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과 육영수>

- 당시 수사발표는 총성이 아닌 것을 총성으로 하고, 두발의 총탄은 사라짐.

- (1)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이 북괴의 사주를 받아 문세광에게 지시' 했다고 발표
(2) 버렸다고 한 총 두정 중 한정이 집에서 발견
- 김호룡이 기자회견했으나 한번도 조사받지 않음
- 문세광이 진술하기도 전에 수사본부 명의로 신문지상에 보도 (실제로는 수사본부가 발표한 적이 없음)

- 문세광: 재일교포 2세. 한국청년동맹 활동가. 한청 1등급 요주의 인물이 어떻게 귀국했는지.
- 입장 하루 전 청와대 경호실에서 경비완화를 요청
- 사건 일주일 전에 한국 남자가 전화를 받음
- 김종필이 중정에 나타나서 한국 남자에 대해서 함구할 것을 요청
- 사건 하루 전에 중정에서 문세광 숙소를 발견 / 815 D-day, 권총, 투쟁일기, 등 10종의 압수물을 들고 떠남.

- 저격을 지시했다는 사람, 입원처 알선했다는 사람, 등 거의 거짓으로 발표. 이 사건으로 인해 한청과 조총련은 큰 타격을 받음.

- 중정은 문세광의 영사관 폭파계획을 사전에 입수하고, 1년 동안 발표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민단계 신문 <통일일보>에 사주해서 만든 신문.

- 사건 1년 전 (문세광의 편지가 노출된 이후) 불쑥 한청을 찾아온 Y가 활동을 자원하면서 문세광과 친해짐. 그 후 문세광의 씀씀이가 달라짐. 그는 사건 직후 나오지 않음. (사건 1년 후에서 일본 언론에서 주목)
- 문세광은 병원 입원하면서 한청과 연락을 끊음.
- Y는 사건 2달 전 조직폭력배에게 총 구해달라고 함.

- 문세광은 가짜 일본여권, 일본경찰의 총 이용
- 경찰서에는 문세광의 발자국 아님. 지문도 발견되지 않음.
- 일본대사, 일본 자민당에서 특사 파견
- 연일 반일시위

- 꼭 1년 전에,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김종필 총리가 일본 방문.
- 김대중 사건 수사종결로 인해 일본 언론 논조 악화
- 외교적 처리 과정에서 입지가 넓어지고, 긴급조치 1, 4호 해제, 최종 수사발표와 문세광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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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해직사건>

- 방송사 사주들이 불려가 방송사 포기각서를 쓰고 언론통폐함 이루어짐.
- TBC 동양방송은 고별방송을 함.

- 신군부의 보도지침. (보안사 이상재 준위가 주도)
- 기자협회에서 반대움직임(제작거부) 있자, 계엄확대조치.
- 80년 광주항쟁에서 언론은 침묵.
- 국보위 출범. 많은 언론인, 기자들이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함.

- 정관계 인사, 언론인, 젊은이들 대거 숙정. (김대중, 삼청교육대, 등등)
-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 - 11, 12, 15대 국회의원 - 한나라당 당무의원 - 국민회의 부총재 - 새천년민주당 부총재 -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이상재 (한나라당 지구당위원장), 허문도, 등이 실무분야 주도
- "사주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신군부에 영합한 가해자"

- 전두환 찬양의 시작
- 언론의 정관계 진출은 언론탄압 시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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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비리>

