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21)



한국전쟁 때 북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조금이라도 고향이 가까운 바닷가에 얼기설기 천막들을 치고 머물기 시작했다가 4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천막들이 그대로 판잣집으로 변하면서 동네를 이룬 곳이 인천의 한 바닷가에 있었다. 어깨를 옆으로 돌려야만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처음 그 동네에 들어선 사람은 대부분 길을 잃고 헤매게 마련이었는데, 그 좁은 길 옆에 나 있는 문을 열면 바로 안방이고 부엌이어서 방문을 열어놓고 사는 한여름에는 온 동네가 한집이나 다름이 없었다. 누구네 집에 밥숟가락이 몇개인지조차 훤히 알고 지냈다.

‘노동과건강연구회’ 해산총회의 눈물

1981년엔가 내 친구 하나가 빈민활동을 한다고 그 동네에 방을 얻어 들어갔는데 이사간 지 일주일이 되도록 그 동네 공중변소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 집집마다 변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로 자동 세척되는 커다란 공중변소가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어서 열심히 걷다보면 같은 길을 자꾸 맴돌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 친구는 하는 수 없이, 세숫대야에 일을 본 뒤에 물을 붓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은 다음, 작은 수채 구멍을 통해 버리는 방법으로 급한 일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1983년 초, 토요일마다 그곳에 찾아와 주민과 노동자들에게 진료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서울대병원의 한 ‘아리따운’ 간호사가 후배들과 함께 나타났다. 김은희(44)씨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10년도 훨씬 더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노동자들의 건강을 다루는 모든 현장에서 김은희씨를 볼 수 있었다.

1986년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자전문병원 ‘구로의원’이 설립되었을 때에도, 1988년 노동과건강연구회가 창립되었을 때에도, 15살의 나이 어린 소년 문송면군이 단 두달의 온도계 제조작업으로 수은에 중독되어 뼛속까지 시커멓게 썩어들어 사망했을 때에도,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죽음이 이황화탄소중독 때문임이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에도, 회사 정문 앞 아스팔트 도로 위에 산재사망자의 시신이 든 관을 놓고 백수십일이 넘는 농성을 했을 때에도, 그 밖의 유기용제·카드뮴 중독을 비롯한 산재노동자사건의 모든 현장에서, 나는 유가족들을 붙들고 함께 오열하거나 사람들에게 사건의 내용에 대해 호소하거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노동자 건강의 적’인 권력과 자본을 규탄하고 있는 김은희씨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1998년 12월, 김은희씨가 젊음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동과건강연구회’가 더 큰 조직으로 태어나기 위해 10년의 활동을 마감하고 해산총회를 하는 날, 사회를 맡았던 김은희씨는 회의장 바깥 길가에서 대성통곡했다. 총회 전까지는 오히려 “더욱 큰 발전을 위해 해산이 불가피하다”고 사람들을 설득했던 그였지만, 정작 총회 당일에는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총회 장소에 들어왔다가는 터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어 다시 뛰쳐나가기를 되풀이했다. 결국 그날 사회를 진행하지 못했다.

그날 밤 길모퉁이에서 오랜 시간 김은희씨를 달래던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 조태상(32)씨다. 두 사람의 나이 표시가 잘못된 줄 아는 이도 있겠으나 아니다. 남편 조태상씨는 아내 김은희씨보다 정확하게 12살이 젊다. 흔히 말하는 ‘띠동갑’(개띠)이다. 이들 부부는 “우리는 완전히 개판이지요. 뭐…”라고 곧잘 농담을 하곤 한다.

지금 민주노총의 산업안전보건차장으로 일하는 조태상씨는 또다른 의미로 우리나라 운동권의 ‘정통파’이다. 대학에서 관련학과(사회복지학)를 전공했고 노동운동단체가 신문에 낸 광고를 보고 찾아가 공개채용되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했다.

사건의 단초, 송광사의 저녁 예불

초등학교 6학년 때 장티푸스를 심하게 앓으면서 “간호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은 뒤, 자라는 동안 그 꿈이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가 결국 간호사가 된 김은희씨나, 고등학교 때 일찍이 한해에 중·고등학생이 500명씩이나 자살해야 하는 이 ‘썩을 놈의 제도권교육’에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현장에서 일하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조태상씨가 가지는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 인생을 거는 ‘외곬’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지극히 세속적인 관심을 한번 풀어보자. 솔직히 나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먼저 눈치챈 주변 인물들 중 한 사람이다. 몇해 전, 여럿이 아랫녘 남도지방으로 노동조합 교육을 간 일이 있었는데, 올라오는 길에 두 사람이 송광사의 저녁 예불을 보고 싶다고 일행에서 빠졌다. 그때는 몰랐으나 몇년 뒤에 나도 송광사의 장엄한 예불을 보고 그 칠흑처럼 깜깜한 길을 걸어내려오는 경험을 해본 뒤 깨달았다. 코앞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어두움이 고체의 질감으로 주변을 감싼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숲길을 순전히 동물적 감각과 본능에만 의지한 채 걸어내려오는 경험을 하고나서 깨달았다. 김은희와 조태상 두 사람이 손을 마주잡은 채 이 길을 함께 걸어내려갔다면 이것은 분명히 ‘사건’의 단초가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만일 그날 저녁에 내려가지 않고 장엄한 예불을 목도한 뒤에 그 감격을 품고 산사에서 함께 잤다면 그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는 것을…. 하여, 둘이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으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두 사람도 최근에 와서야 “그날 이후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한다. 그러니,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몸달아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어서 빨리 송광사의 저녁 예불을 찾아가볼 일이다.

대원칙, 매일 밤 만난다!

그러나 12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야 하는 사랑이 어찌 쉬웠으랴. 조태상씨가 먼저 김은희씨에게 명확하게 심경을 밝힌 뒤, 두 사람은 “한강 주변을 걸으며 함께 많이 울었다”고 했다. 소설책 몇권은 됨직한 긴 얘기 중에 하나만 소개하자. 조태상씨가 ‘연애’ 당시 지켰던 원칙들 중에는 “매일 밤 김은희와 만난다”는 것이 있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하는 김은희씨였지만 조태상씨는 어떻게 해서든 실제로 김은희씨를 매일 밤 만났다. 그런 지극한 사랑이 맺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김은희씨는 지금 ‘서울노인복지센터’의 기획홍보 일을 맡고 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대전환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딱히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노인들은 일제 말, 한국전쟁, 근대화 등 우리 역사상 중요한 시기의 모든 고생을 감당한 세대이다. 그들이 일흔살쯤 되었을 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우리 세대가 당연히 해야 할 도리이고, 그것은 노동자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인생을 걸었던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5천명의 노인이 다녀가고 2천명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하는 그곳에서 김은희씨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노동자’와 ‘노인’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공통점은 모두 소외된 계층이라는 것이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두 사람의 관심은 일생 동안 지속될 것이다. 내가 볼 때에는 그것이야말로 12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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