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

어제 배달된 북매거진 <텍스트>(8월호)에서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보리, 2006)의 저자 안건모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제목이 노골적으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패러디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곧바로 홍세화의 책을 떠올리게 한다. 홍세화 한겨레 시민편집위원의 추천사도 달고 있긴 하지만).

 

 

 

 

월간 <작은책>을 본 적이 없어서 현재 <작은책> 편집장을 맡고 이는 저자의 이름을 기사에서 처음 보았다. 현직은 편집장이지만 본래 '서울의 버스기사'이며 책은 그가 1996년부터 써왔던 것들을 묶어냈다고 한다. 초판 3000부를 찍었는데, 조금 있으면 2쇄를 찍을 거 같다고 하니까 '기본' 이상은 하는 듯하다(알라딘의 세일즈 포인트도 어지간한 책들보다는 높다). 인터뷰 중 몇 대목을 옮겨본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게 매우 좋게 들리긴 하지만, 사실 대부분 노동자들의 생ㄱ가이나 의식은 크게 진보적이지 않다. 노동자의 글쓰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글이란 짓는 것이라고 배웠다.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짓는 것. 지금은 다들 '글쓰기 학원'이라고 하지만, 이오덕 선생님이 생활글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전에는 다 '글짓기 학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제도교육 속에서 '글은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작은책>을 보면서 '아, 나도 내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 든 거다. 그래서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생생하게 그대로 글로 나타낸다. 예를 들면 지하철 노동자들의 지하철 이야기, 자신의 일터 이야기를 쓰는 거다.(...)

-제도교육에서 배운 게, 글이라는 것이 고상하다 아름답게 써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나도 그렇게 배워왔고. 그런데 지식인들이 쓰는 수필 같은 것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같다. 어려운 말로 관념적이라고 하는데... '청춘예찬' 같은 것만 봐도 그건 우리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게 고상하게 쓰지 않으면 글을 못 쓰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다. 텔레비전 연속을 보면 다 2층집이고 다 잘사는 집이다. 그게 우리들 사는 모습의 전형처럼 나온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글에서도 그런 생각이 커졌던 것 같다.

-우리가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남한테 알려서 퍼뜨리는 것이다(*이 '글치기'의 목적도 그렇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끌어낼 수 있게. 시내버스 이야기를 <작은책>에 연재할 때 만큼은 독자들이 시내버스 기사한테 화를 못냈다고 한다. 기사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이유를 아니까. 그렇게 난폭하게 운전하고 불친절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아니까. 그러니가 글쓰기에서는 내 생각에 끌어들이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그게 전부 다 필요한 거 같다.

=진보적인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나 교수들, 정당에서도 글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법에 서투르다.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

-너무 못쓴다는 평가들이 많다. 어려운 말보다 글 자체가 어렵다. 그 중에는 단락 나누기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단락이 중요한데... 주어와 서술어가 안 맞는 것도 많다. <작은책> 작업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뭔지 아나? 철학사상연구회에서 항상 글을 연재하는데, 원고를 받아서 쉽게 고치는 게 제일 어렵다. 엄청 어렵게 쓰니까, 무식한 노동자들도 그냥 술술 읽을 수 있게 애를 쓰는데 힘들다(*그 어려운 '진보철학'들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지식인들의 분석적인 글들이 필요하다. 홍세화 같은 분들, 그리고 FTA 같은 정세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봤던 사람들 중에서는 강준만 교수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는 글을 엄청 쉽게 쓴다. 예전에 손호철 교수와 강준만 교수가 논쟁하는데 서로 반박하고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손호철 교수 생각이 아무리 옳더라도 따라갈 수가 없다. 이해가 안되니까. 그런데 강준만 교수책은 아주 쉽게 되어 있다. 덧붙여서 실명 비판이 필요하다고 본다. 교수들 보면 다 실명 비판 안한다(*이게 우리 교수사회의 미덕이다). 그런데 그걸 안 하면 자기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명 비판은 꼭 필요하다고 본다.

=<작은책> 편집장이 된 게 정확히 언제였나?

-8월이다. 작년에 1월에 와서 일하다가 정식으로 편집장이 된 건 8월이다. 굉장히 고민 많이 했다. 두세 달 고민했다. 책 마지막에 보면 다 나온다(웃음). <작은책> 대표가 경영문제로 고민하면서 제안을 한 거였다. 그리고 독자들이 거의 다 나를 알고 있고 관계가 깊었다. 처음에 일을 할 때는 100만원 받고 일했다. 버스운전하면 한 달에 250만원은 받는데(*강사-노동자의 수입보다 훨 낫군), 그때 많이 힘들었다. 어쨌든 <작은책>이 없어지면 일하는 사람들이 글 쓰는 매체가 별로 없다. 한군데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삶이 보이는 창>이 비슷하긴 한데, 나는 문학을 별로 안 좋아한다. 한가롭다는 생각이 들고,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고(*물론 모든 문학 한가롭거나 고상한 건 아닐 테다. 우리 주변의 문학이 혹 그렇다는 혐의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좋은 생각> 같은 잡지도 있는데, 그건 전혀 아니다. 그 잡지는, 내가 '조선일보하고 비슷하다'고 욕을 할 정도다. 그 책에 따뜻한 글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현실이 없다. 내가 양보하면 세상이 다 따뜻해진다는 게 결론이다. 그렇게 사람 생각을 마비시키는 글이다. 그런 잡지는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많이 나오고 잘 팔린다(*실제로 잘 팔린다!). 그런데 그 책들은 결론이 없고 현실이 없다. 아빠가 택시기사인데, 아빠가 어렵고 힘들고 고생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왜 힘들고 고생하는지는 안 나온다. 비정규직 엄마가 일하는데, 비정규직이 만들어지는 그 구조가 있지 않나. 그런 건 안 나온다.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행복했다, 그런 내용이다. 저런 책이 널리 퍼지면 안된다고 본다. <좋은 생각>의 아류잡지도 굉장히 많다. 계속 나오는데 금방 망하는 거 같다. 나왔다가 사라지고 하는 것 같더라.

=책의 제목이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다. 버스운전기사들의 상황이 거꾸로 간다는 말인가? 아니면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가 거꾸로 간다는 말인가?

-<거꾸로 보는 세계사>니 <거꾸로 보는 현대사>니 하는 책들이 있지 않나(*<뒤로 가는 남과 여>란 영화도 있었다). 제목은 '백미러로 보는 세상',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 등 몇 개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서울의 버스운전사'는 너무 패러디같다고 하더라. 책을 본 사람들은 딱 맞다고 하는데 워낙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됐다. 제목을 그렇게 붙인 건 '뒤집어보자'는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버스를, 버스의 내막을 뒤집어보자, 그리고 서울시의 버스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 그런 생각에서 썼다...

06. 08. 11.

P.S. '안건모가 살아온 이야기'란 글을 옮겨놓는다('안건모'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것인데, '하종강의 노동과 꿈' 게시판에 올려져 있다). '시내버스를 정년까지'란 제목으로 아마도 책에 포함돼 있을 듯하다. 분량이 다소 길지만 내가 부리는 건 알라딘의 공간이지 나의 공간이 아니다. 해서 인심 아닌 인심을 쓰도록 한다. 한 가족사이지만 실상 우리 현대사이기도 하다(더불어, 지적하자면 자전적인 1인칭 (실화)소설이기도 하다).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하나.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 번 써 보자고 마음을 먹은건 월간 <작은책>을 보고나서부터였다. 언젠가 오전반 일을 끝내고 집에서 한겨레 신문을 훑어보다가 작지만 눈에 띄는 조그만 광고를 보았다. 작은책이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똑 중학생들 버스표 한장을 잘라 위 아래로 붙여 놓은 크기 만한 광고였다.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이라고 써 있었고 '1년 구독료 만 원'이라고 되어 있었다. 솔직히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이라는 말보다 '1년 구독료 만 원'이라는 말에 '햐, 이렇게 싼 책이 있어?' 하고 몇 달 지나간 창간호 부터 신청을 했다.

-정말 노동하는 사람들이 쓴 책인가 긴가민가했던 그 책은 진짜로 우리들 노동자가 쓴 글이 실려 있었고 우리들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특히 박영숙씨가 '살아온 이야기'는 너무 힘들게 살아온 것 같아 안타까웠고, 그래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이재관씨가 연재한 '노동자 글쓰기 어떻게 할까'는 뭔가 할 말은 많은데 쓰는 것이 엄두가 않나 그냥 읽기만 하던 나에게 '쓰고 싶다'는 용기를 갖게 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만 가지고도 글쓰기는 시작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것보다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못하게 만드는 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아닐까. 거기다 그놈의 '원고지' 소리만 나오면 주눅이 든다..

-원고지는 왜 만들었을까. 띄어쓰기를 확실히 하고 글자가 몇 개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게 만든 건 아닌가. 띄어쓰기가 조금 틀리면 어떻나. 우리가 무슨 논문 쓰는 것도 아니고 일기나 편지, 생활글쓰기 정도인데 띄어쓰기 조금 틀리다고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글자 수 같은 거야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편집하기 쉽게 하거나 만들 책 쪽수를 재기 위한 것은 아닌가. 단순히 그런 까닭 밖에 없다면 앞으로는 노동자들 글을 모은다고 할 때 200자 원고지 몇 장이니 하는 소리는 없었으면 좋겠다. '200자 원고지' 소리만 나오면 아, 기 죽어.

-얘기가 옆길로 샜지만 어쨌든 나도 '살아온 이야기'를 원고지는 아니고 아무 데나 한번 써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며칠간 옛날을 돌이켜 보았지만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었고 자랑할 만한 것도 없었다. 조금 생활이 어려웠지만 지금 내 나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만큼 어렵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혹시 신세 타령이나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된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말이 없었고 웃지도 않았고 굉장히 무서웠다. 성격이 불 같아 한 번 말해서 안되면 두번째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매를 잘 들지는 않았지만 한 번 들기만 하면 발가벗기고 혁대로 때렸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무척 궁금했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커서 몇 번 물어 봤지만 전혀 말을 안 했다. 특히 6.25때는 어디서 보냈는지 제일 궁금했다.  

-아버지는 황해도 연백이라는 곳에서 나셨다 한다. 키가 무척 작았지만 젊었을 적엔 단단한 몸매를 가졌다. 처음 결혼한 부인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고 부인은 죽고 어떻게 하다 충남으로 내려와서 지금 살아계신 우리 어머니를 만났다 한다. 어머니 말씀은 그때 아버지는 염전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하고 중매를 선 사촌언니가 총각이라고 속여서 그런 줄만 알고 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뒤 고모부가 교감으로 있는 마포에 있는 동도고등학교 수위로 왔고 집도 학교 안에 있어서 거기서 살았다. 고모부는 학교 안에 대원군 별장이 있었는데 거기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는 그때가 가장 편하게 지내던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뒤로는 내 기억으로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으니까. 고모부는 교감으로 있으면서 그 때 서울에서 몇 안되는 부자 축에 끼어 있었나 보다. 학교 안에 큰 양계장이 있었고 만리동에도 굉장히 큰 인쇄소를 가지고 작은 아버지에게 경영을 맡기고 있었다. 또한 그때만 해도 흔치 않았던 짚차를 가지고 다니셨다고 하니 괜찮게 살긴 살았나 보다.  