원용수 준위의 수첩
병역비리의 대부 박노항 원사
김대업이 막혀있는 수사 도와 (병무 면제과정, 의학지식)
98년 병역비리 합동수사본부 (군/민간 검찰단)
군의관들의 자백을 받기위해 면책을 약속. 면책 약속 후 진술서.
99년 발표.
이명현 수사팀장이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부의 압력에 밀렸다고 탄원함. 고석 검찰부장-이명현 수사팀장의 갈등커짐. 김대업의 신분노출로 군의관의 지원 줄어듬.
관련 헌병이나 기무 기관원들의 압력에 의해 면책특권 폐지. 군의관들만 대거 처벌.
기무 기관원들이 김대업을 수사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압력행사.
01년 기소된 김대업 구속. (채권채무관계에 의한 사기죄)
01년 박노항 구속으로 마무리.
시민단체에서 재수사 요청.
국회의원들은 기획수사라며 반발. 고위층 병역실명제 발의.
03년 1월. 이회창의 두 아들 병역비리 고발, 공무원 사칭으로 다시 구속.


12만 중 1/10이 병역면제
사회관심자원 - 지도층 인사, 재벌, 연예인

병원에서부터 시작(필름바꿔치기) - 알선(기무사, 헌병대, 병무청, 군의관) - 군의관

1970년대 중앙병무청 창설
석사장교제도(4개월 교육 2개월 전방근무 후 예비역 소위로 전역) 일시적 유지
90년대초 병역비리 늘어 대부분 강남의 부유층, 중산층까지 확대 (면제자 62%가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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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의 진실>

민주와 화해를 위한 시국수습선언
"629는 속이구" 반쪽의 승리였다..

- 0413 호헌조치(직선제 개헌을 대통령 선거 이후에 하겠다는 것)
- 0500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발표
- 0609 이한열 열사
- 0610 노태우 대통령후보 추대, 610대회 20개 도시 24만명 참여
호헌을 유지, 610대회 연행자 전부 구속, 국민운동본부에게 내란혐의
- 0610 김근태 고문폭로, 권인숙 성고문사건, 박종철
- 0615 명동성당 시위대 해산
- 0618 최루탄 추방대회, 민정수석이 직선제 수용 건의 "이거다. 노태우에게 내가 보냈다고 얘기해라."
노태우는 "내각제 얘기를 이미 했으니, 직선제 수용에 난색"
- 0618 철야시위
- 0619 군동원 검토. 출동준비 상태에서 출동중지명령. 안병호 당시 육본 작전처장이 군 내의 의사 밝힘.
- 0624 전두환 김영삼 여야 영수회담 회동과 결렬. 전두환 "직선제를 해도 이기지 않겠어?" 김대중 사면복권도 노태우에게 이양.
- 0626 야당의 장외투쟁
- 0629 노태우는 한국의 정치기적을 이룬 인물로 보도
- 0709 이한열 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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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건국대점거농성 사건>

- 1100 검찰에서는 '공산혁명분자들의 건국대점거난동'으로 발표. 1290명 구속. 실형 90명. 23명 국가보안법.
-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연합 29개 대학 2,000여명의 학생.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
- 경찰이 이례적으로 집회를 방임. 대신, 집회의 퇴로를 차단. 퇴로가 없는 검거작전.
- '깨부수자', '원수', 등의 단어를 가지고 빌미. 방송사와 기자들의 취재는 묻힘.
- 반공이데올로기, 국가보안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빌미
- 최상엽 공안부장. "옛날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무덤에 갈때까지 얘기 안하기로 결심했다."

- 85년 학원안정법 제정 및 군대로 (김형오 대통령 비서실, 현재 한나라당 원내 대표)
- 86년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 우호적 태도 취함. 반미 투쟁이 타격이 된다고 생각함.
- 86년 4월 서울대 김세진 분신. 5월 이동수 분신.
- 86년 금강산댐 공작사건
- 86.10 마르크스-레닌주의당(ML당) 조직사건으로 노동자와 교수 구속. 공안기사 늘어남. 이후에 조작으로 드러남.
- 점증하듯이 많은 공안사건의 결말으로서 건국대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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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60년대 인혁당 사건
70년대 재미교포 간첩단 사건
80년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80년 미스유니버스 사건
83년 간첩 사건
85년 납북어부 사건
86년 민청련 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 피고인 문귀동 징역 5년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치안본부장 사과
89년 서경원 방북 사건 - 김대중 1만불
94년 구국전위 사건
95년 대학교수 간첩 사건

