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책의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겠지만 도쿄대학 교수인 사토 도시키 <책과 컴퓨터> 최신호에 실린 ‘책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글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과거의 책은 파노라마처럼 시각이나 청각, 후각을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영상과 음성 미디어가 발달하자 이런 감각을 효율적으로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수단이 꼭 책이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컴퓨터가 멀티미디어의 제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한때 멀티미디어였던 문자는 다른 감각매체를 대신하는 자리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양적인 책의 비중은 훨씬 줄어들고 있다. ‘책의 위기’나 ‘교육의 위기’의 상당부분은 만들기 쉽고 읽기 쉬운, 가령 지은이의 이름으로 파는 책,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알고 싶은 것을 반복해주는 책, 대학교수가 교과서라 칭하며 권력으로 팔던 책들로 장사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새로운 지구에서 인류는‘책’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놓친 ‘책’다운 ‘책’이다. 아직은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런 ‘책’들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출판매출은 매년 감소하고 있지만 청소년도서는 성장하고 있다. 이때 청소년도서도 정보를 가공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새로 ‘시작’되는 책들이 큰 흐름을 이룬다. 미국에서는 지난해에 45.3%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으며 중국에서도 판매액이 16.4%나 증가했다. 일본 대형출판사들은 청소년 대상의 만화가 아니면 편집자 임금도 주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라고 다른가 출판사의 크기와 관계없이 일제히 청소년출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때마침 2008년에는 모든 국정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뀔 예정이다. “인류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표준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더 깊은 지식습득의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되려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만 바꾼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 머리 뚜껑을 열어놓고 모든 지식을 쏟아 붓기만 하는 지금의 ‘교실수업’같은 일은 컴퓨터가 얼마든지 대신해줄 수 있지만 스스로 보고 느끼고 맛보며 읽는 멀티미디어적 감각으로 상상력을 키워가는 것은 도서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이 대세다.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 www.hakdo.net)의 주최로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학교도서관 정책토론회의 열기는 분명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군사정권은 우민화정책 때문에 학교도서관을 기피했다지만 그 이후에도 학교도서관을 잉여적인 존재로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문민정부는 인터넷만 있으면 학교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고, 국민의 정부는 게임만 잘해도 대학간다고 외쳤고, 참여정부는 문화산업 잘 되어야 먹고산다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육부는 얼마 전 교육방송의 수능과외라는 사교육을 위해 학교도서관 리모델링 예산을 100억 원이나 삭감해, 공교육을 희생했다는 혐의마저 받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100억원부터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의 출발점이다. 정책당국자의 빠른 답변을 기다린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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