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 갈무리신서 2
크리스 하먼 지음, 김형주 옮김 / 갈무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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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와 폴란드, 1968년의 체코, 1980년의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대대적인 노동자 투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968년의 체코는 '프라하의 봄'으로, 1980년의 폴란드는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 레흐 바웬사의 연대노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들을, 소위 사회주의 국가의 폐해 내지 침략상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크리스 하먼의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은 좀 더 폭넓은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위 사건들을 관통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 기본적으로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동유럽의 이러한 격변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1985년의 뻬레스트로이카, 1991년의 소비에트연방의 해체와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 못지 않았던 격변들이, 다시금 '노동자의 국가'라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의 성격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 저자인 크리스 하먼은 소련과 동유럽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합니다. 이는 토니 클리프의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받아들인 것인데요, 크리스 하먼이 이를 동유럽 사회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장시킨 것입니다.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이 1945~1983년 사이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한 글이라면, <소련의 해체와 그 이후의 동유럽>은 1985년 소련의 뻬레스트로이카를 비롯해 1980년대 말의 동유럽 사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 국가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을 국가관료들이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자본주의를 뜻합니다. 자본주의란 생산수단의 사적인 소유를 기본으로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의 경제발전 초기단계나 전시(戰時)경제에서, 국가가 사적자본 대신 생산수단에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입니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시적 혹은 전략적으로 나타났던 반면,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서는 50년 이상 유지되어 왔다는 점이 다릅니다.

-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사실,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혁명가들은 일국에서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당의 레닌 조차도, "이 혁명은 (그 당시 가장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고립되어 패배하고 말 것이다."라고 했죠. 하지만, 독일에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919년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분리한 독일공산당의 소수가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독일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일 군인들에게 무참히 죽음을 맞이합니다.

- 이제 혁명 러시아는 고립되었습니다. 많은 영토를 내어주면서까지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지만, 주변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는 기존 기득권층과의 혹독한 내전을 치뤄야 했습니다. 혁명을 세계로 확장시키기는 커녕, 러시아에서의 혁명정부를 지키기에도 버거웠던 것이죠. 그리고, 내전의 와중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 100여년 전 러시아는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습니다. 아직도 인구 대부분은 농민들이었죠. 인구의 10% 밖에 되지 않는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고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산업화된 도시를 차지하고 있었고, 볼셰비키당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을 거치며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뤘던 많지 않던 노동자들은 더욱 소수가 되었고, 1924년에는 급기야 레닌마저 사망하면서 볼셰비키당의 성격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 일국사회주의론, 즉 일국에서도 사회주의 국가는 가능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 것이 이 즈음입니다. 이는 1924년 스딸린의 저작 <레닌주의의 기초>에 처음 소개되는데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마르크스와 레닌이 부인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 국가 수립 가능성이 하루 아침에 뒤집어졌는데요, 이것은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던 러시아가,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 없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경제 발전의 관건은 축적에 있습니다. 자본주의과 봉건사회와 달리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공장과 같은 대규모적인 설비가 있었기 때문이고, 이런 설비를 마련하기 위한 폭력적인 축적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이런 축적은, 식민지 무역이나 엔클로우저와 같은 일방적인 자원과 토지의 강탈, 노예 매매, 아동 노동과 같은 극심한 노동착취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생산자들의 이해와는 괴리된, 경쟁적 축적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고 생산자들을 위한 경제체제를 만들자며 자본주의를 타도한 혁명 러시아가, 경쟁적 축적을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경쟁적 축적이 존재하는 사회, 그것은 더 이상 사회주의가 아니었습니다.

- 스딸린은 “우리는 선진국들에 비해 50년에서 100년 정도 뒤져 있다. 그 간격을 우리는 10년 안에 없애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일국사회주의의 선포와 함께, 주변국과의 경쟁이 시작된 것이죠. 당시 스딸린의 고민은, 세계 자본주의에 합류하고자 했던 개발도상국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결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구요. 이 저개발 국가들은, 기존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사적 자본도 형성되어 있지 않고, 설사 형성되어 있다 하더라도 대규모적인 축적을 위해서는 사적 자본을 규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이 국가 경제계획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국가 주도의 경제계획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생산수단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던 러시아가 신속했습니다. 그래서, 이 국가들은 적어도 초기에,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비해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합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동유럽 국가들로 넘어가야겠군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 식민지 분할에 있어서, 소련은 서구 열강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태도를 취했는데, 동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은 소련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습니다. 서유럽 국가 체제의 성격이 미국과 영국 자본주의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듯이 말이죠.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중에 극심한 탄압을 받았던 각국 공산당들은, 연립정부의 형태로 집권하게 됩니다. 이 국가들에서도 전쟁 이후의 산업 발전이 관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안정된 직후인 1947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를 시작으로 광범위한 국유화가 진행됩니다.