-그런 고모부가 5. 16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학교를 뺏겼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른다. 5. 16쿠테타가 1961년에 일어났으니 난 그때 서너살 쯤 되었겠지. 빈털털이가 되어 고모부는 강원도 주문진으로 내려가고 우리 식구들은 지금 서대문 구청 옆, 철거민인가 피난민인가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던 양철동네로 이사를 갔다. 그 마을은 지붕이 전부 양철로 되어 있어서 양철동네라고 부른 것 같다.

-내 기억은 여기서부터 조금씩 나는데 야맹증이 심해서 밤만 되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밖에 나오면서 마루를 더듬거리던 생각이 나고 오줌소태라고 하던가? 왜 그렇게 오줌이 자주 마렵고 누려고 해도 나오지는 않는지. 거기서 지금 유진상가가 있는 홍제국민…, 아니 홍제초등학교를 처음엔 걸어다녔는데 애들 걸음으로 한 30분 걸렸을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행길(한길의 사투리)이라고 불렀던 그 길은 누런 흙먼지가 바람에 날렸고, 또 비만 오면 이번엔 진흙탕으로 변해 걷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학교 쪽으로 가다 보면 왼쪽은 전부 산이었고 오른쪽은 집 뒤에 있는 개천이 홍제초등학교 앞으로 해서 저 멀리 세검정 너머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조금 못 가서는 길 양쪽에 돌산이 있었는데 하얀 돌들을 깎아내느라 언제나 멀리 보이는 산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이 조그맣게 보였고 가끔 산 허리 쯤에서 큰돌을 무너뜨리느라 난포(다이나마이트)를 터뜨릴 때는 돌들이 길까지 날라올까봐 양쪽에서 길을 막았다.

-나중에 백련사 밑 산중턱으로 이사하고 3, 4학년쯤 되어서 길이 포장되고 버스가 다녔나보다. 그때 버스삯이 3원? 5원이었나 그정도 됐는데 버스에 올라탈 때 내는 것이 아니라 내릴 때 돈을 내었다. 그 덕분에 공짜를 많이 탄 기억이 난다. 그 때는 차장(안내양)이 앞문에 하나 뒷문에 하나, 둘이었는데 앞으로 타선 뒷문으로 내리면서 앞에서 냈다고 우기고 도망치듯 내리곤 했다. 워낙 손님이 많아 뒷문에 있는 차장은 앞문에 있는 차장에게 물어볼래야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봐도 그걸 어떻게 낱낱이 기억하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는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끼니를 때우기가 어려웠나보다. 어머니는 고개도 가누지 못하는 내 밑에 작은 여동생을 등에 업고 녹번동 좁은 산길을 넘어 은평초등학교 까지 '뽑기' 장사를 하러 걸어 다녔다. 설탕을 녹여 물처럼 만들어 붕어 모양도 만들고 동물 모양도 만들어 그 모양을 따라 옴푹 자국을 만들면 아이들이 그 모양대로 옆엣 걸 떼어내면 '보너스'로 하나 더 주는 '뽑기'. 하지만 그 모양 대로 다 떼어 내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돈들이 없는 아이들은 점심 급식으로 나온 옥수수빵을 주고 뽑기를 했다. 쌀이 떨어져 밥을 지을 수 없을 때 어머니는 그걸로 우리들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고 한다.  

-양철동네에서 마을이름이 간댓말이라는, 이대감 집이라는 곳으로 방을 얻어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백년사 밑 산 중턱에 루핑으로 지은 천막집으로 이사를 갔다. 천막을 지으려면 각꾸목(각목)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 돈이 없어 어머니가 쉐타를 맡기고 천원을 빌렸다고 한다. 아스팔트 같은 기름을 먹인 루핑집은 지금의 텐트처럼 생겼고 바닥은 가마때기(가마니) 두어 장을 깔아 놓고 한 쪽 귀퉁이에는 솥이니 그릇이니 어지럽게 쌓아 놓았지만 그 집은 남의 집은 아니었다. 산 중턱을 깎아 처음으로 지은 아니, 만든 집(?)이었지만 그런대로 살 만 했다. 아버지는 거기다 터를 잡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버지는 언제부턴지 양은 그릇도 때우러 다녔고 우산도 고치러 다녔다. 아버지가 없을 때 산지기라는 사람이 와서 남의 산에다 집을 지었다고 그 천막집을 부셨다. 어머니는 한 낮에 뜨거운 해를 피할 데가 없어 우산을 쓰고 있기도 했다. 가끔은 팔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둘 셋이 몰려다니며 허가 없이 집을 지었다고 돈은 내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천막을 들어 올려 뒤집어 버리곤 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버티면서 그 옆에 집을 지었다. 부로크를 지어 나르고 세멘(시멘트)을 바르고 스레트를 올렸다. 우물도 팠고 뒷간도 지었고 축대도 쌓았다. 불을 때는 아궁이를 만들어 놓아 형과 나는 갈쿠리로 솔가지를 긁어모아 땔감을 해와야 했고 큰 오리나무를 둘이서 번갈아 도끼로 잘라 끌고 내려오기도 했다. 산지기한테 걸리면 죽는다고 겁을 주어 산지기가 쫓아오면 냅다 도망가곤 했는데 한번도 붙잡힌 적은 없다.

-우리 집 뒷 쪽으로 올라가면서 대장간이 생겼고 집들도 몇 채 더 생겼다. 그 위 골짜기에도 집이 한 채 있었다. 우리 집 밑에는 신씨네라고 기와집이 한 채 있었고 그 집에는 포도 나무도 있었다. 포도가 탐스럽게 열릴 때는 몰래 내려가 따 먹기도 했다. 뒷산으로 올라가면 백련사라는 절이 있었고 언제나 목탁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지는 곳이었다. 하늘은 언제나 파랬다. 어머니가 장사를 하러 가서 아무도 없을 때 멀리 모래내에서 들리는 기적소리와 아스라이 들리는 비행기 소리는 가슴을 싸아하게 만들었다.  

-집 앞으로는 양철동네에서 내려오는 맑은 시냇물이 모래내 기찻길 밑으로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개천 건너편에는 집이 없던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살아 천막천(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다. 천막천 아이들과 냇가를 사이에 두고 돌팔매질도 가끔 했다. 또 천막천에는 만화가게가 있었고 돈받고 보여주는 텔레비전도 한 대 있었다. 황금박쥐와 아톰인가 하는 만화를 보려고 어머니한테 돈을 달라고 졸라 가보면 2층에 있는 골방은 꾀죄죄한 아이들이 오글오글 대고 있었고 발 꼬랑내가 코를 찔렀다.  

-앞 냇가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이 흐르지 않는 모래밭 귀퉁이에서는 아이들과 축구를 하고 놀았다. 양철동네 쪽에 개천 다리 밑에도 움막집이 한두 채 있었다. 장마가 지어 큰물이 내려갈 때는 나무, 그릇 같은 것들이 떠내려 왔고 어른들은 긴 막대기를 들고 개천 옆에 서서 그것들을 건져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겹도록 꽁보리밥에 고추장을 비벼 먹었지만 굶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가끔 수박을 사와 우리 4남매는 화채를 만들어 먹었다. 형과 나는 아카시아 그늘에서 장기로 시간을 보냈고 마당에서 팽이도 돌리고 구슬치기를 하였다.

-개고기를 좋아했던 아버지는 집에서 개를 키웠고 가끔 키우던 개를 잡아먹었다. 아버지 성격은 차가워 나와 정든 개건 뭐건 필요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잡아먹었다. 성질 급한 아버지는 잡는 방법도 조금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도끼로 머리통을 치거나 나이롱 줄을 목에 걸고 마당에 만들어 놓은 마루 밑으로 집어넣어 삼각형으로 되어 있는 다리 받침대 사이로 잡아 다녀 죽여 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이 차이가 많아서인지 의처증이 심해 어머니를 심하게 때렸다. 밥을 먹을 때 밥상을 뒤집어엎거나 어머니 머리 끄댕이를 잡고 팽개치고 발길질을 했다. 우리들을 때릴 때는 발가벗겨 놓고 가죽 혁대로 때렸다. 나는 형보다는 덜 맞고 자란 것 같다. 본디 겁이 많기도 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밤에 가위 눌리는 병이 있어, 낮에 피곤하거나 무슨 놀라는 일이 있거나 하면 밤에 잠잘 때 꼭 가위 눌려 놀랐기 때문에 나를 덜 때린 것 같다.  

-성격이 온순했던 나는 아버지를 닮아갔다. 공부도 못했고 몸이 약했던 나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맞기도 했다. 아버지는 매일 맞고만 다닌다고 너는 손이 없냐고 하면서 힘이 없으면 돌멩이라도 들어서 찍어버리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 며칠후 난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학교에서 나한테 집적거리는 놈을 돌멩이 대신 연필로 찍어버렸다.

-학교를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육성회비를 못 내 구박을 받았고 4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외우지 못 해 선생한테 맞기 일쑤였다. 5학년 때 겨우 외었지만 두 자리수 곱셈을 못 해 숙제를 할 때면 징징 울기도 했다. 숙제를 못 해 가면 선생한테 맞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가 숙제를 하면서 훌쩍훌쩍 대는 나를 앉혀놓고 두 자리수 곱셈을 꼼꼼히 가르쳐 주었다.

-몸이 약해 학교를 빠질 때가 많았다. 한번은 무단결석이라고 선생한테 종아리를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다. 육성회비도 못 내고 부모가 학교를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아 선생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커서 깨달았지만 선생이 부모를 오라고 하는 건 돈 따위를 바치라는 뜻이었다.