- 전기고문
- 물고문
- 통닭구이
- 비행기태우기, 비녀꽂기
- 만 3일만 잠을 재우지 않으면 어떤 것도 진술하게된다.
-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부분을 공략, 모멸감
- 개밥먹이기

노덕술 체포되자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습격
00년 전기고문기술자 이근안 7년형, 다른 이들은 1~2년

"6개월만 살아달라. 너 때문에 우리 8명이 시말서 써야된다. 이것까지 부인하면, 너희 가족까지 잡아다가 안기부 구속시키겠다."

7년간 감옥생활 하고, 가정마저 해체.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최동 -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분신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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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강제징집(국방부 447명. 그러나 축소발표)과 의문사
녹화사업(국방부 429명. 그러나 축소발표) - 관제 프락치 작업

1800여명이 학생운동과 관련해서 학원에서 나옴,
1300여명은 제적이나 투옥. 나머지는 강제징집(특수학적변동자)
녹화사업 입안자 보안사 서의남 중령
녹화사업: 진술서 - 심사 - 순화교육 - 서약서 - 관제프락치 임무
전기고문

84년부터 강제징집 관련 시위
85년 진혼비 강제철거

"월북이라는 겁을 주면 유족들이 더 이상 따지지 않겠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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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한국전쟁>

첫번째 오만. 중국군 참전 가능성 없음.
두번째 오만.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 없음.
(1932년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들이 자신의 복지를 요구하며 보너스 행진을 벌임. 맥아더가 이를 강제해산.)

중공군의 참전과 미8군 사령부 리지웨이 장군 부임
맥아더는 대중국전 및 26개 원폭 제안(해상봉쇄, 대만군투입 포함)
쉐이크다운 계획 : 핵무기 개발에 박차가해 1~2년 안에 대소련용 핵까지 개발. 136개 원폭 계획.

트루먼은 대소련용으로 핵무기를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
맥아더는 몇개만이라도 사용하자고 제안.
한반도 소개 계획까지 제출

리지웨이에 의해 반격 시작. 중공군 공군력의 부족과 인력에 의한 병참.
서울 수복 후 협상 준비
맥아더는 도쿄에서 성명서 발표 - 51년 봄에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연장됨.

(일본 점령사령관 시절 48년 대통령 후보 등록. 52년 대통령 선거 준비.)

맥아더 해임과 동시에 핵무기를 태평양으로 이동
맥아더 귀환 후 환영 퍼레이드 800만명. 매카시즘과 트루먼 비난 여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아이젠하워가 부각 및 당선.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전쟁 승리를 위한 비밀제안을 함. (핵과 핵폐기물 사용)

밴플리트 장군 부임과 중공군 대공세

트루먼 "내가 휴전협정을 했다면 군중들에 의해 교수형 당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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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레디 플랜>

52년 부산 계엄령 발동 및 야당 국회의원 탄압

육본 작전국장 이용문 - 대통령 암살계획
- 박정희 대령

미국 - 이승만 감금하고, UN군정 실시 계획

헌법 수정과 2대 대통령 취임

휴전회담과 북진 시위
한국의 작전권은 미국에 있으며 북진은 불가능

에버레디 플랜
- 이승만의 단독북진 압박에 대한 대응책
-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에 복속
- 반항하는 군과 민간지도자를 체포한다
- UN군정을 실시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
- 한국군의 병력증강과 미국의 작전권 이양
-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

1959년 경제위기
1960년 315 부정선거
김주열군의 죽음과 마산학생들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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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혁명공약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625 당시 피학살자유가족회 - 반국가단체로 규명
43유족의 86%가 연좌제로 고통받음
월북자
공안사건

유형: 대살, 공직발령 금지, 요시찰인 동향보고서

국보위가 연좌제 폐지, 625부역자 기록 삭제(84년)했으나, 기록은 계속 유지
80년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 보안사 민간인 사찰
98년 참여연대 - 경찰의 민간인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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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과 516>

"박정희에게 속아넘어갔다."

