도를 갖고 있는 중농쯤 되었어요. 하지만, 종가집이라 형편이 넉넉치 못했고요. 제사 많고 예의는 다 차려야 하고, 고모 이모들 시집갈 때 땅 조금씩 나눠주고, 그러다 보니 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는 땅이 모두 없어졌어요.

전 국민학교를 만 다섯 살에 들어갔습니다. 한글도 모른 채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거죠. 그런데 1학년 끝날 때 1등을 했어요. 국민학교 시절 내내 일등을 하다가 중학교도 일등으로 들어갔죠. 아버지가 교편을 잡고 있었으나, 여전히 생계는 어려웠어요. 중학교 졸업할 무렵 형이 도망간 이유도 알게 됐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비를 못 내자 가출했던 겁니다. 깝깝하데요. 울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해 봤자, 서울에 있는 대학 들어가기는 하늘에서 별따기였습니다. 또 장학금을 받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고등학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자라면서 부모님들 간섭을 많이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내게 큰 축복이었지요. 고향의 그 아름다운 자연 환경과, 생활은 곤궁했지만, 대가족 속에서 정감 있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전 생각이 찌들지는 않았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날 불현듯 사람이 태어났는데 큰 물에 가서 한 번 놀아봐야 되지 않겠나 싶더라구요. 그래서 느닷없이 부모님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죠. 어릴 때부터 모범생이었고, 스스로 알아서 하는 걸 믿었던 탓인지, 반대 한 번 없이 천 원을 만들어주시더군요.

오백 원 차비하고, 오백 원 비상금을 찔러 넣고 가방에 옷가지 몇 개 집어 넣어서 서울로 향했습니다. 14살 먹은 시골 촌놈이 서울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새벽이더군요. 다행히 열차 안에서 만난 군인이 내 처지를 눈치채고, 형 주소를 보며 집을 찾아줬어요. 그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지금도 남아 있는 청량리 588 골목이었습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에 있는 이층 판자집에 딱 들어서니, 형이 대뜸 하는 말이 “니 임마, 왜 왔노?”입디다. 당시 형은 고물상에 기거하면서 엿을 팔고 있었어요. 판자집 이층에는 노인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기숙하고 있었고요.

서울 구경 한 번 시켜주고 무작정 쫓아내려고 했던 형의 고집을 꺾고 신문팔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구역 다툼하는 고참들에게 세 번을 속아 비상금을 다 날리면서 신문팔이 길로 접어들었죠. 서울에 왔으니, 악착같이 돈을 벌자고 다짐했습니다. 청량리에서 광화문 쪽에 있는 동아일보사까지 걸어다니며, 신문을 하청 받아 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기숙사에서 먹여주는 아침만 먹고, 점심은 굶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저금을 했습니다. 또 신문이 나오면 한 줄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세상에 돌아가는 것이 눈에 띄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더군요.

6개월 동안 모은 돈을 갖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공부를 하기로 작심했습니다. 3개월 동안 죽어라고 공부를 해서 서울에 있는 대광 상업고등학교 야간을 전체 일등으로 들어갔지요. 배우자. 배워서 저 청량리 588 같은 어두운 인생을 살지 말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하자. 주간에는 형과 함께 리어카를 끌며 고물을 줍고 야간에는 학교를 다녔죠. 그러다가 형이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내 위치가 위태롭게 된 거죠.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담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에게 부탁해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줬어요. 그 숙직실에서 기거하며 학교에서 마련해준 가정교사 일을 했어요. 눈물겨운 날도 많았지만 배워서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을 했죠.

주야간 통 털어서 1등을 하자 학교에서 서울대를 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은행원이 될까, 고민하다가 내가 배우자고 했던 이유가 단지 돈만 벌겠다는 것이 아니었기에, 서울대에 가서 좀더 배우기로 했지요. 시험 운이 좋았던지 서울 상대 과 수석을 했습니다. 때마침 독지가가 나타나 가난한 집 자식 중에 공부 잘하는 사람 대여섯 명에게 주는 장학금이 생겼어요. 그 장학금으로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게 됐어요. 또 남는 돈은 집에 부쳐 가사에 보탬이 되도록 했고요.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보니 여간 실망이 아니었어요. 똑똑한 놈들이 모였다곤 했지만 공부도 잘 안 하고, 시시콜콜 개인적인 일들에만 관심이 있는 겁니다.

