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폴리테이아 총서 1
최장집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에게 ‘87년 6월항쟁’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6월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체제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87년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과거와 다르다. 변해야한다.”

그런데, “변해야한다”는 거대한 담론은, 권력자들과 피권력자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변화의 목소리는 권력자들을 거쳐, 피권력자들에게도 돌아오고 있는 것이죠.
비정규직 문제, 노동법 문제, 소수자 문제, 전쟁 문제, 등 피권력자들이 자신의 생존과 존엄을 뒷받침할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격해질 때면, 우리는 의례 변화의 주문을, 아니 변화의 질타를 받는 것입니다. 쏟아지는 질타 속에 가만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민정당에서 민자당으로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옷만 바꿔입은 권력자들이 있는가 하면, 과거 우리와 함께 아스팔트를 누볐던 이들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아스팔트를 떠나지 못한 우리들에게, 혹은 아스팔트로 뛰쳐나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이들은 한목소리로 주문합니다. “이제 과거와 다르다. 변해야한다.” 갈등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혹은 제도적인 절차를 통해서 해결하자고 합니다. 이제는 정권도 성숙해졌기 때문에 제도 내에서도 충분히 갈등을 소화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아마도 우리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 국민이거나, 국가의 제도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국민이 되는겁니다.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87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투표율과 계급간 불평등의 심화를 목격하면서, 과연 ‘87년 6월항쟁‘ 으로 변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는 얼마나 제도적으로 성숙해졌는지, 최대 화두였던 민주주의는 얼마나 살아숨쉬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1인 1표의 보통선거, 주기적인 선거, 정당의 경쟁과 같은 ‘형식’ 내지 ‘최소한의 절차’ 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부정선거와 군부독재로 얼룩진 과거의 권력자들 역시 헌법과 절차에 입각했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이 민주주의에 충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한 사회의 상태, 즉 사회 구성원들의 의사를 수렴하고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사회의 상태로 받아들입니다.

5년에 한번씩 이루어지는 대통령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었다고 해서, 의사의 수렴과 갈등의 해결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87년 6월항쟁‘ 의 진정한 의미는, 민주주의라는 민중들의 정치적 열망이 광범위하고 직접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체육관 선거라는 제도적 틀은 너무나 좁았기 때문에, 민중들은 체육관이 아닌 아스팔트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최장집 교수가 주목하는 기구는 정당입니다. 정당이야 말로, 민중들의 의사와 갈등을 제도적으로 수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구라는 것이죠. 정당이 민중들의 생활 밑바닥까지 뿌리내리는 것을 통해, 시의회에서부터 국회의사당까지 민중들의 의사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오랜 보수양당제를 지적합니다. 실제 정치적 분업에 불과했던 자유당-한민당 양당체제로부터 기인하는 보수양당제가, 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소수의 정치엘리트로만 구성된 간부정당, 일상적인 정치활동보다는 선거에 매몰되는 선거정당,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계층이 구체적이고 뚜렷하지 않은 포괄정당으로서의 한국 정당체제를 지적합니다.

즉, 좁고 오랜 이념 구도와 더욱이 정당으로서의 부족한 면모는 6월항쟁을 거치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이것이 6월항쟁이 이룬 대통령 직선제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갈등을 수렴하지 못하고 비제도적으로 터져나오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제도권 야당과 재야세력(비제도권 운동)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6월항쟁을 이끌었던 재야세력(국민운동본부)의 경우 629 선언에 따른 헌법개정에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제도권이라는 한계 때문에 제도권 야당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제도권 야당(새정치국민회의) 역시 집권 이후에 집권능력의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랜 행정부 권력과의 괴리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대안을 구체화하지 못하면서, 우파들의 이념공세와 정통 행정관료들에게 상당부분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고, 곧 차별성을 잃게됩니다.

언론과 재벌 역시 6월항쟁 이후 더욱 보수화되거나 경제력이 집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언론에 대한 분석은 다소 구체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지만, 재벌의 경제적 집중에 대해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 하에서의 경제규제 완화정책을 언급함과 동시에, 세계적인 시장의 통합으로 인해 기업이 갖게되는 대정부 비교우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정당체제입니다. 통합이란 갈등의 억압이 아니라 갈등의 자유로운 표출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저자는, 다양한 계층과 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체제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혹자는 정치도 서비스 산업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치공급자로서의 다양한 정당의 경쟁과 정치소비자로서의 국민의 선택권을 중시하는 것처럼 달콤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독점체제가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는 한국의 정치를 두고 어떻게 자유로운 경쟁을 기대할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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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2007-06-14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언짢으시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

sb 2007-06-1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습니다. 김진숙 부위원장님 새 책 선물로 주시면 더 괜찮을텐데.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