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21)

-바쁠텐데 인터뷰를 위해 시간 내주어 감사하다.
=원래 약속이 하나 있었는데 의례적인 만남이었다. 인턴기자들 만나려고 왔다. 술벗도 없었는데 반가웠다. 취재는 취재고 소주나 마시자.

-`처음처럼 백세까지' 직접 만들었나?
=‘처음처럼’ 나왔을 때 이름 보면서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초심을 잃지 마라’가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이 ‘초심을 잃지 않으면 왕따여도 지켜줄 것이고, 초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당신을 볼 일이 없다’고 한다. 거의 내 좌우명이라 할 수 있다. ‘처음처럼’이 제일 중요하고 ‘백세까지’는 농담이다. 내 마음은 처음처럼 백세까지 간다는 것이다. 중간에 바뀌는 게 아니라 처음처럼 백세까지 영원히 간다. 그래서 섞어 먹으면서도 그 생각을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전까지 계속 제주도에서 자랐나?
=제주도 서귀포가 고향이고, 고등학교는 제주시에서 나왔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학력 고사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원의원이 처음인가?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교 때까지 하던 대로 공부만 계속 했나?
=학자가 될 생각으로 1학년 1학기 때는 도서관파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세상과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당시 1982년 당시에는 전경들이 학교에 상주했고 광주항쟁에 항의하는 시위가 많았다. 현실에 참여를 해야 한다면 학업인지 직접적인 저항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도. 도서관 출석률과 집회 참여도가 반비례했다.
이념 서클을 제 발로 찾아들어가 소위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2학기 때부터 학업을 접다시피 하고 학내 시위를 과격하게 하다가 2학년 1학기 올라가자마자 정학을 맞았다. 구로공단에서 2년 반 정도 야학을 했고 공활도 갔다. 휴학과 정학을 반복하다가 4학년 되어서는 인천에 있는 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노동조합 만들었다.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다 해봤다. 그러다 신분이 탄로나 쫓겨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 ‘직업적인 운동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89년까지 학생운동을 했다. 89년에 겨우 졸업을 했는데, ‘부모님에게 마지막 불효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광주항쟁이다. 유인물을 통해 광주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선배들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지하 이념 서클에서 활동을 했는데 법대 동기 360명 중에 60명 정도가 이념 서클 활동을 했다.
이념의 시대, 저항의 시대였고 저항에 대한 공감이 있던 상태였다. 참여하면 참여한 대로, 안 하면 안 한대로 부채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 사이에 강렬한 연대감이 심정적으로 있었다.
우리 시대가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모순이 있었으니 저항하려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었지, 사실 바람직한 것이야 모순이나 고통 없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게 행복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했다면 그런 결단들을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흘러왔던 것이다.