혼자서 책만 봤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책을 보면서 많은 생각에 젖었습니다. 특히 불행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지요. 그러던 5월 어느 날 선배들이 와서 학회 소개를 하더군요. 정운영 씨였죠. 그 분이 나와서 “세상을 바꾸는데 같이 할 사람 나와라!”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들은 설문지를 나눠주고 일주일 후에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게 내가 살고자 했던 삶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난 그 학회에 들어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자체 프로그램을 잡아서 공부했는데, 나는 자유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죠. 학기 내내 내가 찾을 수 있는 책들을 모아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쓴 글이 ‘자유에 대해서’ 라는 글이었죠. 지금 돌아보면 낮은 수준이지만 내겐 깊은 관심거리의 대상이었죠. 난 그 글에서 형식적 자유와 실질적 자유에 대해 논했습니다. 실질적 자유는 그야말로 자유를 누릴 물질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렇다면 돈과 학식이 있는 자는 자유스럽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유스러울 수가 없다는 것이었죠. 못 가진 자가 자유스러울 수 있는 ‘평등’ 사상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겁니다. 자유란 다시 말해 평등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는 논지였죠.

그 글은 선배들에게 인정을 받아, 정운영 선배의 따뜻한 도움으로 ‘상대 평론’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린 ‘통혁당 사건’을 접하게 됐습니다. 신영복 선배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당시 육사 중위였던 그 선배는 우리 학회에 와서 강연도 했던 분이었지요. 아무튼 그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전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깊은 고민을 하게 됐죠. 그 고민과 맞딱드린 사건이 69년 박정희의 ‘삼선 개헌’ 문제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 사회에 대한 눈을 뜬 상태니 어찌 가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처음으로 데모에 주동적으로 참가해, 선동을 했지요. 그후 저는 과격파로 찍혔습니다. 김근태 선배 이후 상대에서 처음 데모를 한 사건이니 더욱 더 눈에 띄었던 거지요. 그리고 방학을 하자, 경찰에서 바로 수배를 때렸더군요. 그게 첫 수배인데, 지금까지 이렇게 수배생활을 하고 있군요.

그 사건 이후 전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여러 번 데모를 하고 수배도 받았죠. 그러다가 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많은 지식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의 주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된 것이죠. 그 이후 전 범 민중적인 저항에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는 대통령 선거에도 큰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생각대로 박정희가 이겼으나, 우린 개의치 않고 다시 움직였습니다. 부정부패 싸움을 통해서 정권에 타격을 가해야 된다고 판단했죠. 그 때가 4학년 2학기인데, 전 완전 골수로 찍혀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되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박정희는 학생운동이 멈추지 않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그 때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어요. 학교로 군인이 쳐들어왔고, 그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학교에서 쫓겨나고 그랬지요. 전 수배 상태로 돌아다니다, 강제 징집을 당했습니다. 끝없는 감시에 시달리며 육체적 고통을 당한 군 생활이었습니다. 최전방에서 말단 박격포 탄약수로 지내면서 폐렴까지 걸렸었지요. 전방에서 총 들고 보초를 서다보면 내가 누구를 위해 어디를 향해 총구를 내밀고 있나 무척이나 괴로워하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대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 일곱 식구가 모여 단칸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것을 봤을 때, 내 심정은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왜 우리네 삶은 이렇게 비참해야 되는가. 전태일 열사가 떠올랐고, 내 자신의 무능함이 저주스러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둠이 내 가슴을 짓눌러 한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터뜨렸던 밤이었지요.

노운협에서 전노협으로, 다시 전국연합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된다. 광주의 넋을 가슴에 담고 철저한 삶을 살아야 한다. 보일러공을 그만두고 전기 기사 자격증을 따서 연탄공장에 취직하고 아내와 함께 이문동에 자리를 잡았어요. 온통 까만 세상을 산 거지요. 그러다가 내선 공사와 외선 공사하는 데를 전전하면서 삶 자체를 처절하게 경험했죠. 아내 역시 공장에 취직해 다녔습니다. 밑바닥 삶에 자신감도 생기면서 부모님과 살림을 합쳐 상도동으로 이사했습니다.

