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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 ㅣ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
전재호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과 대통령 권한대행,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대통령을 거치며 18년간 공식 비공식적인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구가했던 박정희. 그는 군사독재를 통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로서의 비판과 경제 발전을 이룩한 경제대통령으로서의 환호를 동시에 받고 있습니다.
- 일정정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박정희는 잊혀져가고 있지만, 시도때도 없이 위기에 처하는 한국경제는 '경제대통령' 박정희를 어김없이 등장시킵니다.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다시 한번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통령이 등장해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저자는 경제정책을 포함해 집권시절 박정희의 정책을 분석하여, 다시 한번 그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그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근대주의'와 달리, '반동(reaction)'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북의 군대가 남의 정치세력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는 것 정도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반동'이란 "원래는 역학상의 용어로 동(動)의 작용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을 그대로 사회현상에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통은 ‘진보’에 대한 반작용을 의미하는 ‘정치적 반동’이라는 말로 사용된다." 라고 쓰여있습니다. 진보의 반작용인 '반동'은, 무엇을 진보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단어인 것이죠. 결국, "박정희는 반동적인가"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박정희를 반동적이라 규정하고 있는) 저자의 진보가 무엇인가?"가 될 것이며, "(이 책을 읽고있는) 나의 진보는 무엇인가?"가 될 것입니다.
- 진보에 대한 최소공약수는, 추상적인 수준에서 '더 나은 삶의 질'일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정정도 구현된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진보는 유효하며, 그것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가 여전히 삶의 질을 보장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 만으로 구현하지 못한 '더 나은 삶의 질'은 어떤 수단을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가"가 오늘날 진보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많은 이들은 '경제발전'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정치세력들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주문은 진보에 대한 열망입니다.
- 저는 '박정희 평가의 모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사고, '민주주의는 후퇴시켰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평가는, 오늘날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으니 경제발전만 남았다'는 사고와 같습니다. 저는 이 두가지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516 군사쿠데타 이전의 민주당 정권에게도, 박정희 정권에게도 경제발전의 화두는 '축적'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이야 기업 수준에서도 국가 기간산업 규모의 투자가 가능하지만, 당시에 이런 투자를 위해서는 해외의 원조와 차관, 전국에 흩어져있는 자본을 규합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정권이라도 봉착해야 하는 과제였을 것이고, 차이는 어떤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할 것인가에 있었을 것입니다. 소비에트연방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주도적으로 자본의 동원과 축적이 용이했지만, 사유재산을 허용하고 있던 한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사유재산을 집중하기 위한 절차가 따로 필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폭력이 동원됩니다. 516 군사쿠데타의 명분이 되었던 '민주당 정권의 무능력' 역시 '자본 축적의 무능력' 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정치폭력이 자본 축적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들이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쿠데타와 정치정화법, 1963년 군정 4년 연장안, 4대 의혹 사건, 1964년 화폐계혁, 1966년 삼선개헌, 1971년 국가비상사태, 1972년 비상계엄령과 유신헌법, 등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행보는 대부분 집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대 의혹 중 유일하게 자본축적과 연관된 새나라자동차 사건 역시도 자동차 산업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지 않았죠.
- 제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자본주의 국가의 초기 자본축적에는 폭력이 수반된다는 보편적 진실입니다. 영미의 자본주의가 식민 지배와 노예 무역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루었다면,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중국, 북한은 당의 독재를 통해서, 자본주의 한국은 정치폭력을 통해서 자본축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저는 이점이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근대주의의 폭력성, 분리할 수 없는 자본주의 경제의 정치적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만 있다면, 1970년대에 칭송받아야 할 사람은 박정희가 아니라 김일성일지도 모릅니다. 체제 경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던 경제 발전에서의 김일성과 박정희의 차이, 정치폭력을 휘둘렀던 박정희와 김일성의 차이 보다는,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에서 경쟁적 폭력적으로 자본축적을 해야했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 않을런지요.
- 신드롬으로까지 추켜세워진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경제발전에 대한 열망의 반영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바라보고 있을 과거 민주화 운동가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들의 용기와 신념, 열정을 저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정희 신드롬 자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끔찍한 정치적 폭력으로 점철된 70년대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 집권세력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희미하게 려줄 뿐입니다. 우리가 박정희 신드롬으로 부터 진정으로 깨우쳐야 할 점은,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경제적 민주화를 이루어 낼 대안세력의 형성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