-정이 많은 어머님은 내 종아리를 보더니 돈 없는 게 죄라고 울먹였다. 저녁에 아버지가 들어와 내 종아리를 보았다. 그렇게 자식한테 관심 없어 보이던 아버지가 아무 말이 없더니 그 다음날 학교로 찾아왔다. 아이들이 보거나 말거나 선생한테 막 대들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고, 나를 부르더니 종아리를 걷어보이며 아이를 이렇게 때릴 수가 있냐고 눈을 부라리며 따지고 들었다. 그러면서 애 삼촌이 신문사 기자인데 신문에 내야 되겠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사과를 하라고 했다. 처음엔 대꾸를 꼬박꼬박하던 선생이 삼촌이 기자라는 말에 쏙 들어갔다. 삼촌은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런 거짓말에 쩔쩔매는 선생을 보니 야, 기자가 굉장한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내가 생각해도 공부를 너무 못했고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에 갈 것 같지가 않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공장을 들어간다고 했더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걸상다리가 그믐달 처럼 휘어, 앉아서 몸을 앞 뒤로 흔들거리면 흔들흔들하는 '개동이 의자' 공장이었다. 걸상다리를 락카칠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처음 들어가선 손가락 지문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빠(사포)질만 했다. 공돌이가 될 소질은 있었는지 붓으로 락카 칠하는 것을 3개월만에 배웠다. 그 때 월급은 6,000원 안팎으로 기억하는데 오야지는 내가 칠하는 것을 금방 배우니 나에게만 일을 맡기고 농땡이만 깠다. 전부 6개월인가 다녔다. 처음 3개월 정도는 월급을 받았는데 도급을 맡은 오야지가 나중 3개월 월급을 떼어먹고 도망을 가 그만두게 되었다.

-공장을 다니면서 교복입은 아이들을 보면 부러워 다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길게 가지는 못했지만 동아일보에서 신문을 받아다 길에서 다방으로 신문을 팔러다녔다. 하루는 독립문에서 그날 하루종일 신문을 팔아 번 돈 몇 백원을 잃어버리고 길가에 앉아 한참동안 서럽게 울었던 생각이 난다.  

-다음 해, 형이 2학년 다니다 그만 둔 범산고등공민학교를 들어갔다. 초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나는 그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1등을 했다. 그 학교는 연희동 고개에 있었는데 '인가'난 학교는 아니었다. 1학년 쯤 다니다가 학교가 망해 홍제동 화장터 옆에 있던 대성고등공민학교를 들어갔다. 그 옛날 지나가기가 무서웠던 화장터는 지금 고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대성고등공민학교에선 장학금을 받기도 하면서 다녔다. 하지만 생활이 쪼들려 힘들게 졸업하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시험을 보았다. 고등공민학교는 정식 중학교와는 달리 검정고시를 붙어야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볼 자격이 생긴다.

-용산 어딘가에 있는 선린상고에서 발표를 했다. 발표날,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나 또한 기대도 않고 혼자 발표를 보러 갔다. 합격자 명단에 내 번호가 있었다. 3713!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난 왜 그리 눈물이 많은지. 기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돈이 없어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아 서울역까지 걸어오면서 눈물을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 보았다.

-형은 그 때 범산고등공민학교를 2학년까지 다니다가 박스공장을 다녔다. 나보고 입학금을 대준다고 고등학교에 들어 가라고 해서 연합고사를 봤다. 그 때는 실업계 시험을 먼저 봐서 떨어지면 인문계를 갈 수 있는 실업계가 '전기'였고 인문계가 '후기'였다. 공업을 육성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만들었나싶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집안 사정으로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해서 혹시나 축구라도 할 수 있을까해서 한양공고 기계과를 쳤는데 기계과는 안 되고 금속과에 합격을 했다. 처음에 들어가서 1등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대학을 못 간다는 실망과 금속과에 취미가 없어 고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게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는 날마다 아침이면 백년사를 오르내리며 운동을 했고 맑은 공기를 마셨다. 여전히 몸은 빼빼 말랐지만 100미터를 13초까지 뛸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자전거를 빌려 임진각까지 4시간에 갔다오기도 했다. 형 공장 사람들하고 자전거를 타고 경기도 마석을 갔을 때는 다른 사람들은 고개 마루에서 전부 포기를 했는데 나는 마석고개를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갈 수가 있었다. 막내 여동생과 나만 학교를 다니면서 편안하게 생활하는 게 공장을 다니는 큰여동생과 형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만 아니라면 세상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은 뒤에다 방 두개를 들여놓고 전세를 주었다. 뒷집에 있는 동갑네 여자애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름이 정정란이었다. 키가 무척 작았지만 귀여운 얼굴에 언제나 명랑했다. 그 집 아버지는 딴따라 출신이었다. 집에는 전자기타까지 있어 기타를 배운다는 핑계로 그 집을 들락거렸다. 그 애는 낮에 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간호보조사 학원을 다녔다. 첫사랑이었을까. 나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그 애가 올 때쯤이면 양철동네 버스정류장까지 마중나가 집까지 둘이서 걸어오면서 얘기를 나누는 게 좋았다.

-그런대로 행복하게 살았는데 무허가라고 정부에서 철거 계고장이 날라왔다. 아파트 입주권으로 '딱지'라고 하는 것이 한 집에 한 개씩 나왔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파트 들어갈 처지가 안 되었다. 투기하는 돈많은 사람들은 딱지를 있는대로 사 들였다. 15만원인가 받고 그 사람들에게 팔았는데 그 돈으론 뒷방 전세 빼어주기도 모자랐다. 우린 또 빈털터리가 되어 양철지붕과 얇은 널빤지로 지은 다 허물어져 가는 응암동 판잣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박스공장을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긴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니까 기술을 배우지도 못하고 일하는 재미도 없었다. 형은 힘든 노동으로 위염과 어깨결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덕이 심한 나는, 또 한번 대학 검정고시를 치른다고 공장을 그만두고 시험공부를 했는데 시험 3개월전에 그만두고는 다시는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집에서 빈둥빈둥대니 용돈이나 벌어 쓰라고 아버지가 일하는 데를 따라 다니라고 해서 내키지 않았지만 가끔 따라 다녔다. 아버지는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일과 벽돌 쌓는 쓰미 일도 잘 했지만 주로 하는 일은 아궁이 고치고 보일러 놓는 일이었다. 난 아버지와 서먹서먹해서 말도 잘 안했지만 일은 열심히 했다. 어떤 집에서 일을 맡으면 한 3, 4일 가는 것도 있었는데 그 집에선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인지도 모를 때도 있었다. 서로 말을 안 했기 때문이었다. 난 시키기 전에 연장을 갖다 주었고 사모래(세멘과 모래를 섞은 것)를 개었고 벽돌을 날라다 주었다.

-군대를 앞둔 나는 또 구로공단을 헤매며 공원 모집 광고들을 훑어 봤지만 내가 들어갈 만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 번은 모집광고를 보고 집을 나와 기아 자전거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하루종일 프레스로 찍는 단순히 반복하는 일이었는데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똑같이 되풀이하는 일은 시간이 무척 더디게 갔고 지루했다. 난 성격이 급했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것보다 더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건 일이 끝나고 기숙사에서 잠잘 때 무섭게 덤벼드는 모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모기장을 치고 잤는데 모기장 살 돈도 없었지만 모기장을 칠 만한 자리도 없었고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영장이 떨어졌다. 79년 7월 19일 입대를 했다. 머리를 깎고 광운공대에 모였는데 아버지가 따라왔다. 떠날 무렵 아버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 눈물이었다. '아, 아버지도 감정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군대를 들어갈 걱정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25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610(운전)병과를 받고 진해육군수송학교를 갔다. 운전 면허증도 없는데 어떻게 운전 병과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육군수송학교에서 정비교육을 받을 때 연병장에 모여있는데 비상이 걸렸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이었다. 10.26이었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보안대로 빠져 자대 배치를 받기 위해 보안사령부에 대기하고 있다가 장위동에 있는 통신 보안대로 갔다. 궁금했던 건 보안대는 빽있고 돈있는 사람들만 간다는 곳이었는데 어떻게 그리로 빠졌는지 모르겠다. 짐작에 내 앞 번호와 내 뒷 번호도 보안대로 빠졌는데 나는 거기 묻혀 갔는가싶다. 빽고 없고 돈도 없이 어떻게 묻혀간 사람들은 부대에서 조금 근무하다 일반부대로 쫓겨나는 수도 있다. 사돈의 팔촌까지 조사한다는 신원조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보안사령관은 전두환이었다. 자대 들어간 지 얼마 안돼 또 비상이 걸렸다. 총알을 지급받고 야전 잠바도 못 입고 뛰어나갔다. 우리 부대 앞에는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공수부대가 있었는데 그 공수부대를 향하고 개골창에 엎드려 거기서 넘어오면 무조건 쏘라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우리 부대로 끌고 들어왔다고 했다. 12. 12였고 전두환이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 이었다. 밤새도록 떨면서 휴전선 철조망이 아닌 공수부대 철조망을 바라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0년 봄, 광주에 폭도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했다. 운전병들 몇 사람이 파견도 나갔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대 안에 있었다. 갔다온 부대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살벌한 얘기들 뿐이었다. 광주항쟁이었고 광주학살이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다른 부대와 달리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일요일 외출을 나가면 시내에는 공수부대들이 보였다.

-일병에서 상병으로 진급할 때 쯤인가 부대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어영부영 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차출되었다. 불량배 소탕작전인가 뭔가해서 경찰, 형사, 부대원이 한 조가 되어 경찰차를 타고 어떤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불량배, 기소중지자, 껄렁껄렁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일이었다. 전부 사복을 입고 근무했다. 나는 태능경찰서 소속이었는데 한 번은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워지더니 손님중에 한 사람이 걸상을 들어 D.J 박스 유리창을 향해 던져 와장창 깨는 것이었다. 그들 일행은 4명이었는데 우리 셋이 일어나니 낌새가 이상했던지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후다닥 도망을 간다. 내가 얼른 문앞에 가서 막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를 밀치더니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 냅다 튀는 것이었다. 100미터를 못가 나한테 잡혀서 경찰서로 넘어갔다. 그 밖에 미장원에서 돈 통을 들고 나오다가 잡힌 여자도 있었고 영산강 근처까지 내려가서 장롱 속에 숨어 있었던 기소중지자를 잡았던 일, 그 밖에는 다방과 당구장과 밤 12시 넘어 여관 임검을 나가기도 했으나 다른 건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삼청교육대를 보내는 일이 아니었나싶다.

-그 때는 나라에 충성한다는 생각도 없고, 어떤 의무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침에 기상나팔이 울리면 일어나고, 때 되면 밥 먹고, 기합주면 기합받듯이 목적의식없이 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변명한들 무엇하나. 어떤 집을 강도질 한다고 할 때 그 집에 들어가서 사람을 죽이고 훔친 놈이나 아무 것도 모르고 망 본 놈이나 똑같은 죄인인 걸.