만 3년 동안 그런 삶을 살던 중 84년 말부터 구로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85년 구로 동맹파업이 일어나자, 후배들이 찾아와 다시 뛰자고 하더군요. 전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했지요. 최소한 10년은 삶 자체를 처절하게 느끼며 내 몸에 붙은 관념과 지식인의 때를 벗어버리고 싶었거든요. 후배들이 준비론자라고 비판하더군요. 돌이켜보니 그 비판이 일리가 있어 다시 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이 말하는 단체의 상근자로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겠다고 해서 들어간 곳이 반월공단 중소기업이었습니다.

그 때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공단으로 존재 이전을 하던 때였습니다. 관념과 의식으로 뭉친 그들은 현장으로 들어와 공장을 쑤시며 다녔어요. 홍보물을 뿌리고, 책임지지 못하는 행동을 먼저 내세웠지요. 난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있는데, 우리 공장에도 신원 조회가 들어온 겁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를 부르더군요. 공구를 찬 채 사무실에 가기 전에 화장실을 들렸어요. 그런데 한 직원이 날 보고 위장취업 했냐고 하더라구요. 무슨 소리냐고 버럭 화를 냈는데, 형사가 와 있다고 하며 그 친구가 사라지는 거예요. 아찔하더군요. 난 공구를 풀어놓고 담을 넘어 도망을 쳤어요.