-공단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고시공부를 시작했나?
=공단에서 나온 게 85년이고 85년부터 89년까지는 학내 조직 운동을 했다. 요즘 말로는 배후 조종 비슷한 일을 했다. 취직을 하려는 생각은 안 하고 스스로를 직업 운동가라고 생각했다. 학교는 안 짤릴 정도로만 적을 두고 있었고 고시 공부로 전환한 것은 89년 말, 90년 무렵이다.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하고 노태우 정권 들어서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며 그 속에서 이념적인 방황을 했다. 당시 많은 운동권이 이념적 혼란에 빠졌고 전향을 한 사람도 많았다. 나같이 전향에 가깝다시피 이념의 껍데기를 버려야 하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변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내부에서 분화가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많이 한 편이다. 당시에 전향했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공개적으로 ‘전향했다’고 비판 받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기존의 내용으로서의 사회주의, 방법으로서의 혁명을 나는 버렸다.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버렸을 때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내 에너지를 어떻게 바칠 것인가’에 있어서 무척이나 방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방황을 한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서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 ‘제도권 내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개량주의이라고 비판 했지만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우리 사회 한편에서 이뤄졌던 경제성장, 민주화 등과 같은 인정할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통합적인 가치를 찾자는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변화의 폭이 너무 심하지 않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변화의 폭이 커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한테 욕도 많이 듣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변화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며 민중민주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과 같은 북한의 혁명 노선, 우리 내부 서클들이 추구한 혁명 노선 등에 대해 생각이 변한 것이다. 그 부분을 받아들이려 하고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대표적인 계기는 토플러의 책이었다. 정보 혁명의 물결이 다가오고 우리 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독점 자본주의의 말기적 현상이라고 치부하면서 계급투쟁 이론만으로 사회 변화를 어떻게 다 담아낼 수 없다.
윤리로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마르크시즘의 사회 역사 이론들은 버렸다. 맑시즘은 종말론이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서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은 열정에서 도망간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대안이 한나라당이었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현실의 제약과 변수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완결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친했던 친구는?
=대부분 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다. 대부분 운동 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부산에서 노동 운동을 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변호사 된 친구는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나같이 한나라당 와서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네가 이용당하는 것이지 한나라당을 변화시킬지 모르겠다’고 주위에서 걱정도 한다.
친했던 친구 중에 여전히 노동운동하고 있는 친구부터 크게 돈 벌어서 자본가의 길을 걷는 친구까지 있다. 다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인데. 제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사귄 친구들은 운동권일 수밖에 없다. 서클 또는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지금은 가끔 만난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질타는 없는가?
=기본적으로 질타를 한다. 그런 질타의 수위가 내려갈수록 주문이 강해지기 때문에 더 부담스럽다.
차라리 욕을 들으면 ‘알았다, 잘 먹고 잘 살게’라고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야 편한데, ‘힘들지? 잘해봐’라고 하면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정치활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솔직히 김민석, 김부겸 두 사람이 꼬셔서 하게 되었다. 김민석은 민주당 오라고, 김부겸은 한나라당 오라고 꼬셨다. 부겸이형을 아직도 아주 좋아한다. 정말 한국의 한 시대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이다.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부겸 의원 오라고 전화하겠다.
=당장 오라고 불러라. 독수리 5형제 중 김부겸 의원이 없었다면 내가 한나라당에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겸이형은 ‘한나라당도 힘들지만 맡아서 5년 내지 10년을 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봤을 때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 미션을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보수당을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겼다.
전두환한테 줄 설 이유가 없다. 노태우한테도. 나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다. 안에서 품고 있는 속뜻을 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겸이형한테 원망 아닌 원망을 많이 했다. 감히 지게지고 가다가 벗어놓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지게 백개를 지고 있다. 나도 벗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는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다. 그런데 아흔아홉 번 때리면 갈라질 수 있는 부분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구경꾼이다. 돌의 강도는 돌을 깨는 사람만 안다.

-강풀의 <26년>은 안 봤나?
=몰랐는데 인터뷰한다고 해서 다 봤다. 내 느낌은 첫째 너무 공감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저격총을 쏘려는 마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내 가족을 죽였던 상대방에 죽음으로 보복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광주는 아직 현재성을 갖고 있다. 광주와 다른 홀로코스트와의 차이는 현재성이다. 현재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광주와 6.25전쟁, 그리고 4.3을 보자. 6.25도 아직 살아있다. 북한하고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역사의 질곡이 굉장히 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80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났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를 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광주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성 안에서 그 안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겠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빚진 사람들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 빚의 탕감은 피해자가 용서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가해자가 ‘이쯤하면 됐지 않니?’라고 하면 고이즈미가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문제는 ‘사회 에너지를 계속 과거사에만 집중할 것인가?’이다. 집중은 미래를 향해서 하되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내가 한나라당에 2000년에 들어왔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80년에 총질한 것을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 사람들이 나를 비겁하고 야속하다고 한다. 경제성장이라는 자산만 가져가지 말고 광주의 부채도 가져가라는 것이다. 물론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정확하게 할 것이다.
전두환을 라이플로 저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학살범을 저격해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나는 그것은 확신한다. 26년이 정답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가장 친한 국회의원은?
=남경필 의원이다. 더 친한 의원은 이성권, 김명주 의원이다. 제일 친한 의원 물으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싸움 붙이는 거랑 똑같다.