-휴가 때였다. 그 때 우리 집은 홍제동 74번 종점 옆에 살고 있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다. 머리끄댕이를 휘어 잡고 발길로 개 패듯 하는데 도저히 두고 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막내동생 미정이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하면서 쫓아냈다. 난 막내동생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난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난폭한 성격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군대가서는 그런 성질이 더욱 굳어져 버렸다. 아버지는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 팔을 잡아 어머니를 못 때리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또 어머니한테 뭘 해준게 있느냐고 악을 바락바락 쓰고 아버지를 밀어버렸다. 어머니가 울면서 말려 나는 장롱 쪽을 돌아보면서 씩씩대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기 요강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내 뒷 머리를 향해 던지는 게 언뜻 장롱 거울에 비쳤다. 뒷 머리가 서늘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잽싸게 앞으로 숙이며 몸을 움추렸다.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사기요강은 장롱거울을 깨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맞았으면 죽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버지를 죽여야겠다고 부엌으로 나가 칼을 찾았다. 어머니가 뛰쳐나와 울면서 말렸다. 난 울면서 집을 나와버렸다.
  
-지긋지긋하게 생각되던 군대 생활이 끝났다. 큰여동생은 공수부대 중사하고 결혼을 했고 작은여동생은 서울여상 야간에 다니고 있었다. 생활은 형이 박스공장을 다니고 있어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아버지하곤 휴가 때 그렇게 싸운 뒤로 어색해서 말도 안했다. 제대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배운 것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세상물정도 알 겸 돈 없이 전국일주를 해보자고 텐트와 쌀 조금하고 돈 천원을 갖고 여행을 떠났다. 처음에 들른 곳이 성남에 있는 조그만 공장이었다.

-군대에서 사귀어 휴가 때 일주일을 같이 살았던 혜미를 만났다. 혜미는 나와 지낼 때, 제대하면 결혼을 하자고 했으나 배에 수술한 자국을 보여주며 자기와 살면 아기도 못 낳고 나중에 틀림없이 불행해 질 거라고 거절한 적이 있었다. 혜미는 전에 다른 남자와 살면서 애를 뱄지만 낳지를 못 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다. 아이는 죽었고 혜미는 다신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아이는 입양해서 키우면 되니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 했지만 도저히 결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난 그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마지막으로 달래 보았지만 혜미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이천을 갔다. 이천은 동료부대원 고향이었고 휴가 때 간 적이 있었다. 그 동료는 나보다 먼저 제대해 서울에서 일하고 있었고 어머니만 있었다. 거기서 산에다 텐트를 치고 농사일 하는데 모도 날라주고 하다가 그 근처에 무덤 만드는데 필요한 뗏장을 지게로 나르는 일을 7천원씩을 받고 일하기도 했다. 한 사나흘 일했을까. 다시 송탄쪽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베낭을 짐을 올려놓는 곳에 올려놓고 어떤 아가씨 옆에 앉아 비포장 길을 덜컹거리며 한참 가고 있는데 머리 위에 있던 베낭에서 쌀이 쫘르륵 쏟아지는게 아닌가. 손님들이 막 웃었고 내 옆에 아가씨도 웃었다.

-난 운전기사한테 미안해서 허둥지둥 베낭을 추스리고 쌀을 대충 손으로 쓸어담고 다시 자리에 엉거주춤하고 앉는데 옆의 아가씨가 그때까지 웃음을 머금고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고 있다. 그때서야 그 아가씨를 자세히 보니 옷차림이 수수했지만 맑은 눈동자에 예쁜 얼굴이었다. 수줍어했지만 몇 정류장을 가면서 얘기를 나눠보니 마음이 소박하고 시골사람다운 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서로 주소를 적어주고 여행 끝나면 꼭 편지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나중에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세 번째 답장은 다른 글씨였다. 그 때는 속았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가씨와 편지가 끊어진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곤 후회를 했다. 편지를 남에게 부탁하면서 까지 나에게 편지했던 건 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고, 더구나 직접 써서 보낸 편지에는 진실한 내용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난 언제부턴지 외곬수에다 고집불통에다 싫으면 칼 같이 짤라버리는 성격으로 변해있었다.

-송탄에서 노가다를 했다. 일주일쯤 일을 했는데 천정에 붙어있는 반네루(판넬)를 떼는 일을 하다가 반네루를 뚫고 나온 못을 밟아 일을 못하고 끙끙 앓다가 그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결국 전국일주를 해 보겠다는 꿈은 깨지고 말았다. 내 의지가 약한 때문이 아니라 발을 다쳤기 때문이라고 속으로 핑계를 댔지만 내 의지가 약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대학 검정고시를 못본 것도 돈도 돈이었고 형편도 중요했지만 사실은 내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저것 해 보았지만 오래가질 못했다. 전기 기술자를 따라 다닌다고 한 달에 7, 8만원을 받고 일을 했다. 그것도 기술을 배운다는 핑계로 월급은 작았고 일은 완전히 중노동이었다. 여의도에 있는 아파트에서 형광등을 매달고 드라이버로 조이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목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또 아파트 벽과 바닥을 따라 관을 묻고, 이름은 잊어버렸지만 강철로 된 철사를 배관 안에 집어넣는 일도 했다. 그 끝에는 전기선 몇가닥을 묶어 반대 쪽에서 철사를 잡아당기면 전기 배선이 딸려 나온다. 콘크리트 속에 묻힌 관은 곧게 뻗은 것이 아니라 꺾어져 있고 상당히 긴 것도 있기 때문에 강철선을 집어넣는 것부터 해서 거기에 묶인 몇 가닥씩 되는 전기선을 반대 쪽에서 잡아당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사람, 혹은 세 사람이 장갑 두 켤레씩을 끼고 강철선을 손에 감기도 하여 잡아 당기면서 "어지기 어자"하면서 잡아 당긴다. 그게 솔솔 따라 나오면 재미있지만 어딘가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는 진땀이 난다. 요즘에야 알았지만 그때는 왜 구호가 '어지기 어잘'까 하고 궁금했는데 건축 용어가 거의 일본말로 되어 있어 구호까지도 일본식이란 걸 알았다. 우리 구호 같으면 영치기 영차 일텐데.

-그 일을 하면서 운전 면허 시험을 봤으나 자꾸만 떨어졌다. 군대 가기 전 부터 박스공장에 있던 차를 운전할 줄 알았고 군대가서는 면허증도 없이 부대장 차 '브리샤'부터 '다찌차' '제무시' 별별 차를 해 보았다. 그런데 한 번 떨어지니 시험보러 가면 공연히 떨려서 자꾸만 떨어지는 것이었다. 일곱번 째 가서야 겨우 붙었다. 면허증 하나 믿고 전기 기술자를 따라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제 딴 면허증을 누가 써 줄 것인가. 남대문에 있는 기사들 직업소개서에 5만원을 내고 팔리기만 기다렸다. 거기는 나 같은 초보자들이 많았지만 시내버스를 하다 나이도 먹고 힘이들어 다른 거나 해 보자고 찾아온 사람도 있었고 영업용 택시를 하다가 사고가 많아 온 사람들도 있었다. 좁은 대기실은 언제나 사람들과 담배연기로 꽉 차 있었다. 예전에 일하던 곳은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었고 아니면 구석에서 때에 절은 바둑판으로 바둑을 두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사람을 구하는 전화가 오면 소개서에서 어느정도 조건이 맞는 사람을 보낸다. 사업주 쪽에서 요구하는 나이가 맞아야 되고 경력이나 지리를 어느 정도 아는가 이런 따위가 채용기준이 된다.

-돈 많은 사업주들은 돈 한푼 안들고 사람을 구하고 싼 맛에 초보자도 가끔 쓰기도 한다. 기사들은 처음에 생활에 쪼들려 앞 뒤 재지 않고 들어가지만 막상 일을 해 보면 운전 밖의 일이 너무 많거나 너무 늦게 까지 일을 해서 못 견디거나해서 그만두게 된다. 그런 다음엔 또 여기 와서 돈을 내고 더 좋은 자리가 없을까 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을 때 그나마 집안의 기둥 노릇을 하던 형이 사고를 내고 만다. 술을 먹고 공장 화물차를 몰래 끌고 운전하다 영동대교를 건너오면서 깜빡 잠이 들었다고 한다. 멀쩡히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그라나다 승용차를 냅다 받아 그 차가 밀려 또 그 앞 차를 받는 사고였다. 넋놓고 가다 얼마나 세게 앞차를 받았는지 형이 끌던 화물차는 못 쓸 지경이 됐고, 받는 순간에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배에 부딪쳐 핸들이 부러졌다고 했다. 만약 핸들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형은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었다. 코는 앞 유리창을 박살내면서 찢어졌다.  

-난 취직할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야 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영동병원을 갔더니 조그만 병실에 형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모로 누워 있었다. 나를 보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다시는 운전을 안 한다고 했다. 쓴웃음과 한숨이 섞여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코에 난 상처 뿐이 없어 말짱한 것 같았다. 병원에서도 엑스레이를 찍어 봤으나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허리를 펴질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큰 병원으로 옮기려고 응암동 서부병원으로 갔으나 받아주질 않았다. 더 큰 병원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다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갔다. 의사와 인턴들이 달라붙어 진찰을 해 보더니 장이 터진 것 같아 수술을 빨리 해야 되니 수술비를 내라는 것이었다. 돈? 돈이 어디 있나. 사람이 죽어가는데 돈부터 내라니.

-아버지는 포기한 것 같았다. 돈 구할 데가 없었다. 오로지 하루하루 먹고 사는 데만 신경을 썼지 어디 돈을 모아 놓을 여유가 있었겠나. 여기저기 다니다 아, 박스공장! 그래 일하다 사고난 것은 아니지만 박스공장에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있을 거야. 하지만 사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차 열쇠를 몰래 갖고 나가 차를 끌고 나가서 사고가 났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난 법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하지만 돈 구할 데라곤 여기 밖에 없었다. 사정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회사 사장한테 형 죽으면 이 공장 다 해먹을 줄 알라고 반 협박으로 30만원을 받아냈다. 난 그때 다 떨어진 청바지에 신발은 군대에서 신고 나온 군화를 신고 다녔고 입은 거칠었다. 누가 봐도 개차반 같은 성격으로 볼 만했다.

-모자란 대로 입원비를 내서 겨우 수술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술은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형은 갈비뼈만 이상이 없었고 장과 쓸개가 하나도 성한 것이 없었다. 핸들이 부러질 정도였으니 그럴 만했다. 형은 세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원무과 에서 올라오는 치료비는 감당할 수 없어 내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니 거의 다 나을 무렵에 4개월동안 밀린 치료비는 1,300만원이나 되었다. 의료보험도 없었다.

-형을 살게 해 준 것만은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예 포기하여 상관도 안 하고 난 250만원 짜리 전세방을 빼서 200만원을 내고 퇴원시켜 달라고 사정을 했다. 사정? 순 배짱이었겠지. 그나마 50만원 정도는 우리 식구가 비라도 피할 수 있어야겠기에 줄 수 없었다. 전세를 들었던 계약서도 보여주었다. 병원에서는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병원 원무과에서 직원이 우리 집도 와보고 사정을 알았지만 막무가내로 자꾸 돈을 더 내야 퇴원 시켜 준다고 했다. 사실은 막무가내는 나였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진 게 없으니 배짱이 생겼다. "없는 걸 어떡하란 말이요?"