또 다시 내 전력이 따라붙은 것에 대해 한탄을 하다 함께 활동하던 안산 지역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내 위치를 조직을 지도하는 쪽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학생 출신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노동해방 투쟁위원회’가 있었는데, 우린 ‘노동자 권익 투쟁위원회’를 결성했었죠. 난 ‘노동해방 투쟁위원회’를 찾아가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둘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도부 쪽에서는 같이 마음을 모아 움직였었죠. 파업, 가두투쟁, 홍보전 등등 1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철저하게 지도부는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죠. 그러다가 86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공안 탄압이 거세졌지요. 그 탄압에 휩쓸려 조직이 일부 노출되어 나는 안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성수, 안양, 안산 친구들을 모아 다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폭로 투쟁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 사건은 전두환의 ‘4.13 호헌 선언’을 통해 폭발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고양된 민중의 항거가 6월 10일 민중 항쟁으로 이어지자 노동자가 진출할 때라고 판단했죠. 80년 민주화의 봄처럼 민주노조 결성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지역에선 대중적인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고, 지역 노조 연합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88년 상반기, 지역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모여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를 만들어졌지요. 막상 그 단체가 만들어지자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영순 씨가 위원장을 맡고, 내가 노조 특위장을 맡았습니다. 88년 노동법 개정 투쟁과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을 위한 노동자 대회 땐 정말 감동의 물결이었습니다. 연세대에서 여의도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던 모습은 정말 노동자의 물결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후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조직을 결성하자는 말과 함께 전국회의 결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럼 전국회의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전국 노동운동 단체 협의회’(이하 노운협)에서는 나를 파견했어요. 89년 임금인상투쟁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통해 실질적인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그런데 제가 또 폐결핵이 걸린 겁니다. 몸이 안 좋은 상태에서 무리를 한 거죠. 의사가 쉬라고 하는데, 어찌 쉴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전국 조직 건설을 보고 쓰러지자, 다짐하며 실무자 10명을 구성해서 1년 동안 민주노조 전국회의를 조직해 가며 ‘전국노동조합 대표자협의회’(이하 전노협) 건설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90년 1월 22일 공권력이 몰아쳤지만 전노협은 결성됐습니다. 감격적인 그 순간을 맞이하고 몸이 안 좋아진 나는 ‘노운협’으로 다시 복귀를 했습니다. 복귀를 해서는 이영순 위원장이 힘에 부친다고 해서 위원장 역할을 맡게 되었지요. 그 때부터 복잡한 일들이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당에서는 자기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동맹’(이하 사노맹)은 그들대로 비판 아닌 비난을 해대고, 노동조합 운동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들이 상급 단체에 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달라고 항의하고…. 90년 넘어오면서부터 뭉치자고 한 것들이 깨져 나갔습니다. 전국 민주 단체 연합’(이하 전민련)도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습니다. 운동을 지도했던 사람들이 생각의 차이를 주장하며, 자리 다툼도 심하게 벌였구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통해 민중의 동력은 살아나는데, 운동권은 내분으로 소용돌이 쳤습니다. 몸이 힘든 건 견딜 수 있었으나, 마음이 힘든 건 너무도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아마도 한계였겠지요. 90년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상황이 미묘해졌잖아요.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개량화 공세가 치열하게 일고, 지도부들이 동요와 혼란을 거듭하면서 개인적 입지를 향해 찢어진 겁니다. 나 역시 그 한계 속에 있었지만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라는 커다란 토대로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경대 열사의 죽음으로 인해 끓어오르던 대중의 열기를 모아 쉽게 투항하지 않고, 변절하지 않는 대중조직을 건설해야 된다고 주장했죠. 그게 바로 ‘전국연합’입니다. NL쪽에서 전민련이 있는데, 무슨 전국연합이냐고 강하게 비판했죠. 왜냐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람들이 전민련을 장악하고 있었거든요.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PD와 NL은 물과 기름 같았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진영, 무슨 진영하는데, 왜 우리끼리 진영 싸움을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어떻게 이 갈라진 골을 메울 수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결국 전국연합을 결성했으나, 그 골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전국 조직의 명칭을 정하는데, ‘민중연합’이냐, ‘민주연합’이냐를 놓고 서로의 입장을 대변한 이름만 되풀이했으니까요. 도저히 그 반목을 없앨 수 없어, 사회를 진행하던 저는 오늘은 결판내자고 하면서 ‘전국연합’을 제안한 겁니다.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좀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이바지하자고 했던 그 조직도 시간이 흐르면서 갈라져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회의가 몰아치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되돌아 볼 시간을 갖고 싶어 ‘노운협’을 다른 분에게 넘기고 저는 연구소를 만들어 탐구와 사색의 시간을 갖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통신 내의 민주파가 노조 지도부를 장악한 겁니다. 예상을 하지 못한 엄청난 쾌거였지요. 한국 최대의 사업장이며, 주요 사업장의 일이니 구경만 할 수 없었습니다. 94년부터 그 뒷바라지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어느 정도 내부 동력이 생기자 95년도에 뒤로 물러나 예정된 연구의 시간을 갖으려 했는데, 공권력 투입으로 ‘한국통신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우왕좌왕하는 동지들을 몰라라 할 수 없어 또다시 1년을 그 일에 매달리다, 노동악법 중 하나였던 3자 개입으로 수배를 당했으나, 그것으로 수배 명목이 충분치 않자 ‘노운협’을 이적 단체로 몰아 국가보안법을 걸은 거지요.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운다

수배 생활은 힘들고 괴롭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주로 책을 보고 많은 것들을 되돌아봤습니다. 자본론부터 시작해서 고전도 다시 읽고, 변혁 운동에 대한 한계와 극복에 대해, 내 개인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지요.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회주의라든지 진보라는 개념은 종전의 책에서 본 이야기처럼 정말 맞는 것인가. 종전에 우리 운동의 개념에서 소외당한 공동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인간에 대한 참 의미를 더듬어가면서, 포괄적이면서도 장기적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너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지요.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수지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생각의 차이가 아니라, 깊이와 폭의 차이며, 이탈과 타락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겁니다. 사실 운동을 하면서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까. 세상을 좀더 낫게 만들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도와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힘들지만 우리 대에서 다음 대가 딛고 넘어갈 수 있는 디딤돌 하나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주적이고, 유대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유대란 서로 주고 받는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듯 받을 걸 계산하지 않고 주는 겁니다. 스스로 그런 마음이 쌓일 때, 우리의 운동에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희망은 스스로 만들어 갈 때, 그 꽃을 틔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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