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군 사령부(장면 정부 지지만 할 뿐 행동은 없음), 장도영(오후4시30분에 수락), 윤보선(오후 10시에 특별담화), 장면 갈팡질팡
- 전두환(ROTC교관으로서 지지)
- 수도경비사령부 설치
- 이한림 체포
- 육사생도 지지시위
- 장도영이 장면 찾아가서 설득. 국무회의에서 수락.
- 군사혁명위원회가 민주당 각료들을 체포. 장도영과 불협화음이 시작됨.
- 국가재건최고회의(입법, 사법, 행정 총괄), 장도영은 최고회의장, 국방장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직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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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조직 일소(4,200명), 반체제인사(2,100명)
-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전환. 민심수습책으로 땐스광(?) 최고 1년까지의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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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7일 (일) / 제 1 회

<인간 박정희 上>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난  인간  박정희는  가난과  왜소한  신체에  콤플렉스를 느끼며 
생활을  한다.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살아가던  그는 응어리진  한
을  대야망으로  설계하면서  교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해방  이듬해, 북경의  해방광복군에 있던  그는  개인자
격으로  서울로  돌아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는
데  곧  대구폭동사건이  발생하고, 그때 그가  가장  따랐던  셋째
형(상희)이  현장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1947년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뒤  남로당과  관계를  맺
어  군복을  벗었다가 6.25 가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1950년
7월  육본  전투 정보과장으로  발령받고  후배  김종필,석정선,이
영근  등을 불러'2.26사건  시말기'란  책을  건네주고  쿠데타를 
계획 한다. 또한  일생동안  부부의  연을  맺었던  세여자(김호남,
이여인,육영수)와의  결혼생활  모습

1993년 2월 21일 (일) / 제 3 회

<5.16쿠데타>

치밀한 사전모의에도 불구하고  거사계획은  탄로나고, 박정희는
술취한 채 쿠데타를 지휘한다. 육참총장 장도영의 소극적인 쿠데
타 저지와 장면총리의 피신으로 마침내 쿠데타군은 무혈로 서울
을 점령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한다.

1993년 2월 28일 (일) / 제 4 회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와  미국대리대사  마샬그린의  쿠데타
반대성명  발표. 수녀원에  숨어버린  국무총리  장면. 사태
수습에  갈팡질팡하는  육참총장  장도영. 혼란의  와중에서
제1군사령관  이한림장군외  체포와  장면내각의  총사퇴로
장도영을  전면에  내세운  군부는  입법,사법,행정 3부를
장악한다.

1993년 3월 7일 (일) / 제 5 회

'군사정부  출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혁명내각 구성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한 군사
정부. 대통령 윤보선의 하야발표와 번의.최고위원 선정을 둘러싼 
혁명 주체세력간의 갈등. 5.16직후의 혼란 속에서 부패한 구정권
을 비판했던 혁명주체들도 점차 권력의 맛에 탐닉되기 시작하면
서 권력투쟁의 막이 오른다.

1993년 3월 14일 (일) / 제 6 회

'혁명,혁명과업'

혁명공약의 실천을 위한 군사정부의 활동.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이후락, 김종필에 의해 골격을 갖추어가는 중앙정보부.
깊어만가는 2기와 3기의 불화속에 장도영은 일방적인 행동으로 
혁명주체들의 눈밖에 나게되고, 장동영을 견제하려는 비상조치법
이 기초되면서 장도영과 박정희의 불화는 깊어진다.

1993년 3월 21일 (일) / 제 7 회 

'장도영 거세'

비상조치법으로 군통수권을 잃어버린 장도영은 분노를 폭발시키
는데, 이 사실은 거세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법이 
통과되고, 김종필의 5기생에 대한 견제가 극에 달하자 5기생을
중심으로 김종필 제거작전이 은밀히 진행되지만, 결국 반혁명모의
죄로 장도영과 5기생들은 체포되고 만다.

1993년 3월 28일 (일) / 제 8 회 

'박정희시대  개막'

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하면서 18년 박정희시대의 막을 연 박정희.
불만세력 제거로 권력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본격적인 국내 및
대외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화진포의 한미회담 등으로 국제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8.12 성명을 발표하여 민정이양을 약속하
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93년 4월 4일 (일) / 제 9 회 

'남북대화, 그리고 황태성'

5.16직후,서해의 용매도에서 극비리에 진행됐던 남북 비밀회담. 인
사교류,문화교류 등의 의제로 4차회담까지 진행한다. 한편,북한은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거 박정희와 절친했던 황태성을 내려
보내기도 하지만, 남북한의 입장차이로 남북회담은 결국 중단되
고, 황태성은 간첩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1993년 4월 11일 (일) / 제 10 회 

'군사정권  외교'

박정희는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 한일관계, 5.16 소원해졌던 
한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다. 일본을 방문
한 박정희는 공식석상에서 유창한 일본말을 구사하는가 하면 요정
에서 자민당 간부들에게 큰절을 하기도 하는 등 상례를 벗어난 행
동을 한다. 또 미국에서는 케네디에게 월남 파병을 먼저 제의해 파
문을 일으키는데...
그 와중에서 극비리에 통화개혁이 준비된다.