-그새 몸이 많이 좋아진 형은 퇴원을 하고 싶어 안절부절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고 살면서 애가 둘이나 있었던 형은 빨리 나와 돈을 벌어야 했다. 불안해하던 형은 나 없는 사이에 병원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도망을 나와 강원도 고모집으로 갔다. 며칠 뒤 조선일보였나? 우연히 어떤 신문을 보니 세브란스 원무과 직원 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나한테 돈을 더 받으려고 우리 집도 와보고 했던 그 원무과 직원이었다. 우리형이 도망을 나오고 난 뒤 같은 병실에 있던 환자 하나가 또 돈을 못 내고 도망을 갔다고 했다. 그 원무과 직원은 과장으로 승진하던 참이었는데 그 책임이 돌아가 '좌천' 되었다고 해서 잠실 어느 높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다는 기사였다. 난 잠깐동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이내 차갑게 돌아왔고 동정이 가지 않았다. 우리 같은 사람도 살려고 하는데 그런 아파트까지 갖고 있는 사람이 자살해?  

-우리 식구는 50만원으로 경기도 가라뫼에 있는 게딱지만한 방 한칸 짜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 형수, 조카 둘 여동생하고 나까지 일곱 사람이 한 방에서 살았다. 난 형이 나을 무렵 직업소개서에서 팔려 충정로에 있는 우아미가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면 처음엔 내가 누울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자지만 잠이 들면 엎치락 뒤치락 하여 잘 자리가 없어져 난 다시 집에서 나와 모래내 잔디밭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 취직한 우아미 가구점은 운전하면서 가구를 날라야 했다. 운전이야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톱밥으로 만들었다는 우아미 가구는 무거워 그걸 나르기가 힘이 들었다. 둘이서 장롱을 옮기는 데는 힘과 기술이 필요했다. 어떤 연립주택은 3, 4층을 들고 올라가야 했는데 1층에서 2층, 2층에서 3층으로 구부러진 계단에서 장롱을 돌리는 건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장롱 수평을 맞추는데도 기술이 필요했다. 장롱 수평이 맞지 않으면 나중에 뒤틀려서 문이 잘 여닫기지 않는다. 장롱을 사간 집의 방이 수평이 잘 되어 있으면 수평을 맞추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은 집은 꽤나 힘들었다. 모든 하찮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모든 게 그 나름대로 요령이 있었다.

-그 때 월급이 20만원이었는데 생활하기가 벅찼다. 노동일을 하던 아버지는 당뇨병이 생겨 기운이 떨어져 거의 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군대에서 갖고 나온 군화를 신고 다녔다. 형수 때문에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자거나 밖에서 잤기 때문에 청바지는 내 일복 겸 잠옷이었다. 또 200원 짜리 청자를 피웠고 점심은 라면으로 때웠다.

-우아미 가구점 바로 옆에는 페인트 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에는 경리를 보던 아가씨가 창으로 보였는데 꼬시고 싶었다. 하지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지금 내 처지에 어떤 여자가 따를까 하고. 그 아가씨는 짧은 생머리에 이마에는 여드름이 있었지만 생기가 있었다. 언제나 명랑한 얼굴에 촐랑촐랑 까불었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출퇴근할 때는 손에 007가방처럼 생겼지만 그것보단 작은 자주색 가방을 갖고 다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클래식 음악 테이프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하루는 어디 배달을 나갔다가 밤 11시가 넘어 가구점 쪽으로 들어가는데 그날 따라 그 아가씨가 늦게 퇴근을 하는 중이었다. 어김없이 그 가방을 들고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서로 얼굴은 아는 정도 였는데 난 문득 아, 기회는 이때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뜸 말을 걸었다. 시간 좀 내줄 수 없냐고 하니 그 아가씨가 머뭇머뭇 거리기에 거절하는 말이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밑져 봐야 본전 아니오?"하고 다시 한 번 말을 툭 내던지니 고개를 까닥까닥거린다. '어렵쇼, 이 아가씨 보기보단 다르네.' 하고 생각하고 속으로 좋아서 신이 났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서대문 쪽에 있는 다방을 가리켰다. 지금은 동아일보가 들어서있다.

-"저 밑에 있는 다방에서 차나 한 잔 합시다"했는데 아차,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게 생각나서 먼저 가 있으라고 했다. 터벅터벅 내려가는 걸 보고 얼른 우아미 가구점으로 들어가 같이 일하는 사람한테 돈 천원을 빌렸다. 그때 커피값이 500원 이었다. 다방으로 서둘러 가면서 '다방에 들어가 있을까, 간 것은 아닐까? 비싼 거 먹으면 어떡하지? 내라 그러지 뭐, 까짓거 안되면 말지.' 별 생각을 다했다. 다행히 그 아가씨는 커피를 시켰다. 그 여자의 이름은 '은자'였다. 강원도 간성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언니하고 올라와 있었다. 그 뒤로 몇개월 동안 은자와 연애를 하다 결혼식도 안하고 가라뫼에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한참 연애를 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우아미가 팔려 그만두게 되었다. 다시 직업소개소에 가서 한 달을 기다려 팔려 유한킴벌리 대리점을 들어갔다. 말이 대리점이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화장지 뽀삐나 여자들 생리대 '후리덤' 따위를 쌓아 놓은 창고였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을 약방이나 슈퍼마켓 같은 데로 팔러 다니는 판매사원을 태우고 차를 운전하는 일이었다. 낮에 고스톱을 치면서 농땡이를 까던 판매사원들 땜에 늦게 끝나는 일이 너무 잦아 사장에게 항의하다 1년을 못 채우고 해고 아닌 해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는 해고 인지도 몰랐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버지는 나이도 더 들고 당뇨병까지 심해져 의처증이 더욱 심해졌다. 형은 방을 얻어 나가 자기 식구 먹여 살리기에 바빴다. 다시는 운전을 안 한다고 했지만 시내버스 회사를 들어가 아예 직업 운전사가 되었다. 막내동생 미정이는 태권도장 겸 속셈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그 관장하고 결혼을 했다.

-우리 아기가 달 수를 못 채우고 9개월만에 태어났다. 몸무게가 2.25kg이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는데 포기하고 싶었다. 하루에 6만원이라는 큰 돈이었다. 큰 여동생이 도와줘 일주일동안을 인큐베이터에서 키우다 돈을 감당 못 해 죽으면 죽고, 살면 다행이라고 그냥 키우겠다고 퇴원을 시켰다. 난 아기가 태어난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게 짜증스러웠고 세상이 살기 싫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 지금은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다시 운전기사 직업소개서에 가서 죽쳤다. '부림환경'이라는 회사에 운전사로 들어갔다. 조그만 사무실 하나 얻어 놓고 소독하는 일을 하는 회사였는데 운전 뿐만 아니라 소독도 해야 했다. 아파트 집집마다 바퀴벌레 약을 놓고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벌레먹은 나무들을, 긴 막대기를 단 분무기로 약을 뿌리고 기관단총 마냥 어깨에 걸고 "부드드드" 하는 소리가 나는 기구로 약을 뿌리는 일도 했다. 가로수에 뿌리는 약이 무척 독했던 것 같다. 성 기능에 장애가 생겼고, 세 사람이 합작해서 만든 회사였는데 돈벌이가 시원찮아 갈갈이 찢어졌다. 난 겸사겸사 또 그만 두어야 했다.

-마누라는 두번째 아기를 뱄다. 벌써 5개월이 되었다고 했는데 난 두말없이 지우라고 했다. 키울 자신도 없었고 애기가 좋은 줄도 몰랐다. 병원에 갔더니 나중에 후회한다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마누라는 애처롭게 나를 쳐다 보았다. 뭐 생각할 거 있냐고 하여 아기를 지웠다. 병원에서 표현한 대로 '아기를 죽여서' 돌려 낳고 병원을 나왔다. 마누라는 눈물을 글썽이며 많이 아팠다고 나를 원망했다. 그동안 형은 시내버스를 하고 있었고 형이 '대형'이라도 따 놓으라고 해서 틈틈이 대형 시험을 봤지만 번번히 떨어졌다. 네 번이나 보고 나서야 붙었다.

-나는 이번에 성북동으로 팔려갔다. 그 집으로 가기 전에 조건이 까다로워 많이 망설였다. 늙은 부부가 둘이서만 살았고 그 집 자가용을 운전하는 일이었는데 늦게 까지 운행할 때가 많으니 출 퇴근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방은 준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지하 차고 옆에 조그맣게 들여놓은 방이었다. 연탄도 땔 수 없고 보일러도 안 되는 방이었다. 그건 둘째 문제고 그것도 방이라고, 방을 주는 대신에 자기들 빨래를 해 달라는 조건이 있었다. 말이 빨래나 하는 거지 마누라 보고 식모살이를 하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내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어도 마누라 식모살이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를 갔다와서 마누라보고 그런 말은 안 하고 도저히 조건이 맞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하니 어떤 조건이냐고 꼬치꼬치 묻는다. 얘길 안 하다가 그런말을 했더니 마누라는 가겠다고 했다. 그까짓 것 빨래 못 해주냐고.

-몇 달쯤 일을 했을까.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마누라가 안돼 보였다. 행복한 신혼의 단 꿈은 커녕 남의 집 식모살이라니. 하루는 운행 갔다 일찍 들어 왔는데 마누라는 빨래를 해 주러 갔는지 보이지 않고, 이불 위에서 혼자 잠자던 아기는 잠에서 깨어나 그 차가운 방안을 울면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형이 자꾸만 시내버스를 해보라고 권하는 걸 대형 경력이 없는데 누가 써 주냐고 하면서 미루고 있었는데 도저히 그 꼴 보곤 못 살겠다싶어 되든 안되든 시내버스 한번 해 보자고 주인집에 얘기하고 며칠 뒤에 거길 나왔다. 대형면허 딴 지 5개월 쯤 되던 때 였다.

-다시 가라뫼에 짐을 옮기고 우이동에 있던 삼화교통 333번을 들어갔다. 333번은 우이동에서 봉천동까지 왕복 운행하는 꽤 긴 노선이었다. 들어갈 때 운전경력이 짧아 성북동 자가용 경력을 2년으로 가짜로 만들었다. 3일짼가 노선 견습을 받다가 형이 자기 차를(운행 차) 타고 나가자고 해 그 차를 탔다. '노선 견습'이란 그냥 차를 타고 다니며 정류장을 익히는 것이었다. 한참을 가다 서울역 광장을 지나 정류장에 멈춰 서더니 형은 나보고 운전대에 앉으라고 하며 일어선다. 어떻게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갑자기 버스를 할 수 있냐고 못 하겠다고 하니 날 때부터 버스 한 사람이 있냐고 신경질을 부리며 손님들이 보고 있으니 빨리 운전대에 앉으라고 한다.