-한나라당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보수적인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꼬시는 것이다.

-원 의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나를 많이 의심한다. 나를 20년 넘게 본 사람들도 나를 많이 의심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 되게 대답한다. ‘나는 내 할 일이 있다’고. 다음 총선까지는 한나라당 안에서 당장은 비전이 없어 좌절할지도 모른다. 좌절하더라도 전체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전체에 도움이 되는 좌절은 무엇인가? 꿈꾸는 이상은 무엇인가?
=나의 도덕적인 세계는 영원히 안 온다. ‘어린 양이 사자들과 뛰놀고’라는 노랫말처럼. 불가능하다. 난 사회주의 이념에 혼란을 느끼면서 자유주의까지 왔다.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그 맹점조차 안고 가는 쪽으로 가겠다. 기회가 오면 힘 발휘해 바꿀 것이다. 난 뭐든 정직하게 하려고 한다.

-왜 한나라당에 있는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나라당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진짜 바뀌려면.

-한나라당은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계급으로 세상이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나라당의 변화가 불가능하겠지만 난 그렇게 안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정당 인적 자원 청산은 예전부터 계속 나온 얘기인데 정작 2006년에도 민정당 정신이 부활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나도 헷갈린다. 시대에 대한 고민 중에서 겹치는 부분도 있고 나만의 것도 따로 있다. 내가 할 일을 정직하게 할 테니, 교집합을 위해서 사랑을 보태 달라. 동시에 냉철한 비판도 필요하다.

-한나라당으로 간 궁극적인 이유는?
=나름대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말했듯이 해답을 못 갖고 방황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한나라당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

-대학 시절 때 연애 경험은 어떤가?
=미팅 대타를 몇 번 나간 적 있는데 재미를 보진 못했다. 이런 저런 스토리는 많지만 딸 둘까지 있는 마당에 지금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제주도 동향 동기생들 중에 아주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동문회 같이 하고 대성리 MT도 같이 갔다. 3년 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그 친구와 4학년 때부터 애인이 되었다. 한 때 수배를 받아서 1년 넘게 도망 다닐 때 1년 넘게 못 만나기도 했다. 믿음과 사랑은 세월을 넘어 이어졌다.
그렇게 85년부터 8년을 사귀고 결혼을 했다. 사법 시험 합격하고 나서 바로 결혼을 했다. 오래 사귀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궁금하다. 직업 운동가로 살 때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생각을 자꾸 버리려고 했다. 내 자신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고백은 어떻게 했나?
=봉천동에서 자취를 했다. 참 생각이 많이 났다. 고백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취방으로 초대를 했다. 내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를 불렀다. 영양보충을 하자며 삼겹살을 같이 먹자고 불렀다. 그 날 넷이서 내 방 안에서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는데 소주만 실컷 먹고 결국 고백을 못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보니 삼겹살 먹을 때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두 번째는 야학하던 때 어느 모임에 갔다가 뒤풀이에 갔는데 떡이 남아서 싸가라고 했다. 떡을 싸오며 누구에게 갖다 줄까 생각을 해보니 줄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자취방에 무작정 찾아 갔다. 마침 방에 있었다. 방에 있어서 같이 떡을 먹고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리고 밤이 깊어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떡을 건네줄 때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이었고 부인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8년 사귀고 결혼해 결혼 생활 13년째다. ‘당신의 허물까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상대가 변해야 내가 해준다는 조건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가? ‘숱한 허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지, 그 사람을 편들어 줄 수 있는가’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나 스스로도 고귀하게 느껴진다. ‘love you as you are’다.