1993년 4월 18일 (일) / 제 11 회

'공화당 사전조직과 증권파동'
 
박정희는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하고있던 기간중 자신
은 민정이양에 대비해 극비리에 정당을 사전조직한다. 정당조직 
자금 확보에 부심하던 김종필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불리는 증권파
동과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다.

1993년 4월 25일 (일) / 제 12 회

'통화개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제 2차 통화개혁을 위한 화폐가 극비리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경제
개발과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장농속에 감추어져 있는 돈을 끄집
어 내겠다는 의도였으나 미국의 반발과 국민들의 원성만 샀을뿐
소득없이 끝나고 만다. 한편 민정이양을 위한 직선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되면서 권력내부에서는 민정 참여파와 원대
복귀파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진다.

1993년 5월 2일 (일) / 제 13 회

'2.18 (이일팔) 성명'

정치활동이 재개되면서 이른바 구정치인들은 선제의 기치를 내걸
고 대통령후보의 단일화를 모색한다. 그동안 극비리에 사전조직됐
던 공화당은 김종필을 중심으로하여 전면에 드러나지만 여전히 원
대복귀를 주장하는 군정내부의 반김종필계에 의해 심각한 내분양
상을 보인다. 군부는 박정희에게 실력행사로서 민정불참을 압박하
고 마침내 박정희는 2.18 민정불참성명을 발표한다.

1993년 5월 9일 (일) / 제 14 회

'김종필의 외유와 군정연장 음모'
 
4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민의 비난, 그리고 혁명주체들의 반발을 견
디다 못한 김종필은 급기야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오른다.
김종필 없는 공화당이 휘청거리고 있을때 박정희는 군과 정치인
한자리에 모아놓고 혁명과업을 계승하겠다는 선서식을 하게한다.
이자리에서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다시 한번 천명했으나 쿠데타사
건을 조작하고 현역군인의 데모를 연출하는 술수를 보이더니 마침
내 군정연장 성명을 발표하고 만다.

1993년 5월 16일 (일) / 제 15 회

'백조그릴 위장 약혼식 사건'
 
군정연장 성명에 대한 반발이 극심해지자 박정희는 조야 영수회담
을 열어 사태를 수습해 보려하나 감정대립만한채 결렬되고 만다.
그동안 박정희의 민정참여를 반대하던 군은 태도를 바꿔 지프 시
위를 벌이면서 박정의의 군정연장을 지지하고 나서자 야당은 약혼
식을 가장한 데모를 벌이는 등 투쟁에 나서고 박정희는 결국 군정
연장을 번의하고 만다.

1993년 5월 23일 (일) / 제 16 회

'범탕작전과 친위 쿠데타'

군정연장을 번의한 박정희는 이번에는 민정참여를위한 본격적인
공작에 들어간다. 이재만이라는 인물의 두뇌를 빌어 대항세력의
와해를 위해 범탕이라고 불리던 범국민당의 조직에 나선다.

한편 노태우, 전두환 등 육사 11기생들은 김종필계의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나 실패로 끝나고 이 사건으로 범탕작전의 산파였
던 김재준은 물러나게 된다. 범탕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박정희
는 군복을 벗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1993년 5월 30일 (일) / 제 17 회

'김형욱의 대통령 당선 작전'

그동안 난립해 있던 야당은 대통령선거를 목전에 두고 후보단일화
를 꾀하나 단일야당 국민의 당은 창당대회에서 난투극으로 끝을
맺고 만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는 밀가루 무상배포 등 선심공세를
펴는 등 본격적인 대선 작전에 나선다. 박정희와 윤보선으로 압축
된 5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사상논쟁과 윤보선의 5.16 사전 내
통설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데 결국 박정희는 의심쩍은 호남
지역 몰표에 힘입어 윤보선에 신승을 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3년 6월 5일 (일) / 제 18 회

'정치자금 정치공작' 

제 3공화국은 출범했으나 윤보선은 부정선거를 이유로 자신이야말
로 정당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김형욱은 야당거물 유진
산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등 정치공작의 술수를 발휘하
고, 여당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삼분폭리 사건과 국유용지 불정
불하사건을 일으켜 국회에서 크게 논란이 된다.

김형욱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야당의원 유창열을 고문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한다.