- 국가 주도의 산업 발전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되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까지 꾸준히 발전하던 산업은 1960년대에 이르자 한계에 봉착하게 됩니다. 자국 내에서의 축적은 무리 없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해서는 국외와의 교역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여기에 냉전 시대의 군비 경쟁까지 더해져, 필연적으로 국내 산업이 재편되었습니다. 중공업 분야에 필요한 대규모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소비재 공급은 더욱 줄어들었고, 소비재 산업에 대한 투자 역시 줄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활수준의 하락을 가져왔고, 불만을 촉발시켰습니다. 또 다른 방편으로 차관을 들여온 국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관을 통한 산업 발전 효과가 미미하자, 이것이 상환할 수 없을 정도의 채무로 바뀌면서 도리어 국가 경제를 발목잡기도 했습니다.

- 경제 위기와 함께 해결책은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 대신, 기업 스스로 계획하고,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 대두되었고, 이것은 곧 국가기구를 분열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 체제의 변화가 단순히 그것에 그치지 않고, 기존 계획경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권력구도를 무너뜨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대로, 새로운 경제 체제를 주창하는 세력이, 기존 권력구도에서 어느정도 비켜서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동유럽의 격변이란, 경제 위기에서 시작하지만, 이러한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소련에서는 스딸린과 흐루시쵸프가, 헝가리에서는 라코시와 임레 나지가, 체코에서는 노보트니와 두브체크가, 폴란드에서는 고무우카가 그러합니다.

- 경제 위기와 암암리에 이루어진 국가관료들의 권력싸움은, 1953년 스딸린의 사망과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가 스딸린 통치 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소위 개혁파들에게 무게를 실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소련과 스딸린의 권위를 빌려 자신의 통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각국의 국가관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 극심한 축적으로 인한 소비재의 부족과 경제위기로 고통받았던 대중들은, 기존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자신의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옛 집권세력들에게 분노했고, 임금 인상을 비롯한 소비재의 공급과 정권 교체(정치적 자유)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대중들의 '정권 교체' 요구에 실려, 자신의 집권을 추구합니다. 폴란드의 고무우카가, 헝가리의 임레 나지와 같은 개혁파 국가관료들이 이런 방식으로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 물론, 옛 집권세력들과 개혁파 국가관료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습니다. 개혁파 국가관료들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중앙계획경제를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고자 했지만, 국가관료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이 옛 집권세력들을 끌어내리자 마자 새로이 집권한 후, 약간의 양보조치(임금 인상, 언론의 자유)를 취하고는 입을 씻었던 것입니다. 소련 역시도 동유럽 각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날 때 마다, 어김없이 탱크와 군대를 투입했구요.

- 물론, 대중들이 한결같이 개혁파 국가관료들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개혁파 국가관료들의 해결책(시장의 도입)이란, 경쟁적 축적의 필요라는 측면에서는 중앙계획경제와 한치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혁파들은 축적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 축적 자체를 해결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 국가자본주의 정권에 대항한 동유럽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동유럽 국가들의 성격을 밝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투쟁 일반의 경험을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체제 위기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층 국가기구의 분열과 대중기구의 수립이라는 하나의 정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며, 거의 모든 노동계급을 포괄하는 강력한 대중기구라 하더라도 명확한 정치적 강령을 가진 정당과 결속되지 못한다면, 결코 정치적 대안으로 떠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60년대의 동유럽의 격변은, 80년대 중반을 거치며 소련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로 대변되는 개혁파들은 뻬레스트로이카라는 경제 개혁을 실시하기 위해서, 옛 집권세력을 겨냥한 글라스노스트를 실시했고, 이미 느슨해져있던 동유럽 국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극도로 약화되면서 동유럽 국가들에는 또 한차례 격변이 일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정권이 교체되었고, 체코에서는 시민포럼과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대대적인 민영화와 외자 유치가 추진되었습니다.

- 하지만, 변화는 '변한 것은 없다'라는 역설적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국가관료들은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던 기업을 불하한 후, 기업가로 명함을 바꿔 스스로 불하받고 있습니다. 북치고 장구치는 이들의 행태 속에서 '동구권의 몰락'은 호들갑이 유난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국가관료가 독점하든, 자본가가 독점하든,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경제 체제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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