-에라 모르겠다. 뭐 버스가 별거겠냐 하고 운전대에 앉아서 차를 끌어보니 이건 무슨 집채가 움직이는 것 같다. 자가용하곤 감각이 달랐고 차 폭이 달랐다. 정류장을 들어서 문을 여니 손님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탄다. 아, 저 사람들은 내가 버스 초보자인줄 모르지. 신기했다. 손님이 다 내리면 뒷 문에 있는 안내양이 올라 오면서 "탕탕" 치면 다시 한 번 백미러 보고 앞문 닫고 부웅. 나는 이제야 내 직업을 찾았나보다고 생각했다. 일 하는 게 재미가 있었다. 처음으로 돈을 떠나서 일 자체가 재미있는 걸 찾았다.

-333번은 난장판이었다. 우이동 종점에서부터 손님들이 꾸역꾸역 타기 시작해서 정류장 네 다섯개만 지나면 더 태울 수가 없었다. 손님들은 그차를 놓치면 죽기라도 한다는 듯이 차에 매달렸고 차를 부릉부릉 조금씩 움직여야 떨어져 나가는 것이었다. 서울역 까지 오면 그 다음 부터는 내릴 손님이 없으면 무조건 정류장 통과를 했고 한 두 사람이 있으면 정류장 맨 앞에다 찔러 박고 내려주고 튀어야 했다. 휴일도 없이 달 수를 넘어 따블을 타 33개, 35개를 하면 40만원정도 였는데 누런 월급봉투는 알아보지도 못하게 대충대충 적혀있고 떼는 건 왜 그렇게 많은지.  

-앞에 엔진이 있어 숨이 콱콱 막혔고 더위에 땀띠, 똥구멍에 치질 따위가 괴롭혔고 운전복이라고 나온 건 완전히 나이롱이라 몸에 척척 휘감겼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얼른 돈을 벌어 방을 구해야 했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다 87년, 노동자 데모가 날마다 일어났다. 사회현실에 어두웠던 나는 막연히 데모하는 건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까닭은 몰랐다. 버스는 그래도 굴러다녔다. 최류탄 연기가 자욱하고 돌멩이들이 버스 지붕위로 날라다녔다. 최류탄 때문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운전을 했다. 신기하게도 돌멩이들은 버스 유리창으로는 날라오지 않았다. 서울역 광장에서 대모대들이 몰려 다니다 전경들에게 쫓겨 내 차로 몰려 왔을 때는 문을 열어 주었고 뒤이어 쫓아온 전경들이 올라올까봐 얼른 문을 닫아 버리면 전경들은 문만 발로 차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대모하는 대학생들은 꼬박꼬박 버스표를 내고 올라왔다간 전경들이 가버리면 또 다시 우르르 내려갔다.

-시내버스도 파업을 했다. 333번도 잠깐이나마 운행을 정지했다. 노조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하여튼 파업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신이 났다. 기사들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데 나도 몇마디 떠드니까 형이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질렀다. 데모가 끝났고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333번이 한성으로 넘어가 사표를 쓰고 홍제동 161번으로 왔다. 그 동안 악착같이 살았던 마누라 덕분에 200만원 갖고 홍제동에 방을 구하려 했으나 복덕방에서 보여주는 개천옆 방은 너무 허름해 응암동에 주인집과 부엌을 같이 쓰는 방을 하나 구해 살았다.

-다시 2년이 지나 회사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한다고 마누라가 400만원을 겨우 맞춰 갖고 홍제동을 갔다. 복덕방에서 400만원 짜리 방이 있다기에 같이 가 봤는데 2년 전에 봤던 개천가에 있는 그 집이었다. 조금씩 우리 월급이 올라 저축하고 해도 전세값을 못 따라가고 있었다. 누구한테 속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홍제동 산동네에다 방 하나를 구해서 살았다. 다시 2년을 열심히 일만 했다. 노조 선거가 한 번 있었지만 그게 우리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몰랐다. 산 밑으로 이사오고 싶어 돌아다녀 봤지만 지하실방 밖에 없었다. 낮에도 불을 켜 놓아야 보이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조금 나아 보이기에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흔 셋이었다. 10년 동안 당뇨병으로, 반평생 의처증으로 몸고생, 마음고생 하다 방학동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쓸쓸히 돌아가셨다. 어릴 때는 나에게 그래도 제일 잘 해 주었지만 커서는 나와 제일 많이 싸웠다. 벽제 용미리에 묻힐 때 형이나 동생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를 묻는 일꾼들은 저승갈 때 노자돈이 필요하다고 자꾸만 돈을 달라고 했다. 그만해! 씨팔. 돈이 없어서 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셨는데 저승 가서 무슨 노자돈이 필요해? 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하고 싸운 걸 뉘우쳤다. 그렇게 안 싸우고도 될 문제였는데.  

-홍제동 지하실방에서 살 때는 방에 곰팡내가 나는 것만 빼고는 그런 대로 살 만했다. 뒷 산에 올라가 축구도 했고 아들 태희도 무럭무럭 자랐다. 바둑 책도 사보고 기원에도 가끔 들러 바둑을 두기도 했다. 집에 오는 골목길에는 주민독서실이라는 곳이 있었다. 한 권 빌려 보는 게 3백원이었나? 하도 싸기에 집에 올 때는 한 권씩 빌려 버스 운전을 하면서 보기도 했다. 그 주민 독서실은 나를 어둠속에서 끌어내 준 곳이었다.

-전에도 책을 많이 봤지만 그것들은 우리들과 동떨어진 삶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혹시나 어떤 책들을 보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초등학교 교과서 부터 동화 책, 그 밖에 또 위인전 같은 책들, 내가 볼 수 있었던, 볼 수 밖에 없었던 모든 책들은 우리들이 사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였고 나를 어느 한 쪽으로만 끌고 갔다.

-내가 초등학교 때 책에서만 생각나는 건 '아버지 아버지 우리 아버지'하고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밖에 없다. 조금 높은 학년이 되어서는 이승복 어린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외치고 그말을 들은 무장공비가 입을 찢어버리고 죽여 버렸다는 것과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우리 대한민국을 집어 삼키기 위해 쳐들어 왔다는 것과 우리의 원수 공산당은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남김없이 무찔러야 한다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하는 노래가 생각난다.

-또 있다. 선생님한테 맞을까봐 외우려고 안달을 했던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도 생각난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나는 어떤 무리들에게 알게 모르게 한 쪽으로만 생각하기를 강요 받아왔던 것 같다.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은 내 생각, 내 의식을 캄캄한 굴 속에다 쳐박아 두게 만들었다. 지금 '나라사랑겨레주민회'로 바뀐 그 때 그 주민독서실은 조그맣고 허름한 집에 전세를 내 바닥에 장판을 깔고 벽 쪽으로 책꽃이를 만들어 책들을 진열해서 동네 주민에게 싼 값에 책을 빌려주고 있었다.

-책을 좋아했고 값이 싸 자연히 들르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봐 왔던 책들, 흔한 사랑 타령하는 책들을 보았다. 이제 볼 만한 것이 없어 뭘 볼까 하면서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거기서 태백산맥을 읽어보라고 한다. 태백산맥? 제목만 봐도 신물나게 생각되는 공산당 무찌르는 전쟁소설 제목 같고 너무 길어 엄두가 안났다. 구석진 곳에 '쿠바혁명과 카스트로'라는 책이 보였다. 혁명? 혁명이라는 소리만 나면 괜히 거부감이 생겨 무슨 책인가 훑어보니 만화책이었다. 첫 장에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서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쿠바의 민중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이 책을 바친다.'고 나와 있는데 쿠바? '쿠바' 하면 공산주의 국가 아닌가. '승리'라니 누가 승리했다는 말인가. '카스트로' 하면 김일성 만큼이나 무서운 독재자라고만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책은 나를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끌어낸 책이었고 세상의 다른 한 편을 볼 수 있게 만든 책이었다. 내가 속고 살았나? 알고 싶은게 너무 많았다. 태백산맥을 보았고,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 찢겨진 산하, 거꾸로 읽는 세계사, 노동의 새벽, 새는 좌우의 날개로 산다, 이제는 거부감이 드는 제목들만 골라 밤을 새워 책들을 읽고 버스 운전을 하면서 책을 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감쪽같이 속고 살았다니.

-박정희가 독립군 때려잡던 일본군의 관동군 소좌였다니. 5. 16혁명이 아니라 쿠테타였다니. 건국의 아버지인줄 굳게 믿어왔던 이승만이 친일파를 등에 업고 단독정부를 세운 '망국의 아버지'인줄 꿈엔들 알았으랴. 내가 근무했던 보안부대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은 쿠바의 바티스타 같은 독재자였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이제 생각해 보니 내가 밤새 공수부대 철조망을 향해 총을 겨누었던 일이 쿠테타의 한 부스러기였다. 어릴때부터 의심 한 번 안 해본 우리의 우방이니 '혈맹'이니 하며 불러온 미국은 자유대한을 공짜로 지켜주고 이 세계 자유를 지키는 수호신인 줄 굳게 믿었는데.

-중세유럽 때 마녀사냥이나 미국의 상원의원 이름에서 나온 매카시즘이나 선거때마다 빨갱이가 나타나는 건 기득권자들이 언제나 쓰는 방식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왜 3월 1일 근로자의 날과 5월 1일 노동자의 날이 따로 있는가 했는데 1886년 미국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5월투쟁과 1946년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든 '조선 노동 조합 전국 평의회'(전평)에 대항해 1946년 3월 10일에 이승만이 '…노자(노동자와자본가)간의 친선을 기한다'며 만든 '대한 독립 촉성 노동 총연맹'이라는 거짓 연맹인 '대한노총'의 역사를 보고야 '아하!' 하고 무릎을 쳤다.

-관념론과 유물론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세상은 모든 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노조 선거할 때 "그게 밥 먹여줘? 우린 열심히 일만 하면 돼"했는데 현실은 외면하고 죽어라 일만 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책을 보다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가 받는 임금을 계산해 보려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계산이 되질 않았다. 뭐 이렇게 월급 계산이 복잡해? 조합 사무실을 가서 계산법을 알려고 했으나 그런 건 알아서 뭘 해? 하고 구박 맞았다. 노동운동단체를 찾아 헤맸다. 버스에 대해서 잘 안다는 보문동을 갔다. 서울버스 노동자 협의회? 야, 이런 곳이 있었네.  