1993년 6월 13일 (일) / 제 19 회

'6.3 사태, 上 '
 
정치자금과 경제개발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박정희
는 한일회담을 타결짓고 그 청구권 자금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국
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회담 강행에 나선다. 그동안 군사정권의 
위압에 눌려 지내던 학생들은 매국적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4.19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를 벌인다.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 일본을  방
문한 김종필은 국내의 거센 반대데모 때문에 서둘러 귀국하고, 한
편 국내에서는 김종필을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이 수립되기
도 한다.

1993년 6월 20일 (일) / 제 20 회

'6.3 사태, 下'

김종필. 오히라 데모토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에 대한 실질적인 
협의를 보자, 국민들은 고작 청구권 3억불로 36년간 일본의 수탈
을 묻어버렸다고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대학가의 데모는 민족
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으로 정점에 달하고, 중앙정보부는 학원사찰
을 통해 대학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정부는 국민들의 입을 봉쇄
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

1993년 6월 27일 (일) / 제 21 회

'진산파동' 
 
계엄사태의 책임을 언론에 돌리고 있던 박정권은 동아일보에 무장
군인을 난입하는 사태를 만든다. 제도적으로 언론을 규제하기위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이 정부에 의해 제안되는데 야당은 법 반대
를 위한 극한 투쟁을 선언했다가 막상 국회에서 표결에 붙이자 슬
그머니 퇴장해버리는 수상쩍은 태도를 보인다. 법 철폐를 위해 언
론계는 극한 투쟁을 선언하고, 마침내 박정희는 법시행의 전면 유
보를 발효한다.

한편 야당은 언론법 통과시 유진산과 여당의 묵계설로 심한 갈등
을 겪는데 결국 윤보선은 진산을 당에서 제명시키고 만다.

1993년 7월 4일 (일) / 제 22 회

'월남파병'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
을 휘몰아치던 1964년 겨울, 박정희는 비밀리에 월남파병 계획을
추진한다. 외무부장관 이동원을 앞세워 미국에 파병에 따른 선결
조건을 제시하지만 미국의 반대에 부딪치자 박정희는 차지철로 하
여금 여당내에 파병 반대를 선동하라는 전략적인 지령을 내린다.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죽음은
정계에 엄청난 파급을 가져오고 야당은 결사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여당일당국회를 통해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고 위수령을 발동, 군대의 힘으로 국
민적 저항을 억누르고 만다.

1993년 7월 11일 (일) / 제 23 회

'김두한과 사카린 밀수사건' 
 
부총리실 캐비넷에서 나온 귀금속들로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위 
공직자  기강 운운하고  한편으론  이후락, 김성곤  등과 정치자
금  모금에  몰두한다. 김종필의 생일잔치에서  공무원의  요정  출
입  문제로 김종필계는  박정희에게  심하게  반발하고 이에  박정
희는  대노한다.정치자금  헌납과 맞물려  삼성의  한국비료사건
과  사카린 밀수사건은  터지고  야당은  정경유착이라고 규탄하
며  철저한  규명을  요구한다. 삼성의 밀수사건  대정부  질의에 
나선  김두한은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는  해프닝을 벌이
고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삼성의 이병철에게  한국  비료의  국
가헌납을  강요한다.

1993년 7월 18일 (일) / 제 24 회

'3선 개헌' 
 
3선개헌은  결코  하지않을  것이라는 박정희의  발언에도  불구하
고  공화당은 이후락, 김형욱을  중심으로 3선개헌의 준비작업에 
몰두한다.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친JP계의 복지
회사건으로  김종필은  궁지에  몰리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정
치생명을  건 개헌저지투쟁을  벌인다.신민당은  재야와 재야와 
연계해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하여  전국적인  저지
투쟁을  전개하지만 공화당은  국회  제3별관에서  단독으로 날치
기  통과시킨다.

1993년 7월 25일 (일) / 제 25 회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이후락과 김형욱은 권력
형 축재로 전격적인 해임을 당한다.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 이
철승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
마하고 야당중진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신민당수 유진산은 자신
의 후보 출마문제로 고민한다.

한편, 박정희는 중정부장 김계원에게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
보로 만들 공작을 지시하고, 번민하던 유진산은 마침내 김영삼을 
후보로 이에 열세에 놓인 김대중은 이철승을 포섭, 대역전극을 연
출하며 신민당 후보로 당선된다.

1993년 8월 1일 (일) / 제 26 회

'유신전야' (마지막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공작과 거대한 물량공세로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구상한다. 국무총리에
임명된 김종필을 견제하던 공화당의 김성곤, 백남억등이 JP계인
내무장관 오치성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자 박정희는 중정을 통
해 이들을 잡아들인다.

정계에 국회해산, 친여쿠데타 루머가 무성한 가운데 중정부장 이
후락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이후락의 건의로 박정희는 남북
적십자회담을 전개, 마침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다. 궁정동 안가에서 비밀리에 제정중이던 소위 유신헌,1972.10.
17 박정희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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