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잃어버린 10년' 
장석준(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 교육부장)

애초에 편집부로부터 원고를 요청받았을 때 그 주제는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였다. 사실 필자로서는 편집부의 요청에 쉽게 응할 수가 없었다. "변혁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라는 짧은 말 안에는 이미 90년대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필자가 요즘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집부의 기획안에 구애받지 않아도 좋다는 말에 일단 필자의 설익은 생각을 풀어본다.

92년 - 하나의 매듭

달력이 말하는 기계적인 '90년대'와 우리 기억 속의 '90년대'의 경계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전자는 91년 1월 1일에 시작했겠지만, 후자는 92년의 언제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의 말 속에 자리잡은 '80년대'와 '90년대'의 구분은 바로 이 92년을 전후한다.

92년에 한국의 사회운동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우선, 89년-91년 사이의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대한 사후 평가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전노협의 침체에 대해, 민중당의 총선 실패에 대해 근심 싸인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군부독재 뒤에 처음 등장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김영삼 정권이 탄생하게 될 대선이 있었다.
 
92년 당시 민중운동권에는 80년대에 형성된 사회주의 지향의 활동가층이 가장 두텁게 형성되어 있었다. 다수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포괄한 <한국사회주의노동당창당준비위>가 합법대중정당 노선을 천명하면서 <한국노동당(준)>을 출범시켰을 때, 그 발기인 수가 4천여명이었다. 이는 당시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의 규모가 대략 어느 정도였는지 힌트를 준다. 이 흐름에 결합하지 않은 전노협 활동가들의 나머지 절반이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든지 '반제반봉건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경향의 활동가들을 더 합하면 대략 기만 수준의 '전위'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비극은 바로 이러한 극성(極盛)의 시점이 곧바로 쇠퇴와 해체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당시 남한 사회주의운동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냉철한 재평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각각의 사상유파가 형성해놓은 담론의 연장선 위에서 진행된 스탈린주의 비판은 어떤 공동의 토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신노선', 구 <현실과 과학> 그룹의 알튀세 학파 수용, 트로츠키주의의 재평가 등은 당시 사회주의 운동에 존재했던 분파 구도를 새로운 지평에서 성숙시키기보다는 더욱 더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 운동에는 다양한 형태의 '청산주의'가 대세가 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맑스-레닌주의를 '교조적'으로 추구하던 사람들이 사회민주주의의 '교조적' 추종자임을 선언했다. 한국노동당 추진 세력의 상당수는 경실련의 '시민운동'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념 세계의 움직임에 가장 민감한 학생운동권이 가장 먼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사 속의 90년대'와 '우리의 90년대'

한 동안 우리는 이러한 90년대의 흐름을 우리의 독특한 현상으로 이해했다. 발전자본주의의 성과가 '하늘을 찌르고', 오랜만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이 발전하기도 전에 현실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닥치고, 비로소 '시민사회'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 남한 사회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이것이 세계사의 '90년대'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에서야 우리는 이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말로, 다소 추상적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이어지는 제한적인 민주화 과정도, 그리고 그와 함께 꾸준히 추진되어온 한국 경제의 자유화 과정도, 대중문화의 범람도, 사회운동의 침체와 혼돈도 모두 당시의 세계사 흐름과 무관한 게 아니었다.
 
우리에게 돌연 이 사실을 고지한 것은 두 가지 사건이었다. 하나는 96-97년 총파업, 다른 하나는 97년 말의 외환 위기. 96년 겨울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반대 총파업은, 95년 12월의 프랑스 공공부문 총파업 소식과 함께, 노동'계급'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역사의 전면에 드러냈다. 서구에서나 한국에서나 한 동안 '청산'의 대상이 되어온 자본-노동 관계의 중요성, 노동계급운동의 능력과 역할 등등이 다시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노동계급운동의 침체뿐만 아니라 그것의 부활까지도 전 지구적으로 동일한 시간대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97년 겨울의 외환 위기는 90년대의 모든 혼란과 대열이탈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던 한국 자본주의 '영속 성장'의 신화를 박살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의 시간을 세계 자본주의의 시간대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바라보던 오류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 기회였다. 이제 우리는 80년대 말 '3저호황'으로 촉발된 '영속 성장'의 분위기마저도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틈이었을 뿐임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80년대 혁명운동이 설정한 여러 의제들이 결코 '청산'의 목록에 포함될 수 없는 것임을 뼈저리게 확인한다.

이런 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상당히 낯선 용어가 21세기 벽두 한국 사회의 설명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 상황은, '우리의 90년대'를 '세계사의 90년대'의 시점에서 뒤늦게 되짚어본다는 의미가 강하다. 세계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항상적 위기를 심화시킨 지난 10년간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92년의 언제쯤엔가 우리가 받아들인 '성장'과 '안정'의 환상, '청산'의 변명들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운동 주체의 복구 - 90년대가 남겨준 무거운 유산

하지만, 문제는 모순된 현실이 그 뼈를 드러낼 때, 막상 이제까지 줄기차게 모순의 작동을 폭로하고 이를 공격하던 그 운동 주체는 형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혁명적 노동운동이 해체되고 나서 노동조합조직만으로 외롭게 진행되어온 한국의 노동운동이 96년 총파업을 성사시켰을 때, 그 총파업은 철저히 노동조합의 좁은 시야에서, 그 해석틀 안에서, 그 조직 골간만으로 이뤄져야 했다. 한편, 한국 자본주의 최초의 본격적 공황인 97년 외환 위기의 와중에서도, 담론 지형을 지배한 것은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의 말들이었다.
 
90년대의 마지막 해인 2000년 1월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어쩌면, 90년대 유일하게 착실한 성장을 해온 노동조합운동이라는 대중운동에 기대어 이러한 한계를 급속히 벌충해보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보상하고 세계사적 시간의 긴박성에 발 맞추어 혁명 역량을 복구하고 확장시켜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천을 거듭하면 할수록 역사에 '공짜'는 없다는 진실만이 뼈아프게 드러난다. 이제는 노동조합운동도, 당운동도, 환경운동·여성운동 등의 사회운동도 한때 우리가 벗어버렸던 근본주의=급진주의(radicalism)의 깃발을 다시 부여잡고 '새로운 10년'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각오를 위해서였다면, '잃어버린 10년'도 결코 아깝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