-근로기준법, 단체협약을 알아야 했다.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전에 우이동에 있을 때 연장근로 수당을 찾는다고 기사들이 떠들어 월급봉투에 몇 푼 더 나왔던 것을. 그 때는 또 전국에서 통상임금 때문에 말이 많았다. 통상임금은 기본급에다 정기로 지급되는 근속수당, 승무수당, 식대와 교통비를 합친 임금인데 월차수당이니 야간근로수당이니 하는 모든 수당을 계산하는 임금이다. 그런데 시내버스 사업조합과 기사들에게 어용단체라고 욕을 먹는 서울버스지부가 '기본급(통상임금)'이라고 요상하게 맺어놓고 기본급은 곧 통상임금이라고 우기며 모든 통상임금으로 주어야 할 수당을 기본급으로 지급하여 왔다. 그것을 내가 계산해 보니까 3년동안(임금시효 3년) 2백만원이 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만 시내버스 기사가 2만이 되니 그게 얼마나 큰 돈인가. 나는 그때서야 사업주들의 본색을 알았다.

-그걸 노조에 얘길하니 먹혀드나. 내 밥그릇 누가 찾아주냐고 해서 3년동안 받았던 임금을 계산해 사업주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그 때 한겨레신문을 보면 6개 도시에서 60명이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1심에서 지고 항소를 했는데 소송이 거의 끝날 무렵 나와 같이 소송을 걸었던 사람들이 졌다. 분명히 우리가 옳았고 또 택시들은 통상임금으로 받고 있는데 왜 같은 나라에서 법이 다른지. 난 실망하여 그 뒤로 법원에 가지 않았다. 판결문은 집으로 날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흐지부지 끝났다. 난 그때 변호사도 없이 법원에 들락거리면서 누가 우리편이고 누가 적인 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난 분명히 알았다. '회사를 내 집처럼 근로자를 가족처럼' 이라는 번지르한 말 뒤에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 임금을, 권리를 떼어먹고 있다는 것을…. 또한 법이란 건 우리처럼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게 아니란 것도 알았다.

-회사에 말없이 일하던 사람이 근로기준법을 찾고 권리를 찾으려고 하면 금방 예전과는 다르게 압박이 온다. 우선 해고 시키려고 온갖 트집을 잡는다. 차도 똥차를 준다. 그러나 난 그까짓 억압은 상관이 없었다. 나는 회사에 종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회사 대표와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도 이제부터 당당하게 권리를 찾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일에 너무 신경을 쓰니 몸이 많이 약해졌다. 내가 밤잠 안 자고 그런데 신경을 너무 쓰니 마누라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나 보다. 더구나 어용조합인 조합장은 나를 쫓아내려고 말다툼한 걸 가지고 형사고소를 해 경찰서까지 드나들었다. 그 때문인지 마누라가 한 번은 쓰러지더니 3일동안 일어나지 못 해 약국에서 소개해 주는 무슨 링겔 주사를 맞고 겨우 일어났다.

-그럭저럭 삼화교통을 들어간 지 7년이 넘었을 때 회사가 삼화상운으로 넘어갔다. 돈 많다는 삼화교통이 돈이 없어서가 판 게 아니라 시내버스가 시시해서였겠지. 삼화상운이 삼화교통을 살 때 조건이 기사들에게 먼저 사표를 받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다시 입사를 받아 준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회사가 넘어가면 기사들까지 같이 넘어가는 '고용승계'를 원칙으로 해야 하는데 근속수당을 없애고 햇수 차는 기사들 퇴직금 떼어 먹자는 수작이었다. 겉으로는 회사는 관여를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용조합이 뭘 받아 먹었는지 조합장이 사표를 받았다. 난 사표를 안 쓰고 버텼다. 인쇄물을 만들어 뿌리고 몇 사람을 모아 절대 사표를 쓰지 말자고 약속했다. 고용승계를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회사에서는 한 사람씩 불러 꼬드겼다. 한 사람씩 떨어져 나가고 나머지 다섯 사람이 남자 나에게 해고 통보서를 보냈다. 그걸 보더니 나머지 사람들도 사표를 써 주고 말았다. 우리 기사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우리 식구는 일산에 17평 짜리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비록 내 집은 아니지만 지하실 곰팡내를 맞지 않는 것만 생각해도 살 것 같았다. 누가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아 취직할 생각도 않고 고민만 하고 있다가 147번 동해운수를 갔다. 과장이 대뜸 하는 말이 조합일에 관여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시내버스 채용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것 같았다. 사업주한테 배운 '오리발'을 내밀었다. "아니요, 우리 그런 거 몰라요." 전화로 '조회'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하라고 했다. '까짓거 안되면 말지 뭐.' 나가 있으라고 해서 사무실을 나왔다. 한 30분을 밖에서 기다렸다. 안되면 말지 하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취직이 되지 않으면 다른 곳도 분명히 안 될 건 뻔했다. '안되면 말지' 하고 생각했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틀렸구나.

-그 때까지도 삼화교통 본사에 사표를 안 써주고 해고무효소송을 건다고 했기 때문인지 말을 좋게 해 주었을까. 내가 취직이 되면 삼화교통으로 소송이 안 들어 올까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틀렸나보다 생각했는데 과장이 들어오라고 하더니 내일부터 노선 견습을 하라고 하면서 지정병원에서 하는 건강진단을 받으라고 했다. 야, 됐구나. 와서 일을 해보니 여긴 더 '개판'이었다. 숙소는 쥐가 돌아 다녔고 월차적치도 안 해주고 수당으로 주었고 쉬는 시간 없이 뺑뺑이를 돌아야 했다. 단체협약은 있으나마나였고 기사들을 종처럼 부려먹었다. 그래도 여기 와선 조금 참아보려고 했다. 마누라가 너무 고생하는 게 안타까웠다. 참고 살자. 참고 조용히 일만 하자.

-하지만 그냥 일만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갈 무렵 새로 당선된 조합장이 보문동 출신이었다. 보문동은 아까 말한 '서울운수노동자협의회'를 말한다. 나는 보문동에서 배운 대로 동해운수 노보를 창간했다. 시내버스에서 두 번째로 생긴 노보였다. 첫 번째는 삼양교통이었는데 그 때는 벌써 없어져버린 뒤였고 우리 동해운수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조합에서 교육 선전부원이 됐다. 노보를 만드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사들은 회사에서 찍힐까봐 도와주지 않았고 우선 돈이 없었다. 노보는 겨우 두 번 나오고 말았다. 여러 곳에서 들어오는 방해도 있었고 제일 큰 까닭은 조합장이 변한 것이다. 혼자서는 노보를 만들 수가 없었다.

-원당영업소로 발령이 나서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 기사들이 속된 말로 '가다 브레이크가 들었다'고 하는, 브레이크가 한 쪽이 밀리는 바람에 앞 승용차를 받는 접촉 사고가 났다. 차 뒤 범퍼만 상처가 난 조그만 사고였는 데 대번에 배차를 빼버려 일을 주지 않았다. 과장에게 왜 일을 주지 않냐고 항의를 했다. 과장 눈이 놀란 토끼눈처럼 동그래졌다. 뭐, 이런 놈이 있냐는 거겠지. 며칠 뒤 다시 화전 147번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한다. 이번엔 내가 눈이 동그래졌다. 이리로 발령 받은 지가 언제라고 금방 또 화전으로 가서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또 항의를 했다.

-회사에서 내 이름표를 화전에다 걸어놓고 무단결근이라고 하는 걸 무시하고 원당으로 출근을 했다. '운전사가 무슨 시계불알이야? 꺼떡하면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게?' 동해운수는 영업소가 몇군데 있어서 회사 마음대로 기사들 일하는 곳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일부러 집하고 먼 곳으로 보내는 걸로 압박을 해 기사들을 휘어 잡는 것이다. 한 동료 기사가 나를 말렸다. 싸우더라도 '링위에서 싸워야 된다.'고. 그래. 여기서 해고 되면 오랫동안 일을 못하겠지. 마누라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 화전으로 쫓겨났다.  

-월차를 적치하는 것부터 싸움을 시작했다. 안 된다고 버티던 회사에서 월차는 적치 시켜주더니 연차가 발생했을 때는 돈으로 나왔다. 여기선 월차는 돼도 연차는 안 된다고 했다. 은행에서 연차수당을 찾아다 과장 책상위에다 올려놓고 나는 연차도 적치해서 휴가로 쓸테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안 된다고 버티던 회사가 그럼 법으로 하자고 회사에서 나오니 다음달부터 해 주겠다고 했다. 대신에 앞으로는 휴일에는 일할 생각을 말라고 했다. 기사들은 휴일에 당연히 쉬어야 되지만 월급이 작아 생활이 안되기 때문에 휴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다. 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날 쫓아낼 무슨 건수가 없나 꼬투리를 잡으려고 회사에서 무진 애썼다. 살얼음판을 걷듯이 그렇게 조심했는데 지각을 해서 10일 정지도 먹었다. 마누라는 여기와서도 그런다고 좀 조용히 살자고 애원했다. 난 그럴 수는 없었다. 마누라에게는 미안했지만 알고 있는 한 조용히 일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조용히 일만 하면 할 수록 사업주는 더욱 더 뒷구멍으로 우리들 권리를 후려갈 것이다. 결국 난 조합에서 제명을 당했다. 끈 떨어진 가방이라고 하나? 겉으로 드러난 까닭은 분회장을 몰아내려고 했던 사람의 증인을 서 주었기 때문이라지만 내가 아무래도 껄끄러우니 회사와 분회장과 짜고 나를 제명시켰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월차적치 한다고 3년 동안 휴일근무를 주지 않아 한 번도 휴일날 일을 하지 못했다. 생활이 어렵다고 마누라는 보험회사를 나갔다. 식모살이를 시켰는데 이젠 보험회사까지 나가게 만들었으니 할 말이 없다.  

-시내버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한다는 논리는 어려워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내버스 사업주들이 하는 꼴을 보면 금방 '아, 그런 거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다.
기사들의 쥐꼬리만한 임금을 떼어먹는 방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난 87년에 연장근로를 오랫동안 떼어먹은 것이 들통나 기사들이 들고 일어나니 못 이기는 척 하면서 떡값 이름으로 얼마씩 주지를 않나 통상임금은 곧 기본급이라고 정해 놓고 임금 계산을 하는 것이나 월차 적치를 시켜주지 않고 수당으로 곧바로 주어 휴가권을 없애 버리는 것도 있다.    

-우리 기사들은 하루에 아홉 시간 일을 한다. 여덟 시간은 기본 근로, 한 시간은 연장 근로인 데 이른바 '따블'이라는 이름으로 하루종일 일을 하면 열 여덟 시간을 일을 하게 된다. 여덟 시간은 기본급으로 주고 나머지 열 시간은 연장근로로 계산해 주어야 하는 데도 열 여섯 시간을 기본급으로, 나머지 두시간을 연장근로로 계산해 주는 방법으로 기사들 임금을 착취해 왔다. 그 모든 것들을 어떤 기사가 소송을 걸어 이기면 그 때 부터 할 수 없이 주는 것이다.

