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21)

‘민들레’는 시들지 않는다
장기수들의 누이동생으로 ‘컴백’했던 박영란, 다시 투쟁조끼를 입었다

광주 ‘통일의 집’에 살았던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 선생을 나는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었다. 북한에서 의사 일을 한다는 나의 고모가 김동기 선생의 사촌동생과 의과대학 동창일 거라거나, 이제 곧 북한으로 가게 되면 그 고모를 한번 찾아보겠노라거나 하는 모든 얘기들을 나는 김동기 선생과 직접 나눈 적이 한번도 없다. 짬날 때마다 장기수 어른들을 찾아 뵙던 광주의 한 후배가 그런 얘기들을 중간에서 몇번 전해 주었을 뿐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떠난 지난해 겨울, 파업을 벌이고 있는 ‘동광주병원’의 노동자들을 만나러 내려갔다가 짬을 내 잠깐 만났을 때 후배는 책 한권을 내밀면서 말했다. “하 선배가 언제든 광주에 내려오면 주라고…. 김동기 선생님이 남기고 가셨어요.”

88년 겨울, 운동권을 떠난 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33년간의 감옥생활과 1년여의 짧은 사회생활에서 느낀 점들을 기록한 김동기 선생의 책이었다. 책 속표지에 선생이 쓴 친필이 눈에 들어왔다. 석줄밖에 안 되지만 “2000.8.2. 김동기 드림”까지 읽는 동안 나는 목이 메었다. 그렇게, 나로 하여금 한번도 뵌 적이 없었던 사람에게 평생 빚을 지게 만든 후배가 바로 ‘우리들의 광주 언니 민들레’ 박영란(37)이다.

80년 5월, 여고 1학년 학생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지켜봤던 박영란은 이십대 6년가량을 운동권으로 살았다. 전남대 법대의 여학생 후배들에게 그의 이름은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5·18기념재단’에 근무하는 후배 강정미에 따르면 “법대의 80년대 운동권 출신 중 노동현장까지 간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88년 겨울, 패잔병이 되어 운동권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지방일간지의 기자라는 소시민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그 ‘젊은 날’을 후회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발로 운동권 사람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돕겠다”는 최소한의 다짐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자칭 ‘얼치기 열정주의자’였던 그가 그뒤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사상투쟁 와중에서 종파주의자로 비판당하며 운동권을 떠났을 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이미 심대하게 훼손당했다고 생각했으며, 그뒤부터는 무슨무슨 근본주의자들처럼 글 한줄 쓰려고 해도 그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꼴에 뭘 하겠다고 나서는 거냐? 그냥 얌전히 있어라”는 자각이 항상 그의 머리 뒤꼭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자각하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후배로부터 “선배를 지금까지 종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시절에 잘못 저지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선배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살아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더 험한 ‘린치’를 당했음에도 십 몇년째 의연하게 한길을 가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박영란! 네가 만든 감옥에 널 가두고 응석부리고 있었구나. 자학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으면서, 그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7년 만의 은둔을 박차고 우리의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앰네스티가 선정한 ‘세계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의 후원사업에 힘을 보태면서 그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저것 따지면 또 못하게 될 테니까 단순무식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소박하게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고 “고작 내가 한 일이라곤 면회 두어번 가고, 그가 부탁한 책 몇권 보내주고, 한달에 두어번 편지 보내고, 강용주의 답장을 타이핑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것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그런 활동이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순결한 영혼을 간직한 투사’ 강용주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과 피붙이처럼

1999년 2월,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69), 리공순(67), 리경찬(66), 이재룡(57)씨들을 만난 뒤부터 그는 틈나는 대로 광주 ‘통일의 집’으로 그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20, 30대 새파란 나이에 구속돼 30, 40년씩 징역을 살고 대부분 환갑을 넘긴 나이에 병든 몸으로 석방된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비극의 대가를 가장 혹독하게 치른 사람들이었다. 2000년 9월2일 북으로 돌아가기까지 1년6개월 동안, 그와 몇 사람이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상처’들을 가까이에서 지켰다. 한달에 한번씩 장기수 어른들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조촐한 여행을 다녀왔다. 그 ‘통일나들이’는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그 모임을 박영란의 애칭을 본떠 ‘민들레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몇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장기수 어른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실정법을 위반한 우리에게 여러분들이 나누어준 정을 죽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북으로 돌아가면 내 자식들과 가족들에게도 꼭 얘기하겠습니다. 70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는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라고 뺨을 떨며 울게 했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이 북으로 떠나던 날, 민들레 모임의 회원들은 임진각으로 달려가 공동경비구역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또다시 그렇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민들레 모임’의 회원으로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결코 넉넉한 살림이 아니면서도 ‘통일의 집’에 매달 쌀 한 가마씩을 보내곤 했던 임은주·남창현 부부는 지금 그 쌀을 민들레 모임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며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지난해 겨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장 귀퉁이의 어두운 계단 한쪽에 봉투를 깔고 앉아, 박영란은 마음속에서 불어대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바람 때문에 줄줄 울었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1년도 더 지난 그 얘기들을 하면서 그는 끝내 눈물지었다. 장기수 어른들의 30년 세월과 그뒤 1년6개월간 겪었던 감동의 순간들을 자신의 한두 시간 얘기로는 차마 포장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사진/ 광주매일신문사 안 자신이 쓴 대자보 앞에서.

그는 요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와 관련을 맺고 양민학살사건 조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인권운동센타’의 ‘진실과조사’팀의 구성원으로서 담양과 장성이 그의 담당지역이다.

“문헌자료 조사를 한 다음 현장에 나가는데 가는 곳마다 시체가 수십구씩 나와요. 그것도 50여 가구쯤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부모를 여읜 자식들은 반 비렁뱅이가 되어 제 힘으로 자랐고…. 어느덧 어른이 돼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만큼의 세월이 지났는데…. 놀라운 건 그들이 그 억울함을 평생을 참고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당했으면서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던 부모세대의 고통을 필설로 다 헤아릴 순 없을 거예요. 피해자들은 평생 입 다물고 어둠 속에 숨어 울며 살았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았던 이 더러운 세상을, 내 자식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발끈을 야물게 고쳐 매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를 위해 그가 일하는 ‘광주매일신문사’를 찾아갔을 때, 신문사의 노동조합은 25일째 파업중이었고 회사는 폐업을 운운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투쟁조끼를 걸친 전사로 우리 앞에 선 것이다.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다시 일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싸움을 마무리하고 하루빨리 현장에 돌아가 정론직필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장소를 옮기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그가 내 차의 트렁크를 좀 열어달라고 했다. 자신의 카메라 장비를 내 차에 실으려는가보다 하고 무심코 열어주었는데, 웬 사내가 낑낑대며 메고 온 쌀 한 포대를 내 차에 턱 하니 싣는 것이 아닌가. 바로 임은주·남창현 부부가 보낸 ‘여주쌀’이었다. 서울까지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 쌀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민들레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새로 정했다.

글·사진/ 하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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