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 자유노조

자유노조운동은 89년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의 단초를 마련한 운동이다. 폴란드의 자주관리노동조합 '연대(連帶:Solidarlity;솔리다르노시치)'가 이 최초의 자유노조의 정식 명칭이다.

자유노조는 1980년 8월 발트해 연안 그다니스크의 레닌조선소 노동자들이 전기 기술공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출범한 이래 유럽전역으로 민주화 바람을 전파, 공산체제 붕괴 서막을 열었다.

바웬사는 198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89년 자유노조는 합법화 되었으며 새로운 의회에서 99%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90년 12월 바웬사는 민주화된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개혁의 부작용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경제난이 가중되는 등 국민의 불만과 시위가 확산되자 의회를 해산하고 93년 9월 총선거를 실시, 신정부를 출범시켰으나, 95년 대통령선거에서 전(前)공산당원 크바스니에프스키에게 패배, 연임에 실패했다.

지금 자유노조는 내부분열과 국민들의 지지상실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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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하벨

체코의 전(前)대통령.
극작가로 활동하다 반체제 지도자가 되어 체코의 '벨벳혁명'을 주도하였으며 공산체제 붕괴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3년 2월 두번째 임기가 만료되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36년 체코의 부유층 집안에서 출생.
1957년 체코기술대 경제학과 졸업
1966년 프라하 행위예술 아카데미 졸업

하벨은 1960년대 초 <가든 파티> 등 희곡 2편을 발표해 유럽의 대표적인 신예 극작가로 떠올랐으나, 68년 체코의 민주화 시위인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당하자 정치활동에 본격 투신했다.

1977년 반체제 단체 '77 헌장그룹'을 창설해 투옥됐고 79년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다시 감옥에 수감된 그는 1989년 시민포럼을 구성해 '벨벳혁명'을 주도, 40여년간의 공산체제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공산체제 붕괴후 1989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1992년 체코, 슬로바키아 분리 책임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지지로 1993년에는 슬로바키아와 분리된 체코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998년 재선에 성공했다. 2003년 2월2일 두번째 5년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하벨의 임기동안 체코는 19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고, 2002년 말에는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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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공산권수출조정위원회 [Coordinating Committee for Export Control]
 
일명 파리위원회 또는 코콤이라고도 한다.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5개 국에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1989. 4월 가입)가 참여하여 총 17개 국으로 구성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시작과 함께 서방진영이 공산권의 위협을 막기 위해 군수물자의 수출을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발족하였으며, 본부는 파리에 두었다. 가맹국 간의 협의에 의해 수출통제품 목록을 작성하여 운용하였으며, 만약 통제물품을 수출하려면 코콤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처음에는 4백여 개 품목에 대해 수출을 통제했으나 이후 공산권의 기술향상으로 규제가 무의미해진 품목은 제외하고 군사목적으로 전용가능한 반도체 및 통신장비 등을 새로 추가하여 150여 개 품목에 대해 수출을 통제하였다.

1951년에는 코콤의 분과라 할 수 있는 대중국수출조정위원회 즉, 친콤(CHINCOM)을 발족시켜 대공산권뿐만 아니라 대중국에 대해서도 수출품목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공산권 붕괴와 이에 따른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금수(禁輸)규제가 대폭 완화되었다. 특히 1991년 5월 파리회담에서 최첨단 기술품목인 반도체, 감응장치 및 레이더 등 10개 부문 핵심리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든 품목의 수출을 허용하였다. 이는 과거에 대상품목을 대규모로 설정하던 형태에서 소수항목별 규제방식으로 정책 전환을 의미한다.

탈냉전시대에 유명무실해진 코콤은 1994년 3월 헤이그모임에서 3월 31일 자정을 기해 해체할 것과 이후 다른 형태의 수출규제기구를 구성할 것이 결정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 역할이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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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삭스 (Jeffrey Sachs)
 
국제금융,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탁월한 연구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경제학자.

1954년생으로 하버드대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80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곧바로 교수진에 합류, 29세인 83년에 하버드대 최연소 정교수가 되었다.

하버드 국제개발연구소장(Harvard Institute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HIID)으로서 개도국 거시정책 및 경제개발이론에 많은 연구를 수행했으며, IMF, 세계은행, UNDP, OECD등 국제기구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뿐만 아니라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폴란드 러시아 등의 경제고문을 역임했다. 지난 86~90년 볼리비아의 대통령 자문역을 지낼 당시 인플레이션을 연 4만%에서 10%대로 끌어내렸고, 1980년대에 처음으로 부채 감축 프로그램을 성공시켰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폴란드와 러시아, 슬로베니아, 몽골 등에서 사회주의 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자문을 하기도 했다.

하버드대에 입학한 이래 한번도 하버드대를 떠나본적이 없던 삭스 교수는 2002년 7월 뉴욕의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그의 평생 라이벌인 로렌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과의 불화설이 불거지기도 했으나 본인은 부인했다.

이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특별 자문관으로 선임되어 유엔의 밀레니엄 개발 계획 프로젝트에서 빈부 격차 해소를 위한 방안 마련을 연구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에 대한 비판자로 유명한 삭스는 97년 동아시아 위기가 기본적인 경제체질보다 국제자본의 급격한 이동이 빚어낸 일시적 혼란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한국의 외환위기 직후 IMF가 내린 고금리 위주의 처방을 강력히 비판해 주목받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코노미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했고, 타임지는 1994년 가장 유능하면서도 유명한 50명의 젊은 이코노미스트 중 한 사람으로 선정한 바 있다.

주요저서로는 <세계경제의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 in the Global Economy)> <세계통합 - 거시경제적 상호의존과 세계경제 협력(Global Linkages - Macroeconomic Independence and Cooperative in the World Economy)>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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