-그 중 대표가 되는 게 근속수당이라는 것이 있다. 근속수당은 회사에 들어온 날부터 해마다 올라야 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87년까지 그 근속수당을 주지 않은 게 들통이 나 그 때부터 주기 시작했는 데 아무리 오래 된 기사들도 그때부터 입사 날짜로 계산을 해 준 것이다. 하지만 임금 협상에서 다른 수당을 없애버리는 수단으로 사업주는 그 손해를 봉창 해 왔다. 난 그 때만 해도 관심이 없어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승무수당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것도 언제인지 슬그머니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우리 기사들 월급을 보자. 시내버스 뒷 유리창에 '시내버스 기사 모집' 이라고 선전을 해 놓은 것을 보면 월급 150만원에 여러 가지 혜택이 있고 상여금이니 뭐니 해서 무척 많아 보이는 것처럼 눈속임을 해 놓았지만 파고 들어가면 우습지도 않다. 우선 우리 기사들 기본급은 64만8천5백76원 밖에 되지 않는다.(97년 2월 현재) 거기다 교통비니 근속수당이니 무사고 수당, 연장근로수당, 여러 가지 수당을 합쳐야 월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그러니 회사에서 선전하는 대로 150만원이 되려면 휴일에도 일을 해서 휴일근무수당에다 상여금에다 또 퇴직하고 받을 퇴직금까지 다 합쳐야 되지 않을까? 하긴 상여금도 퇴직금도 임금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 하지만 빠진 게 있다. 우리기사들은 빡빡한 운행 시간 때문에 사고가 나거나 딱지를 떼 1년에 한두 번 정지를 먹을 때가 있는 데 그런 '손실임금'은 아예 계산에 넣지도 않는다. 게다가 월급 봉투를 받아 보면 세금이니 고용보험이니 떼는 건 또 왜 그렇게 많은지.

-해마다 임금 협상 때면 어용노조와 사업주가 짜고 '파업'이라는 연극을 한다. 결국은 '극적타결'이라는 '타령'으로 끝을 맺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 시내버스에서는 애초에 조합원들이 파업을 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감히 회사의 허락(?)없이 차를 세워? 그런 연극을 하고 타결을 한 것을 보면 기본급은 쥐꼬리만큼 올려놓고 무사고수당 같은 걸 만들어 '임금 총액' 몇 프로 올렸다고 생색만 낸다. 그 무사고 수당은 이를테면 어떤 기사가, 피해가 한 3,4만원 짜리 사고가 났다고 했을 때 회사에 알리지 않고 자기 돈을 물어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괜히 회사에 찍히기 싫고 그걸 물어내도 일이 만 원은 남는다는 얕은 계산을 하기 때문이고 또 그런 조그만 사고라도 회사에서는 그 사고 처리를 한다는 핑계로 일을 며칠 주지 않아 '만근'을 안 시켜주기 때문이다. 만근이라는 것은 한 달 30일에서 휴일을 뺀 26일을 채우는 것이다. 그 만근을 못하면 무사고수당, 월차수당, 주휴수당 따위를 받지 못 해 한 달에 20만원 남짓 차이가 나버리니 얼마나 손해인가. 그래서 어떤 기사는 몇 십만원짜리 사고가 나도 자기가 물어내는 사람도 허다하다.

-기사들이 회사에서 먹는 밥도 문제가 있다. 흔히들 기사들은 개밥이나 짬밥이라고 말들을 하는 데 그럴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밥 값은 천 원 짜리였다. 지금은 올라 천 2백 원 이지만 여전히 짜장면 값의 반도 안되는 천 2백원이니 그게 개밥이지 사람이 먹는 밥일 수가 있나. 그나마 월급봉투에는 찍혀 나오지 않는 회사가 많다. 그게 찍혀 나오면 퇴직금 계산할 때 아무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복지에 대해서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노사간에 맺은 단체협약에 기숙사, 휴게실, 양호실 따위 여덟 가지 복지시설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 회사를 비롯한 많은 시내버스 회사들이 그런 복지시설이 단 한 가지도 없다. 한 가지도!  

-시내버스 기사들은 해고당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정식으로 해고 통보서를 보내 자르는 것도 있지만 대개 회사에 찍혀 어떤 건수가 있으면 일을 주지 않아 못 버티고 스스로 나가게 된다. 우선 먹고 살기 힘들고, 법으로 싸우려면 이삼 년 노동일이라도 하면서 버텨야 하는 데 그게 보통 쉬운 일인가. 또 법으로 건 사람들은 다른 곳에 취직하기가 힘들다. 옛날 노비 문서보다 더 무서운 현대 정보망으로 그 기사의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기사들은 법정까지 갈 생각을 아예 하지 못 하는 경우가 많다.

-또 버스표가 아닌 '돈'을 내는 좌석버스에서 아직도 이른바 '삥땅'이라고 하는 걸 치는 곳도 있는데 그런 회사는 이 삥땅을 무기 삼아 조합원을 휘어 잡고 이익을 챙긴다. 기사들이 회사 돈을 삥땅을 쳐 돈을 훔쳐(?) 가져가는데 어떻게 회사가 이익을 볼까? 간단하다. 회사에 협조하는 기사가 삥땅치다 걸리면 슬쩍슬쩍 봐준다. 협조하는 기사란 근로기준법 따지지 않고 나 죽었소 하면서 일만 하는 기사를 말한다. 그런 기사가 삥땅을 쳐서 돈을 가져가봤자 새발의 피다. 봐주면서 대신 '삥땅을 쳤다'하는 진술서를 받아둔다. 그러나 그런 기사가 회사에 밉게 보이거나, 배차 시간이 없다고 불평 불만을 하거나 월차 적치를 하는 따위 무슨 권리를 찾으려고 하거나 하면 그 때는 사정없이 자를 수 있다. 이때 전에 받아 둔 진술서가 무기가 된다. "야, 임마, 도둑놈이 무슨 권리를 찾아?"

-또 조합 선거가 있거나 할 때 조합과 회사는 짜고 그런 사람을 선거 운동원으로 내세운다. 아주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그렇게 봐주던 기사도 쫓겨나는 경우가 많다. 언제인가 하면 그 사람이 1년이나 2년이나 햇수가 차기 바로 직전에 퇴직금을 주지 않으려고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것이다. 일이 년 쌔빠지게 삥땅 쳐봐야 퇴직금 못 받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회사는 기사들 휘어잡아 좋고 돈 벌어 좋고. 그걸 보고 꿩 먹고 알 먹고 라고 하던가?

-더 심한 경우는 2, 3년 넘은 사람들 운행하는 차 뒤를 따라 다니다가 삥땅치는 현장을 잡는다. 처음에는 그냥 진술서나 하나 써주고 일 하라고 꼬신다. 기사가 거기 넘어가 진술서를 써주면 "됐어, 내일부터 그만 둬."하고 아예 퇴직금을 한 푼도 안 주고 쫓아낸다. 기사가 그런 법이 있냐고 항의할 수가 없다. 항의하면 "너, 경찰서 갈래?" 한마디만 하면 되니까. 그러니 기사들 삥땅 암만 쳐봐야 회사에서는 이익을 볼 수밖에. 이 밖에도 많지만 그런 거 저런 거 다 쓰자면 한이 없다.

-운전기사들이 모자란다고 한다. 다 헛소리다. 10년전 단체협약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나빠졌고 10년 전 운행횟수가 그대로 바뀌지 않았다. 근무시간은 늘어났고 월급은 적어 생활하기가 어렵다. 운행시간이 빡빡해 쉴 시간이 없다. 손님들은 버스기사들이 원래 성질이 나빠 '난폭운전'을 한다고 한다. '원래'는 아니지만 '난폭'은 사실이다. 그렇게 안 하면 살벌한 시내버스에서 버틸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사가 딸릴 수밖에. 기사들은 버스회사에서 일하다가 자기가 있던 회사가 나쁜 점이 있으면 고치려고 해 볼 생각은 않고 '더러워서 나간다.'고 한다. 아니면 '치사해서' 나가고.

-그러나 일하던 회사는 그런 기사가 나가면 '아, 우리 회사가 뭐가 나쁘니까 저 기사가 나가는구나' 하고 그걸 절대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기사는 더 좋은 버스회사를 찾아 기웃거리지만 좋은 회사가 어디있나. 노동자들이 요구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알아서 해주는 그런 사업주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그렇게 철새처럼 옮겨다니는 기사들과 '나 몰라라'하는 사람, '내 일만 잘하면 되지' 하는 사람들 땜에 시내버스 사정은 점점 나빠지게 되는 것이다.

-지금 서울버스지부와 사업조합 사이에 '임금협상중'이라고 들었다. 그렇다. 임금협상중인데 조합원들은 돌아가는 사정을 모른다. 그냥 '임금협상중'인줄만 알지 더 이상은 모른다. 사업주들은 협상하는 자리에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너 멋대로 하라 이거지. 스스로 무덤 판 꼴이다. 기사들에게 어용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버스지부는 해마다 파업을 무기로 쇼를 해왔다. 그러다가 똑같이 '극적타결'로 끝을 맺고. 그 파업은 지들이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건데 우리 기사들한테는 교육 한번 없고 홍보 한 번 없다. 사업장마다 노보를 만들어 의식은 깨우쳐 주지는 않고 오히려 방해만 했다.

-지난번 시내버스 사업주들 착복사건 때도 파업한다고 거창하게 벌려서 투표까지 해 놓고 파업한다는 전날까지 아뭇소리 없기에 전화를 해 "파업하는 거요, 안 하는 거요"하고 물으니 남 얘기하듯 기사들이 파업하는 걸로 다 알고 있지 않냐고 오히려 나한테 묻는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어떤 행동지침도 없고 조합에선 아무런 연락도 없는데 언론에 "시내버스 내일부터 파업!" 하면 기사들이 '어, 내일부터 파업이구나'하고 일을 안 나오나? 이제 사업주들도 배짱 튀길 만 하다. "파업? 어디 한 번 해봐."하고. 

-난 시내버스 13년 째 일해왔다. 변덕이 죽 끓듯해 이것저것 해 봤지만 시내버스에 들어온 뒤에는 내 체질에 맞아 천직이라고 생각하고 오로지 버스만 했다. 여느 기사처럼 손님들하고 다투기도 하고 옆 차들과 싸움도 하면서 시내버스를 하고 있지만 해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나 혼자라도 사업주와 싸워가면서 정년까지 시내버스를 할 생각이다. 혹시 알아? 내 아들, 내 조카가 나처럼 시내버스를 할지. 내 아들, 내 조카가 시내버스에 들어와 일을 할 때 "야, 그래도 아버지 때문에 시내버스 일하기 좋아졌어." 하는 말을 들어야 되지 않을까?(199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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