- 혁명계획서(419 1주년 시위에 대비한 비둘기작전계획)
-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說
-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여기저기 누설
- 장도영은 10일 전에 보고받음

- 박정희는 좌익경력(남로당) 때문에 예편당할 뻔한 것을 장도영이 복직.
- 30사단장 가족을 볼모로 쿠데타에 참여시킴.
- 30사단, 33사단, 공수여단의 야간훈련으로 보고가 되어 장도영이 취소시킴.
-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편지.
- 해병대가 한강대교에서 헌병과 대치한다는 사실에 장도영은 충격
- 6군단 포병대가 육군본부 점령

- 장도영이 윤보선 면담. 서로 총질하지 말 것을 지시. 장도영 진압 포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수락.
- UN 매그루더는 쿠데타군 진압을 지시. 장면은 행방불명.
- 케네디의 논리: 총리가 없는데, 진압할 수 없다.
- 장면은 칼멜 수녀원에 칩거하면서 미국과 연락. UN 사령관이 상황을 맡아서 처리할 것을 요구.
- 미국은, 상황이 명확해질 때 까지 지켜보기로 함. 붕괴될지도 모르는 장면내각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 장면은 미국이 결정해야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고 함.
- 518 미국의 지지 없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칼멜수도원 나옴. 내각 총사퇴 발표.

- 미국이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 박정희와 장도영은 군정기간을 두고 갈등
-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장도영의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직 박탈
- 장도영은 반혁명으로 사형까지 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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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50년대 움막촌
강제철거는 60년대부터.
도시주민들은 시 외곽(경기도 성남)에 강제이주. 광주대단지 20만명.
70년대 무허가 판자촌

71년 광주대폭동
79년 4명의 철거반원을 살해한 무등산타잔 박흥숙 사건
83년 목동계획(최초의 공영개발) - 그러나, 고급아파트 계획으로 변경
상계동
전농동 - 폐타이어에 불을 붙여 철탑에 옮겨붇음.
행당동 - 대낮에 성추행
봉천동 - 바지를 벗기고 연탄재
장애인들을 동원

상계 5동 개발이익 200억원
용역비 30억~70억 (철거가 늦어지면 용역업체에 손실)
86년 이후 철거 관련 사망자 32명
세입자의 입주비율은 1% 미만
건설은 공기단축이 원가절감의 지름길

한국은 남아공과 함께 가장 비인간적으로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나라 - 세계주거회의
강제철거는 인권침해행위이다. - UN 인권위
주거는 기본적인 권리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국가다.

철거는 합법, 반대는 불법.
순환식 개발과 가수용의 제도화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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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감옥, 청송감호소>

81년 국보위에서 사회보호법을 제정

삼청교육대 출신들에게 사회보호법 소급적용
81.02 수용, 감호자 인원 급증
폭동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
84년 박영두 사망
85년 6명 교도관 인질로 폭동 - 박영두, 구타, 등의 요구안 / 추가 띄우면 법정에서 진술할 계획이었으나 방치
87년 12월 1,200명 전원의 단식
88년 2차 인질사건, 3차 인질사건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칫솔 2개를 삼킴. 7개월 만에 병원 이송되어, 야당 총재와 소설가에게 밀서.
88년 한겨레 신문 통해 진실 알려져.
88년 현역법관들까지 참여하는 헌법소원 제기
89년 제소자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단식. 국정조사권 발동 요청. 전두환 구속, 노태우 물러가라, 사회보호법 폐지하라
89년 5조 1항 여야합의로 폐지. 5조 2항은 유지. (헌재에서 위헌결정이 내려질까 두려워, 국회에서 개정안 통과)
헌재의 5조 1항 위헌결정에 대해 법무부가 압력 행사
98년 최초공개

