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지젝, 레닌을 권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출간됐다. 언젠가 이 책의 러시아어판 번역가능성을 타진해보다가 국내 한 출판사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들은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인가 보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레닌인가란 '상식적인' 의구심에 대한 반문으로 책을 열고 있는 지젝은 "하지만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일상 생활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레닌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통해 레닌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고유하게 '레닌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역자에 따르면, "지젝은 레닌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론가를 발견한다. 오늘날 서구의 대다수의 행동하는 지성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촘스키와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지젝 자신은 실천하는 이론가이고 싶어한다. 지젝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최선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상대주의와의 투쟁을 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지젝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젝은 노동자의 눈으로 (레닌처럼) 인텔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가의 눈으로 (라캉처럼) 인텔리를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가이다."

한데, 목차에서부터 경제학 전공자인 역자가 너무도 잘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의 문구이자 지젝의 저서명이기도 한) 문구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길 걸 보면 좀 우려되는 번역이기도 하다.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를 구별해주지 않는 라캉-지젝 번역이 온전한 번역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더불어, 역자는 국내의 반면교사적 지젝 번역서들을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정도선에서 번역의 오류가 다 카바되었기를 바랄 따름이다(책값도 만만찮은데 말이다).

 

이 책의 영어본은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the gates)>(Verso, 2002)이며,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씌어진 레닌의 문건 선집에다가 지젝이 서문과 후기를 붙인 것이다. '레닌의 선택'이란 제목이 붙은 후기의 분량만 170쪽 가량이 되는데, 독어판과 러시아어판은 이 후기만을 따로 독립시켜서 출간한 것이다. 이 영어판 출간과 관련한 소식이 교수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잠시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2. 09. 14) 영국의 레닌 다시 읽기 열풍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기’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왔던 사상적 공황상태가 끝나가고 있다는 징조일까. 한국에서 거세게 불어닥쳤던 ‘청산’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긴 유령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맑스와 벤야민에 이어 이제 레닌까지 이 대열에 합류할 태세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재발간한 데 이어, 펭귄출판사도 새로운 서문을 이마에 붙인 같은 책을 다시 출간함으로써, 이 귀환의 행렬을 실체화하고 있다. 버소는 오는 9월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을 받아 재출간할 예정인데, 이 또한 오늘날 영국의 사상적 지형에 흐르는 기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한 레닌의 동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똑똑히 지켜보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레닌의 전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일대기를 조망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것은 어안이 벙벙한 일임에 틀림없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과거란 언제나 사후에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단순하게 이런 사상적 ‘복고’현상을 심리적 과잉결정의 효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유령들을 불러내고 있는 힘은 과거의 유토피아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그 노스탤지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손질을 거쳐 나온 레닌 선집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Gates)>은 이런 낭만주의적 노스탤지어에 대항해서 제기되는 ‘레닌 다시 읽기’의 전형처럼 보인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복판을 뚫고 나온 지젝의 입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실 사회주의는 리얼리즘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가 이 선집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영웅적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왔던 ‘천재 레닌’을 ‘인간 레닌’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최근 류블랴나 대학의 ‘철학교수’로 직위를 옮겨 앉은 지젝은 혁명이란 파국적 상황을 온 몸으로 뚫고 갔던 ‘인간’ 레닌을 특유의 분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지젝이 레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을 기준으로 한 쾌락의 정치학이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던 러시아에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행위를 경고한 레닌의 입장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농민 대중에 대한 문화 교육과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젝이 볼 때 스탈린은 이런 레닌의 중도 점진적 사회주의 이행노선을 철폐하고, 일국 사회주의를 성급하게 달성하려고 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읽는다. 레닌은 말년에 이르러 <국가와 혁명>에서 제기된 유토피아주의를 폐기하면서, 훨씬 더 현실적인 볼셰비키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이 지젝의 말이다. 물론 이런 레닌의 노선 수정이 혁명의 물질적 기반만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적 태도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에 따르면, 레닌은 1920년대에 볼셰비키의 주요 임무가 교육을 포함해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런 레닌의 바램은 오히려 레닌이 지적한 러시아의 후진성은 유럽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흥분 속으로 레닌을 몰고 갔던 것이다.

-이런 지젝의 분석은 다분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전개된 레닌의 정책들을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헬레네 카레리가 쓴 <레닌>은 이런 지젝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구석이 있다. 카레리는 레닌의 역사적 성취가 전형적 혁명의 내러티브라고 할,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황홀경 뒤에 찾아오는 낭만주의적 상실감을 극복함으로써 이룩됐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레닌은 이런 냉엄한 리얼리즘을 통해 유토피아적 순간을 연장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능력으로 인해, 레닌의 글들은 라캉이 지칭한 ‘상실된 원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사실은 레닌을 오늘날 가장 ‘실재’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20세기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물론 이 ‘실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야심들이 20세기의 사상사를 밀고 나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의 인식 문제와 별도로, 시종일관 지젝은 이런 실재의 범주를 리얼리티로부터 분리해왔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리얼리티는 허위이며, 그 리얼리티의 고갱이가 바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리얼리티의 가상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실재를 직관적으로 경험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 지젝의 궁극적 평가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경험될 뿐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실재는 언어 내에 존재하는 틈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어적 상징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 틈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뿐이다. 20세기의 숱한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 언어를 임계상황으로 밀어붙여 실재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혁명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노스탤지어를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재현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무의식적 상실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상실감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레닌의 글들을 강조한다. 냉철한 리얼리즘을 통해 레닌은 이 실재에 대한 상실감을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더 생생한 ‘혁명의 임박’을 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이택광 영국통신원)

 

 

 

 

06. 09. 07.

P.S. 아래는 책의 러시아어본(2003). 제목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경험>이며, 표지 이미지는 데이비드 베컴과 레닌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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