-연애하며 특별한 추억은?
=연애하며 가장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 하나 있다. 신림사거리에서 가끔 데이트를 했는데 돈가스 집에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아내에게 돈이 있을 줄 알고 시켰다. 계산할 때쯤 확인해보니 서로에게 돈이 없었다. 나는 물론 빈털터리였다. 아내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고 나 또한 바로 뛰어나와서 손을 잡고 도망쳤다. 얼마 뒤에 돈 갚아주려고 갔는데 가게가 없었다. 지금도 아내는 돈가스 이야기가 나오면 울려고 한다.
또 다른 일은, 고시 공부 스터디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1차 시험 보고 난 뒤 지리산 종주를 연인 동반으로 간 적이 있다. 2박3일간 종주를 하는데 아내가 등산을 잘 못하지만 지는 것을 싫어해 꾸역꾸역 걸어갔다. 세석평전을 가는데 우리 둘만 뒤쳐졌고, 해는 떨어졌는데 후레쉬도 없었다. 거의 실신 상태였던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지만 결국에는 세석평전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아내는 결국 혼절을 했다. 텐트 안에 눕혀 발을 높이 올려놓고 웃통을 벗기고 여자들만 텐트 안에 남았다. 남자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그 때 종교가 없었는데 텐트 밖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아내가 깰 때까지 한참을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기도라는 게 별 거 있나? ‘여기서 잘못 되면 안 됩니다’라고 계속 빌었다. 그 뒤로 다른 커플들 전부 ‘당신은 내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저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라며 싸웠다고 한다.

-어떻게 프로포즈했는가?
=아내가 야학하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나랑 비슷한 시기에 생각이 변했다. 82학번인데 86학번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수많은 고민들을 같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 사랑은 이성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비를 꿈꾸는 게 아니라 거의 조폭의 의리와도 같다. 사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람 하나의 작용이 얼마나 크게 미칠 수 있는지를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결혼 반대, 여성 해방, 가족 해체주의자였다. ‘당신과 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함으로써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게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청혼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남성의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는?
=‘강 건너 집’이 제일 기억난다. 관악산 올라가는 쪽 냇가 건너편에 있었다. 지금은 다 헐어버렸다. 강의 때 교수님 모시고 가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대운동장 위 둔덕에서도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관악산 아래에 있는 작은 댐 위에서 보신탕을 많이 먹었다. 하숙생 친구들 하숙집에서 솥을 가져오고 돈 있는 친구들 돈 모았는데 15명 정도 모이면 딱 좋았다.
졸업 하고 나서 몇 번 가보았는데 너무 많이 변했다. 그 때는 녹지 공간 많았는데 지금은 건물이 아주 많고, 특히 기업들이 지은 건물이 많이 늘은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세련된 것 같지만 낭만이 없어진 것 같아 아쉽다. 서울대는 연구시설에 투자가 많이 되어야 될 것 같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의 장소들을 콘크리트가 차지하고 있으니 벌써 이렇게 늙었나 생각이 든다.

-딸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는가?
=스트레스를 안 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들이 알아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기회를 주고, 자극이 필요할 때 좋은 자극을 주는 일을 한다.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싹을 뽑아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딸들에게 몇 점 받는 아빠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100점 만점에 40점을 과락이라고 본다면 59점 정도가 될 것 같다. 과락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원할 때 있어주는 아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3주일 장기간 외국 출장을 다녀와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반겼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덤덤했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평소에도 못 보잖아’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다. 기회가 될 때 일단 자주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을 때 잘 해야겠다.

-대학 1학년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할 것 같다. 그 때의 대학이라면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더 철저히 운동해서 전두환, 노태우를 퇴장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학생들은 혜택을 많이 받았고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빚을 갚는 방법은 민중들한테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역사의 제단에 나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대학이라면 ‘누구를 타도할 것인가? 누구한테 최루탄을 쏴야 할 것인가?’가 모호하다. 진보운동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과제가 달라졌다.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전혀 다르게 살 것 같다.
전공 선택부터가 문제인데, 경영을 택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은 생산성 혁신 밖에 없는데 과학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이 핵심이다. 과학기술, 경영, 가치 창조 부분에서 인재들이 다른 것들 신경 안 쓰고 마음껏 할 수 있고 삶의 질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 지향점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학에 들어간다면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컨설팅지식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 같은 것을 해보고 싶다. 이용주

<한겨레> 인턴기자 minamjij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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