5조 1항 필요적 감호
42조 일반 제소자들과 마찬가지로 행형법의 적용

가혹한 징벌 - 뒷수정, 비녀꽂기
근로보상금 50여만원
생필품과 외부병원비는 개별부담

감호소 출소자들의 재범율 계속 높아져.
03년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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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과 코리아게이트>

76년 10월 희대의 로비사건 코리아게이트

미국 의원들이 매수되어 한국에 유리한 결정을 해주었다는 사건.
박동선 : 워싱턴 사교계에 부각

워싱턴에서 조지타운클럽 만듬.

76년 12월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입장표명 : 박동선과 한국정부는 무관하다
77년 12월 사법공조 체결

박동선이 중정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음.
박동선과 청와대가 공생관계라는 인식이 짙어짐.

당시 수사검사가 윤리위원회 사퇴.
군사원조안 확정.

미국의 쌀 수입시장인 한국과 쌀생산지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
쌀 수입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

69년 8월 닉슨독트린 - 주한미군의 철수
철수 대신 군사원조 할 것을 제안
70년 8월에 청와대의 대미로비 본격화
- 69년 3선개헌으로 인한 박 정권에 대한 더 나은 평판
- 그 로비스트 중 한명의 박동선
72년 유신헌법 선포

중정 - 재미교포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결점을 알아두라
76년 대미공작 계획. 박동선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평가
박동선은 쌀 중개로 번 돈으로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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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포로들>

10월말 인민군 포로 13만명, 하루에 20~30명씩 사망

미군피복 지급, PW 글씨, 포로번호 지명
전쟁 상황이 달라지고 포로수용소가 개선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발생함.

(1949년 제네바 협정에서 포로들의 자치조직 허용)
국적 상관 없이 영어를 하는 사람들을 선출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경찰, 감찰대(최고권력기관)
대부분 반공주의자들이 차지

간부들은 작업 열외
식사 및 보급물자 착복

전범조사과에서 조사받는 도중 정보제공자가 됨. 파벌을 형성. 대한반공청년단 조직. (51.08 이관순)
쿠데타 후 권력 장악

친공포로들의 조직화는 방어에서 시작. 해방동맹. (51.04 이학구)

거제도 17만명. 처음에는 친공포로들이 주도권 장악. 미군들은 좌시.

51.07 휴전회담이 시작
북 - 전원송환 / 남 - 자원송환

각 포로수용소에서의 전향공작, 성직자들도 전향공작에 동원. 친공진영에서는 적대시.
포로들을 이중간첩으로 활용

친공진영에서는 공민교육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군사교육 실시
인민군 + 빨치산 + 친공포로 합동작전 계획

송환에 대한 의사를 물어서, 별도의 수용소에 분류
친공포로들 강제송환 요청하면서 수용소장 면담 요청

52.10 백마고지 전투

북진통일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

53.06.18 반공포로 탈출 27,000명
이승만이 UN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함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특사로 옴.
중국은 이승만의 휴전협정 위반을 이유로 2차례 전투를 더 결정.

아이젠하워 - 한국이 휴전에 동의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맺겠다.

53.07 휴전협정 조인

53.08 포로송환
탈출하지 못한 7,000여명이 중립국 감독 하에 설득 작업. 188명 북행.
헌병총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설득 반대시위.

대한민국을 선택했던 35,000명의 포로들 군입대. 신분보장 문제로 계속 요시찰당하면서 고통받음.
귀환한 국군들이 심문하다가 많은 포로들이 자살.

65,000명의 국군포로 중에서 7,000여명만 송환.
상당수는 북한 인민군에 편입

미송환 인민군포로 - 포로가 아닌 간첩으로 취급받아 포로수용소가 아닌 형무소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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